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안강 표충각의 원경 / 임진왜란 때 서생포 전투에서 순국한 이팽수를 기려 정조 시대에 세워진 정려 표충각을 도로에서 바라본 모습. 표충각은 안강읍 산대리 1563번지, 거의 도로변에 있어 찾기가 쉽다.
 안강 표충각의 원경 / 임진왜란 때 서생포 전투에서 순국한 이팽수를 기려 정조 시대에 세워진 정려 표충각을 도로에서 바라본 모습. 표충각은 안강읍 산대리 1563번지, 거의 도로변에 있어 찾기가 쉽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안강(安康)의 신라 초기 이름은 비화(比火)였다. 비화는 '대읍(大邑, 큰 들)'이라는 뜻으로, 형산강 유역을 끼고 있어 신라의 서울 서라벌을 지키는 군사적 요새였다. 그래서 동쪽의 형산(兄山)에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봉화를 설치했고, 곡창 지대의 중심지였으므로 일대의 물자를 수집하는 창(倉, 창고 기능의 관청)도 두었다.

비화가 안강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것은 757년(경덕왕 16), 나라 전역의 땅이름을 대대적으로 중국화한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안강은 안락하고 강녕하다는 땅이름과는 달리, 임진왜란 내내 조선군, 명군, 일본군이 번갈아가며 오간 군사 이동로였다. 게다가 군사들에게 먹일 식량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넓은 평야였다. 당연히 전투도 자주 벌어졌다.

안강에서 벌어진 가장 큰 격돌은 1593년 12월 2일 대전

임진왜란 발발 당시인 1592년에 한양을 향해 진격하며 거쳐간 왜군을 제외하면, 그들이 안강을 목표로 하여 쳐들어 온 가장 앞선 시기는 1593년 7월이었다. 바닷길을 거쳐 온 가등청정은 점령이 아니라 약탈이 목적이었다. 경상병사 고언백은 의병장 정공청, 이영화, 류충간과 함께 밤에 경주를 출발, 안강에서 의병장 권사악과 합세했다.

아군 장수들은 각각 50∼8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사방에서 "항복하거나, 빨리 덤벼라!" 하고 고함을 지르며 적을 공격했다. 아군의 고함소리가 안강 일대를 흔들었다. 아군이 적의 사방을 에워싸자 고언백은 정병 50명을 이끌고 적진 한복판으로 돌진했다. 적은 중앙과 사방에서 요란하게 공격해오는 아군이 제각각 소수인 것은 알아채지 못한 채 당황하여 제대로 응전도 하지 못하다가 부랴부랴 달아났다.

<선조실록> 1593년 윤11월 2일

상(上, 임금)이 이르기를,

"안강 싸움에서 오유충의 군사가 정예병인데 어찌하여 패하였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중국 군사가 적이 온다는 말을 듣고서 산골짜기 사이에 숨을 만한 곳이 있는 것을 보고 가서 복병을 설치하려 하였는데, 적이 먼저 점거하여 복병하였으므로 한꺼번에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중국 군사가 포를 쏘니 적이 조금 물러갔으나, 중국 군사는 다 양가죽으로 만든 긴 옷을 입어서 잘 달아나지 못하는지라, 적 10여 명이 칼을 휘두르며 충돌하니, 중국 군사가 물 가운데에서 많이 죽었습니다. 마침 홍계남이 적에게 잡혔던 중국 군사 70여 명을 구해냈습니다. 안강은 양반이 많이 사는 곳인데, 잡혀간 자가 수없이 많다 합니다."

하였다.

가장 큰 격돌은 그로부터 다섯 달 뒤인 1593년 12월 2일, 조명 연합군과 가등청정의 일본군이 맞붙은 전투였다. 조선 조정은 11월 12일 일본군들이 안강 일대를 노략질하고 돌아갔다는 도원수 권율과 경상감사 한효순의 보고를 듣고, 경상도에 머물고 있는 장수들에게 안강을 수복하라고 지시했다. 11월 23일에는 경상병사 고언백, 영천군수 홍계남, 경상방어사 권응수, 조방장 이수일 등을 책망하는 서신도 내려보냈다. 11월 3일의 패전에 대한 꾸짖음이었다.

11월 3일, 왜군이 세 갈래로 나뉘어 안강을 침탈했다. 고언백과 경주판관 박의장이 출전하고, 경주의 명군도 2천 군사를 지원했다. 그러나 아군의 출전 경로를 미리 예상한 왜군은 명군이 매복지로 여길 만한 곳에 미리 숨어 있다가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명군은 허둥지둥하던 끝에 대참사를 당했다. 조선 관군도 그 와중에 200여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당시는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회담이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일본군은 방방곡곡에서 약탈 행위를 일삼았다. 일반 백성들이 저항하면 살육이 빚어졌고, 조선군이 출동하면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 제독 유정(劉綎)은 소서행장에게 여러 차례 항의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그때마다 소서행장은 "그런 일은 장수들이 명령해서가 아니라 병사들이 함부로 저지른 행위일 뿐이오. 워낙 대군인 탓에 병사 하나하나를 감독하는 것은 불가능하오. 빨리 강화를 하지 않으면 이런 사고는 더 많아질 것이오" 하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소서행장의 답변은 '강화를 촉진하는 방책으로 약탈 행위를 장려하는 말투였으니 무력의 뒷받침이 없는 평화 회담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이형석 <임진전란사>의 표현).'

안강 표충각의 정면 모습 / 임진왜란 때 서생포 전투에서 순국한 이팽수를 기려 정조 시대에 세워진 정려 표충각의 정면 모습, 경북 안강읍 산대리 1563번지에 있다.
 안강 표충각의 정면 모습 / 임진왜란 때 서생포 전투에서 순국한 이팽수를 기려 정조 시대에 세워진 정려 표충각의 정면 모습, 경북 안강읍 산대리 1563번지에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12월 2일, 안강 지역으로 약탈 행위를 나온 일본군을 정벌하기 위해 경상병사 고언백과 경주판관 박의장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했다. 그러나 적세도 만만하지 않아 며칠을 두고 싸웠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고, 적들이 물러나지도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부총병(부사령관) 오유충(吳惟忠)과 왕필적(王必廸), 참장(참모장) 낙상지(駱尙志) 등 경주의 명군 수뇌부는 논의 끝에 '적이 경주 후방인 안강에 침입하여 군량미를 실어올 길을 차단하고 있으니 가만 두었다가는 우리가 굶어서 죽을 게요' 하면서 대장들이 직접 안강으로 달려왔다.

명나라 군대까지 합세해도 전투는 며칠째 접전 계속

안강으로 출전해 온 명군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래도 싸움은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접전이 계속되던 중 이윽고 고언백의 조선군 병사들이 승기를 잡았다. 조선군 군사들이 승리의 기운을 타고 용맹돌진하니 마침내 적의 시체가 들판에 쌓여가기 시작했다.

사람 눈썹 모양의 미첨도(眉尖刀)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으로 이름 높은 박의장 또한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오유충의 언월도와 대조적으로 미첨도는 모양이 단순해서 실제 싸움에서는 도리어 효율적인 실전용 대도(大刀)이다. 박의장의 미첨도가 춤을 추니 적군은 보병이든 기병이든 가릴 것 없이 눈썹같이 날카로운 칼날 아래 풀잎처럼 쓰러졌다.

안강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경주판관 박의장을 기리는 비는 (경주)황성공원에서 볼 수 있다. 안내판에는 '박무의공비(朴武毅公碑)로 기록되어 있지만 비석에는 '朴武毅公收復東都碑(박무의공수복동도비)'라 새겨져 있다. 무의공 박의장이 동도(경주)를 수복한 것을 기려 세운 비라는 뜻이다. 안내판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박무의공의 이름은 의장(毅長)으로,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경주부 판관으로 왜적에게 빼앗겼던 경주성 탈환전에 참전하여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이어 7년 동안이나 경주에서 왜적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승진시켰다. 그 후 박의장이 영중에서 세상을 뜨자 조정에서는 무의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 비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861년(철종 12)에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높이 2.3m, 폭 89cm, 두께 34cm이다.>
 안강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경주판관 박의장을 기리는 비는 (경주)황성공원에서 볼 수 있다. 안내판에는 '박무의공비(朴武毅公碑)로 기록되어 있지만 비석에는 '朴武毅公收復東都碑(박무의공수복동도비)'라 새겨져 있다. 무의공 박의장이 동도(경주)를 수복한 것을 기려 세운 비라는 뜻이다. 안내판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박무의공의 이름은 의장(毅長)으로,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경주부 판관으로 왜적에게 빼앗겼던 경주성 탈환전에 참전하여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이어 7년 동안이나 경주에서 왜적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승진시켰다. 그 후 박의장이 영중에서 세상을 뜨자 조정에서는 무의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 비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861년(철종 12)에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높이 2.3m, 폭 89cm, 두께 34cm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수 천(千) 근 도끼(斤)를 휘두른다 하여 '낙천근(駱千斤)'이라는 별명을 가진 낙상지가 흰 머리 위에 투구를 얹은 채 달려나가 적들을 무수히 참살하면서 전세는 더욱 기울었다. 이 광경을 본 오유충도 질세라 초승달 모양의 언월도(偃月刀)를 휘둘러 적장 한 명의 오른쪽 어깨를 잘랐다.

왕필적 또한 가지가 온통 삐쭉삐쭉한 대나무에 여러 창날을 붙인 무기를 든 낭선수(狼筅手), 창날이 셋인 창과 곤봉으로 무장한 당파수(钂鈀手), 휴대용 화승총 쾌창을 든 쾌창수(快槍手)를 좌우에 거느리고 뛰어들어 적진의 한쪽 날개를 격파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생지옥이 이어지고, 마침내 일본군은 저들의 소굴인 서생포를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후 적들은 서생포에서 감히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생포에 박혀 있던 일본군은 약 13개월 뒤인 1597년 1월 23일 안강에 들어왔다. 박의장과 의병장 김득복이 대적하여 왜군 100명을 참수했다. 안락하고 강녕한 안강, 그러나 이름답지 않게 자주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었던 것이다.

안강 표충각의 안내판과 약간 측면 모습 / 임진왜란 때 서생포 전투에서 순국한 이팽수를 기려 정조 시대에 세워진 정려 표충각의 안내판과 약간 측면 모습이다. 표충각은 경북 안강읍 산대리 1563번지에 있다.
 안강 표충각의 안내판과 약간 측면 모습 / 임진왜란 때 서생포 전투에서 순국한 이팽수를 기려 정조 시대에 세워진 정려 표충각의 안내판과 약간 측면 모습이다. 표충각은 경북 안강읍 산대리 1563번지에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오늘날 안강을 찾았을 때, 가장 손쉽게 답사할 수 있는 임진왜란 유적은 표충각(表忠閣)이다. 표충각은 서생포 전투에서 순국한 이팽수(李彭壽, 1559∼1596)를 기려 나라에서 세운 정려로, 안강 읍내를 지나 영천으로 가는 도로변의 산대리 1563번지에 있다.

이팽수는 과거 급제 1년 만에 순국했다. 그래서 <정조실록> 1784년(정조 8) 3월 20일자에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이 임금에게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팽수에 대해서는 경상도 관찰사의 건의에 따라 조정에서 이미 정려(旌閭)를 하였습니다. 이팽수는 왜란을 당하여 붓을 던졌는데, 과거에 합격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마침내 순국에 이르렀으므로 애당초 직명(職名)이 없었고, 단지 한 사람의 (과거) 출신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동시에 사절(死節)한 김호(金虎)를 10년 전에 이미 증직(贈職)하도록 명하셨으니, 지금 역시 마찬가지로 증직하여 격려하고 권장하는 것이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과거 합격 1년 만에 왜군과 싸우다가 순국한 이팽수

증 병조참판 이팽수는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마치 어른처럼 장례에 임하여 사람들로부터 효자라는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붓과 삽을 던진 뒤 마을 청년들을 이끌고 창의하여 경주와 안강 지역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문천회맹에도 참가하여 경주성 탈환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문천회맹에 대해서는 관련 기사 <일제가 헐어버리려한 사당, 거짓말로 지켜내다> 참조)

그러나 그는 한창 젊은 서른여덟에 울산 서생포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특히 그의 아들까지도 1636년 병자호란 때 용인 근처 금천 전투에서 순국하여, 나라를 위해 2대가 목숨을 던진 눈물겨운 가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표충각 안에는 높이 199cm, 너비 54cm, 폭 23cm의 크기의 '참판 이공 정려비'가 세워져 있다. 

안강 표충각의 현판
 안강 표충각의 현판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안강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임진왜란 유적에는 금곡사와 도덕암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주향교 교생들은 공자 등의 위패를 들고 안강읍 두류길 758의 금곡사로 갔다. 안전하게 숨기기에 아주 적합한 깊은 산골로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금곡사는 아주 깊은 골짜기 속에 고이 몸을 숨기고 있다. 28번 국도로부터 약 2km에 걸쳐 두류공단을 뚫고 지나친 다음, 이제는 길이 끊어졌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못둑 위에 올랐다가, 꼬불꼬불한 물가 좁은 길을 거느린 화산곡지라는 이름의 큰 호수를 끼고 2km가량 골짜기 안으로 들어서면 문득 작은 사찰이 나타난다. 그 이름 금곡사, 대웅전 앞에 보이는 석탑이 일반 탑이 아니라 원광대사 부도탑(문화재자료 97호)이라는 점이 너무나 특이한 사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주향교 교생들은 공자 등의 위패를 들고 금곡사(경주시 안강읍 두류길 758)로 갔다. 안전하게 숨기기에 아주 적합한 깊은 산골로 여겼기 때문이다. 금곡사는 대웅전 앞에 보이는 석탑이 일반 탑이 아니라 원광대사 부도탑(문화재자료 97호)이라는 점이 특이한 사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주향교 교생들은 공자 등의 위패를 들고 금곡사(경주시 안강읍 두류길 758)로 갔다. 안전하게 숨기기에 아주 적합한 깊은 산골로 여겼기 때문이다. 금곡사는 대웅전 앞에 보이는 석탑이 일반 탑이 아니라 원광대사 부도탑(문화재자료 97호)이라는 점이 특이한 사찰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그래도 경주 사람들은 임진왜란 당시 너무나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위패를 들고 금곡사를 떠나 옥산서원을 거친 후, 도덕산 정상부의 도덕암으로 재차 옮겨간다. 28번 도로에서 금곡사와 반대편의 옥산서원까지 약 2km, 옥산서원에서 정혜사 13층 석탑을 지나 다시 도덕암까지 약 3km, 거리로만 보아도 금곡사보다 더 깊은 산중이다.

경주 사람들, 금곡사보다 더 높고 깊은 도덕암으로 피란

게다가 금곡사 가는 길은 좁고 굽은 외길이기는 해도 비교적 평탄하지만, 도덕암 가는 길은 중간 이후부터 줄곧 가파른 오르막이어서 낡고 낡은 내 차는 이내 숨이 막힌다. 특히 상징적인 것은, 금곡사는 '안강읍 두류길 758'로 위치가 확인되지만 도덕암은 주소 검색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겨우 '안강읍 옥산리 산171'라는 주소를 찾아 입력해 보면 도덕암으로 찾아가는 산길의 중간쯤에 멈춰버린다. 

임진왜란 발발 초기, 경주향교 유생들이 공자 등 선현들의 위패를 모셔들고 가서 숨겼던 도덕산 정상부의 도덕암(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산171). 옥산서원 앞을 지나 꼬불꼬불한 계곡과 산길을 한참 들어가고 또 올라가면 나오는 도덕암의 임진왜란 당시 이름은 두덕암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초기, 경주향교 유생들이 공자 등 선현들의 위패를 모셔들고 가서 숨겼던 도덕산 정상부의 도덕암(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산171). 옥산서원 앞을 지나 꼬불꼬불한 계곡과 산길을 한참 들어가고 또 올라가면 나오는 도덕암의 임진왜란 당시 이름은 두덕암이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이토록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산중까지 선조들은 왜적을 피해 허위허위 내달렸구나."

도덕암에 닿아, 저 아래로 까마득하게 이어지는 계곡을 내려 보노라면 저절로 그런 한탄이 솟구친다. 왜적의 칼날을 벗어나려고, 비록 인근에 있지만 그러나 평생에 걸쳐 한 번도 밟아보지 않았던 험준한 산속을 헤맨 선조들……. 그 고통의 발자취를 찾아 나는 지금 땀흘려 걷고 있다.

"내 차가 너무 낡은 탓일까? 아니면, 겨레의 역사를 온몸으로 느껴보려는 내 마음이 아직은 살아 뜨거운 것인가!"

안강 표충각을 안내하는 도로변의 표지석 / 임진왜란 때 서생포 전투에서 순국한 이팽수를 기려 정조 시대에 세워진 정려 표충각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는 도로변의 표지석. 사진 오른쪽 가운데에 소나무 두어 그루가 서서 감싸고 있는 가운데에 표충각이 있다. 도로변 표지석에서 표충각이 있는 안강읍 산대리 1563번지까지는 약 150m 정도밖에 안 된다.
 안강 표충각을 안내하는 도로변의 표지석 / 임진왜란 때 서생포 전투에서 순국한 이팽수를 기려 정조 시대에 세워진 정려 표충각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는 도로변의 표지석. 사진 오른쪽 가운데에 소나무 두어 그루가 서서 감싸고 있는 가운데에 표충각이 있다. 도로변 표지석에서 표충각이 있는 안강읍 산대리 1563번지까지는 약 150m 정도밖에 안 된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태그:#이팽수, #표충각, #박의장, #안강, #고언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