농민은 자랑스러워야 하고 농업은 먹고 살 수 있어야 하고, 농촌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야 한다. 개인적으로, "자랑스런 농민, 먹고 사는 농업, 사람 사는 농촌"을 이른바 3농 정책의 목표이자 가치로 삼고 있다. 그리고 독일, 오스트리아 등 EU(유럽연합)의 '3농 정책'을 설계하고 지탱하는 핵심적 정책과 구체적 전략은 직불금, 가족농, 협동조합, 그리고 농업회의소라고 믿고 있다.
한국농어촌복지포럼 공동대표인 정명채 박사도 '농업회의소'야말로 유력한 해법이자 도구라고 강변한다. 오늘날 우리 농업, 농촌의 위기를 극복하는 돌파구, 출구를 비로소 농업회의소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이 정치를 지배하는 현실에서 농업이 살아남는 방법은 헌법에 보장된 농민대의기구인 농업회의소를 설립하는 것"이라는 절박한 제안이다.
정 박사는 흔히 농업회의소를 기업인들의 상공회의소에 빗대 설명한다. "기업인들이 기업의 이익을 대의하기 위해 상공회의소를 만들었듯, 농민들도 농업을 지키고 농촌에서 살기위해서 농업회의소를 농민들의 뜻을 대변하고 대의하기 위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농업회의소'란 농업인의 대의기구로서 헌법 제123조 5항에 '국가는 농어민과 중소기업의 자조조직을 육성해야 하며 자율적 활동과 발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우리 농민들은 이미 법으로 보장된 농민의 권리를 모른 채 농사를 짓고 있었다. 관변 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은 관심이 없거나 나서서 농민들의 편을 들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 국회에서 법제화를 통해 묵은 숙제를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농민의 생계와 자존심을 지켜주는, EU 농업회의소독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EU 각국의 농업회의소(landwirtschaftkammer)들은 농지와 농민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주(州) 정부의 설치법에 근거해 설립된 농민자치기구로서 직업교육과 농업경영 지도상담이 고유업무이다. 아울러 주정부에게 위임, 수탁받은 농림사업을 집행한다. 특히 농지의 감소를 막고 난개발을 규제하면서 농지관리를 책임진다. 품목별 생산상한제(쿼터제)를 통해 통해 적정 생산자(농민) 규모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결국 모든 농민의 생계와 자존심을 지키는 믿음직한 비빌 언덕 노릇을 한다.
최근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의 포럼에서 국내 대표적인 '농업회의소론자'인 정명채 박사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강의를 다 듣고나서 그의 주장에 굳은 신뢰와 공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업회의소가 해법이라는 그의 주장이 근거있는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은 2차 가공은 공업, 3차 유통은 상업으로 구분, 농민이 농식품을 개발해서 가공해놓으면 소관부처가 농식품부에서 중소기업청으로 넘어간다. 가령, 순창에 가면 순창고추장이 더 이상 순창농민의 공유자산이 아니라 대기업의 사유상품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하지만 유럽은 다르다. 합리적이고 효과적이다. 농산업체지정육성법이란 게 있어서 농업회의소가 끝까지 농업의 6차산업, 농민의 성과를 관리하며 지켜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화장품원료공장, 제약회사 등은 농업법인의 대표인 농민 출신 조합장이 경영 책임을 맡고 있다. 1차 생산은 물론, 2차 가공, 3차 유통까지 농민이 '농업'의 울타리 속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구조다. 바로 이런 게 6차 농산업의 지극히 정상적인, 이상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WTO, 카길, 몬산토와 맞서 싸우는 농업회의소 한국 농부의 표준형은 '평균 농지 1.5ha에서 연간 1100만 원 밖에 못 버는' 소농, 가족농, 영세농들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경쟁 상대는 카길을 비롯한 5대 곡물메이저, 델몬트, 몬산토 등 가공할 다국적 농기업들이다. 이들 다국적 농기업(또는 글로벌 메이저)들은 WTO, FTA를 앞세우거나 등에 업고 농산물의 유통부터 가공은 물론, 생산기반마저 독점하고 있다. 세계농업 시장을, 생명산업을 구호이자 무기 삼아 칼처럼 휘두르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은 식량자급률 23%라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상황에 직면해있다.
다국적 농기업이라는 거악은 지금도 세계농업을 독점하기 위해 농업개방을 압박하고 자국농업보호정책을 무력화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이에 맞서 EU는 그 대응전략이자 무기로 '직불금'이라는 혁신적인 카드를 꺼내들었다. 공공재로서 농업을 지키기 위해,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은 물론 토양, 기후 등 환경을 보전하고 농촌의 전통, 문화, 경관을 보전하는 농업의 공익적 역할과 다원적 기능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부터 탄탄히 구축했다.
이때 직불금 정책을 실행하는 핵심전략은 바로 시행 주체가 누구인가에 달려있다. EU는 정부가 아니라 농업회의소를 직불금 제도의 시행주체로 결정했다. 겉으로는 정부와 협치(거버넌스)를 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속으로는 '자국농업 보호정책 및 지원에 대한 규제'라는 WTO의 감시와 시비를 피해가려는 고도의 전략적인 포석을 둔 것이다. UR과 WTO출범 이후에는 대외농정에 대응하는 자치 기능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다국적 농기업의 눈치를 보느라 쌀값 등 자국 농민의 기본소득도 보전치 못하는 한국에 농업회의소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정 박사는 "현재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농민 단체, 연합체, 협의체 등은 임의기구로써 정책참여가 법적으로 보장될 수 없을뿐더러 앞으로는 운동적 대항과 저항방식으로는 문제해결이 어려워지는 사회"라고 조언한다.
유럽의 농업회의소도 산업혁명 이후 농업 위축에 반발한 농민운동, 민주화운동의 성과물로서, 법적, 제도적 농정참여기구이다. 정 박사는 부디 "농업회의소 설립에 부정적이거나 비협조적인 정부와 기업, 농협중앙회 등의 방해도 이겨내 농업예산과 농업기관과 농지를 지키기 위해서 농업회의소를 반드시 설립하자"고 호소한다. 농민들이 조용히, 고분고분, 가만히 있으면, 다국적 농기업의 무차별적인 공세에 맞서 싸울 수 없다. 농업회의소 설립은 고사하고, 농민의 기본 생계와 최소한의 자존심조차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주인인 농민들이 농정을 책임지는 슈바츠 농업회의소바로 이런 EU 농업회의소의 모델이나 교과서 같은 사례를 알프스 자락의 산골마을에서 목격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티롤주의 주도인 인스부르크에서 동쪽으로 백리쯤 떨어진 로트홀츠(rotholzt)마을이다. 농업과 농촌의 주인인 농민들끼리 자치하는 슈바츠(schwaz) 군단위 농업회의소이다. 티롤주 농업회의소 산하 3개 지역, 9개 시군단위 농업회의소의 하나다.
오스트리아의 다른 농업회의소와 마찬가지로, 농민 기술 지도, 농업정책 지원, 교육, 인증 등 우리의 농업기술센터가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래서 이 지역엔 농정과나 농업국 공무원을 따로 두지 않는다. 농업국이 하는 역할을 온전히 농업회의소가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회의소장은 지자체장의 통제나 간섭을 받지 않는다. 6년 임기의 농업회의소 소장 또는 회장은 정규 공무원이 아니라 농민들 손으로 직접 선출한 선출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오직 농민만 출마할 수 있다. 관의 통제를 받고 지배당하기는 커녕, 오히려 지자체장보다 상위의 기관으로 권한을 행사하고 지역에서 대접받는다.
농민은 모두 농업회의소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물론 연 40~100유로의 회비도 납부해야 한다. 로트홀츠마을의 프리히너호프(prichnerhof) 제빵농가도 슈바츠 농업회의소의 회원으로 오스트리아 최고의 빵맛을 내기까지 농업회의소의 지도와 지원이 큰 도움이 됐다. 사소한 포장지마다 슈바츠 농업회의소 회원농가라는 '자랑스러운 표식'이 선명하다.
헬무트 트락슬러 슈바츠군 농업회의소장은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에서 본듯한 오스트리아 전통의상을 즐겨입는다. 당연히 농민출신으로 농민들이 투표로 선출한 직선회장이다. 회의소의 직원은 명실공히 농업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다. 정년이 보장되는 준 공무원 신분이다. 농업회의소의 인건비 등 예산은 전액 정부에서 지원한다. 행정은 필요한 예산만 지원하는 이른바 '팔길이의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을 엄수한다.
한국형 농업회의소 말고 '정상적인 농업회의소' 설계해야 지금 한국도 해묵은 농정의 난제를 풀 열쇠로서 '농업회의소'를 협치농정의 대안으로 입법화를 추진하고 있다. 다만, 슈바츠 농업회의소 같은 EU의 정책처럼 효과를 보려면, 관에서 먼저 목과 어깨의 힘부터 빼야 할 것이다. 한국적으로 변형된 농업회의소가 아니라 '교과서적인, 정상적인' 농업회의소를 설계해야 한다.
농업회의소가 정상적으로 설립되면 오로지 농민만 좋은 게 아니다. 농정당국이 최고의 수혜자가 된다. 농민의 대변하고 대표하는 농업회의소를 통해 농민의 구호나 민원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조정되고 정제된 정책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투명한 의사결정 시스템을 통해 농업 현장의 목소리를 날 것 그대로 수렴하고 반영할 수 있다. 정부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공지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정부 또는 정책 실패'의 부담과 불신을 덜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농업회의소가 제대로 설계, 설립, 운영되지 않으면 자칫 농업회의소가 관변단체로 전락, 농정의 거수기나 방패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기왕의 시범사업 과정에서 농정방향과 기조에 대한 정부와 농민단체간의 합의 없이 조직만 만들어졌다는 우려와 비판이 없지 않다. 농업회의소의 정체와 목적이 불명확하면, 즉 농민과 농민단체의 역할과 권한이 모호하면 농업정책과 현장이 괴리되고 반목하는 일이 또 되풀이 될 것이다.
EU 등 농업선진국의 농업회의소는 공법에 의한 유일한 농업인 대의기구로서 확고한 위상을 확립하고 있다. 따라서 농정자문 등 농업회의소의 기능과 역할을 제도화하고 농업인 대의기구로서 대표성을 부여하자면 법제화가 필수적이다. '돈'도 문제다. 농업회의소의 고유사업을 안정적으로 수행하려면 재정기반이 안정되어야 한다. 지자체장의 개인적 의지와 취향에 따라 사업이 왜곡되는 파행적 사고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우선, EU처럼 농업회의소장의 신분과 지위는 지자체장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관의 물질적 지원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회원들의 회비로 재정의 기초와 뼈대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기존 농정기구와 업무 중복과 상충요인을 최소화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따라서 사실상 '농민 자치'에 가까운 자생적, 자율적 사업모델 정립이 관건이다. 농업회의소가 농업인 자조조직이자 대의기구로서 공익적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선행조건이다.
"농업의 발전과 농업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회원의 의견 및 건의 등을 종합․조정하여 정부·지방자치단체 등에 이를 반영함으로써 농업의 경쟁력 강화 및 농촌진흥에 기여한다." 법안에서 밝히는 농업회의소의 설립 목적이자 존재 이유이다. 법대로만 실천하면 된다.
덧붙이는 글 | ※ ‘독일의 농부’ : 문화경관 직불금, 농업회의소, 협동조합, 사회안전망 등으로 국가와 정부의 돌봄과 보살핌을 받으며, ‘돈 버는 농업’이 아닌 ‘사람 사는 농촌’을 위한 ‘농부의 나라’를 지키고 있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 EU(유럽연합)의 행복한 농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