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도박장을 운영했던 그들에게 감사 인사라도 보내야 할까?
거미줄처럼 얽혀있고 나비효과처럼 강력해서 이미 수차례 여러 언론이 해당 사건의 일지를 정리한 바 있다. 앞서 언급한 범서방파의 도박장 운영 혐의부터 '네이처 리퍼블릭'의 정운호 대표의 도박 혐의, 그로 인한 최유정·홍만표 변호사 구속, 넥슨과 진경준 게이트로 새롭게 떠오른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비리들.
억지로 맞추기도 힘들겠다 싶을 정도로 다양한 층위의 사건들이 존재했고 그 사건들을 밟고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가니 우리의 대통령이 그 '우아한' 자태를 서서히 드러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씁쓸하게도 왠지 예견된 일인 것만 같다. 그저 청와대와 <조선일보>의 악력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총선 참패 이후 보수끼리의 다툼이라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라는 생각과 함께 두 세력 모두 약점하나씩은 잡고 있겠거니 하는 심정이었다.
넥슨과 우병우의 관계를 폭로하고 K스포츠와 미르재단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조선일보>를 대상으로 자존심과 같은 송희영 주필의 비리를 폭로함으로서 완승을 거둔 청와대를 보며, 쥐고 있던 팝콘을 먹었더랬다. 찬란한 승리를 거두며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이 사건이 실은 막장 드라마였고, 심지어 우 수석은 고작해야 티저영상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K스포츠 재단과 미르재단의 중심에 최순실이라는 미지의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한겨레와 학교의 민주화를 위해 총장을 끌어내리려다 조국의 민주화와 대통령 하야 운동까지 영향을 미쳐버린 이화여대. 이들의 콜라보레이션은 수면 아래 있던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을 가시화했고 K스포츠와 미르재단의 설립과 모금과정의 문제점들을 하나씩 들어냈다.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재벌들이 꼼짝없이 수백억을 내놓고, '듣보잡' 인사를 마음대로 등용하고, '장관시켜줄게, 세무조사 받고 싶어?' 등의 말들을 쏟아냈다는 최순실과 그의 측근인 차은택 감독의 등장이 단순히 대통령 측근 비리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이 재미있는 드라마가 허무하게 끝나지 않도록 힘써준 전직 펜싱선수 출신이자 최순실의 '최애캐'였던 고영태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달한다.
'연설문 고치기를 좋아했던 그녀...' 아련하게까지 느껴지는 고영태의 기억 속 최씨는 더 이상 그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최씨의 그 아련한 취미생활을 전 국민이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고씨의 수줍은 고백 뒤에 봉건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못을 박고 개헌 블랙홀을 터뜨린 청와대를 무릎 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태블릿PC였다.
삼성 갤럭시 노트7 폭발 사고로 곤욕을 치룬 삼성이 노린 간접광고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그 태블릿PC는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를 입수한 jtbc 역시 종합편성채널 뉴스라는 패널티를 뚫고 무려 8%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삼성에게 연이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기껏해야 최씨의 셀카나 들어있을 줄 알았던 태블릿PC는 노다지였던 것이었다.
국정인사부터 국가기밀까지, 선거운동시절과 인수위, 이후 3년간의 국정운영 등 최씨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헬조선인 줄 알았던 이곳은 알고 보니 고조선이었고 따라서 코뮤니스트 대통령은 절대 반대지만 샤머니스트 대통령은 가능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씨의 관계, 대대손손 이어진 최씨 가문의 영적능력은 '무당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신들을 번역의 고초를 겪게 하기도 했다.
여기까지의 과정이 흥미진진했을 수 있다. '치맥'을 뜯으며 예능 보듯 뉴스를 봤던 저녁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는 관객이 아니다. 대통령의 생명은 끝났다. 그의 측근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종교인이든, 신경쇠약의 영애(令愛)가 그들에게 정신적 지배를 받았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민주주의의 절차인 투표로 당선이 되었고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 옆에 최순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라고 당당히 밝힌 김무성 의원의 말처럼 박근혜의 상태를 알면서 후보로 올린 새누리당. 국민 앞에 단 한 마디의 사죄의 말도 없이 묘한 웃음 뒤에 숨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비롯해, 대통령이 시킨 일일 뿐이라며 '생각 없음의 죄'를 시전하고 있는 청와대 관료들. 청와대와 여당의 몰락이 결코 자신들이 잘해서 생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야당. 빈 상자를 들고 판토마임을 하는 검찰. 이 모든 개판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규제 없는 재벌들.
갑작스럽게, 하지만 예측가능하게 상영된 이 드라마의 '막장(마지막 장)'은 이 모든 책임자들의 얼굴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으로 장식되어야 한다. 이미 대하드라마가 되어버린 이 사건은 아직도 수십 회의 상영 차수를 남겨놓고 있고 주인공은 분명 바뀌고 있다. 이제 카메라는 국민에게로 또 민중에게로 돌아왔고 어떤 등장인물보다 정의로울 우리의 민중은 미친 존재감을 뽐내며 악당을 물리칠 것이다. 아니, 물리쳐야 한다.
놀랍게도 아직까지 존재하는 5%의 지지율을 제외한 95%의 힘으로 이 드라마는 곧 '인생드라마'가 될 것이다. 승리감으로 가득 찬 종방연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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