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100만 촛불의 한가운데서 가장 빛났던 것은 학교 밖으로 나온 중고등학생들의 외침이었다. 정교한 논리와 단호한 입장, 거침없는 행동과 경쾌한 문화를 보여준 학생들의 모습은 무능력하고 비겁했던 기성세대의 반성을 촉구하는 '죽비소리'였다.
공부란 무엇인가 : 그 본원적 의미에 대하여서열화를 부추기는 경쟁교육에 익숙한 우리에게 공부는 으레 대입, 취직과 같은 단어들로 연결된다. 삶에서 철저히 분리되고, 오직 실리만을 추구하는 공부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죽은 공부다. 그러나 교실 밖으로 나온 학생들에게 촛불의 거리는 정의와 연대,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살아있는 '학교'였다. 진짜 공부는 문자의 틀이나 학교라는 제도적 담장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책 <호모 쿵푸스>에서 공부에 대한 잘못된 관점은 근대 제도의 산물이라고 비판한다. <호모 쿵푸스>의 부제가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인 것처럼 그는 "공부란 본디 삶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의 탐색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질문들은 세상 천지에 널려 있다. 공부란 무엇인가? 학교를 떠나는 순간 공부가 끝나는 것이라면, 생로병사에 대한 통찰력은 언제, 어디서 배워야 하는가? (중략) 공부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의 그물망을 던지는 것이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홍대용) 고로,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9쪽)'공부란 눈앞의 실리를 따라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 것,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더 간단히 말하며,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40쪽)그럼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까. 공부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다. 독서야말로 초야에 묻혀서도 천하의 이치를 꿰뚫는 눈을 갖게 해준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비약'의 순간이 오는데 고미숙은 이 단계를 '언어와 문자의 경계를 넘어 세상 모든 것이 책이 되는 경이로운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앎은 행위에서 시작되고 행위는 앎의 완성이 되는 '지행합일'의 경지다.
무예수련에도 단계가 있듯이, 공부를 하나의 '마음수련'이라고 한다면 그 최고 경지는 '배움과 가르침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일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누구든 배울 수 있고, 누구든 가르칠 수 있다. 더 이상 배울게 없을 만큼 많이 아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줄게 없을 만큼 모자라는 사람도 없다. 다시 말해 일상의 모든 것이 공부가 되는 단계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공부라는 것은 일상생활과 일 속에 있다. 평소에 행동을 공손히 하고 일을 공경히 하며 남을 진실되게 대하는 것. 이것이 곧 공부라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것은 이 이치를 밝히고자 해서이다"라고 썼다.
혁명과 공부가 만났을 때내가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이유는 지금보다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자 해서다. 내가 지금보다 나아져야 나로 인해 형성된 관계가 나아지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변이가 없고서야 세상의 질서는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 공부가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모두가 스승이자 모두가 벗인 진정한 '배움터'로 전환할 수 있다면? 고미숙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인생역전'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근대 이전,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코뮌'(commune)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스승을 만난다는 건 바로 그 코뮌에 접속한다는 뜻이었다.' (89쪽)사실 따지고 보면 공부란 그 자체로 혁명이다. 억압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이 곧 혁명이라면, 그 시작은 공부일 것이다. 공부란 인생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고 삶을 통찰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공부란 존재의 근원적 소외를 극복하는 무기다. 소외되지 않은 자만이 구조적인 억압에 맞서 싸울 수 있다. 어쩌면 '진보의 위기'란 '공부의 위기'인지도 모른다.
얼 쇼리스는 <희망의 인문학>에서 빈민들이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급진적'인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인문학이란 빈민들 스스로 성찰하고 탐색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힘'있는 존재로 바꿔나간다. 빈민들이 철학적으로 무장하게 된다면 그들은 공적 세계에 눈을 뜨며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요새는 여기 저기서 인문학 강좌를 여는 것이 '붐'처럼 되고 있는데, 얼 쇼리스의 지적은 생각해 볼 바가 많다. 가장 소외되고 억압받는 곳 낮고 후미진 곳이야 말로 진정으로 '공부'를 일으켜 세워야 할 곳이 아닐까. 고미숙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앎의 코뮌을 조직하라."
덧붙이는 글 | <호모 쿵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펴냄 / 2012 8 / 12,900원)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