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나의 독서 모임 '성인챇방'은 제주로 떠났다. 멤버 넷 중 한 명이 당시 제주에 살고 있었으니 네 번에 한 번은 가야 맞겠지만, 마음 먹고 떠난 그와 달리 나머지 사람들에겐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몇 달 동안 '가자... 가야지...' 하다가 마침내 티켓을 끊었다. 삼박 사일 짧은 여정의 종착지는 어느 동네 서점이었다.
제주의 낯선 카페에서 보물을 발견하다
오름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 쉬어 가려 들른 카페 책꽂이에 눈길 끄는 제목이 꽂혀 있었다. <자연도감>. 더위를 식히며 첫 페이지를 펼쳐든 나는 금세 책에 빠져들었다.
"독버섯인지 아닌지 알려면 조금 씹어서 맛을 보는 등(곧 뱉어야 한다)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습니다."식물도감이나 세밀화집을 갖고 싶다고 꽤 오래 생각했다. 그러나 늘 다른 책에 밀려 장바구니에 담지 못한 게 몇 년째였다. 이 문구를 발견한 순간, 이렇게 귀여운 도감이라면 안 가지고는 못 배기겠다 싶었다.
이 책은 사토우치 아이가 쓰고, 마쓰오카 다쓰히데가 그렸다(그림이 매우 중요하다). 캠핑의 여섯 단계 순서대로 목차를 구성했는데, 다음과 같다.
1. 걷는다
2. 먹는다
3. 잔다
4. 만들며 논다
5. 동식물을 만난다
6. 위험에 대처한다
책을 펴낸 진선출판사 홈페이지를 보니 도감 전문 출판사인 듯했다. '자연과 삶의 향기를 전합니다'라는 인사말이 마음에 들었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도감 시리즈는 다음 그림의 일곱 권이다.
일본 사람이 쓴 책이지만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자연 환경에 맞게 재구성한 부분이 많이 보인다. 산에서 볼 수 있는 동식물, 특히 산나물이나 열매는 한국에서 자라는 것들을 소개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역자와 편집자의 세심함이 매우 고맙게 느껴진다. 잘 배워 두었다가 산속으로 떠날 때 써먹도록 하자.
캠핑 중에 설거지하는 방법에 대한 서술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야외에서는 세제를 쓰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집에서도 쓰지 않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그런데 쉽지 않다 이거. 일본 작가가 쓴 책답게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격려와 응원이 가득 담겨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기자기함'으로 감싸고 있다. '어두우면 겁이 난다', '처음에는 누구나 걱정이 된다' 같은 제목에서 픽- 웃음이 나지만, 이내 위로 받는다. 이런 게 힐링이구나.
책을 읽다 생각난 어린 시절 기억 하나.
네 살 때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추석 전날이었다. 옆집 언니와 뒷산 목장에 놀러 간다고 집을 나섰다. 동네 애들 몇 더해서 신나게 수풀을 헤쳐 나갔는데, 아무리 가도 목장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언니는 '엄마 불러 올게' 하며 뒤돌아 반대 편으로 뛰어갔다. 주변이 금세 어둑해졌다. 산속에서 헤매던 나는 산 아래로 구르다 걷다 구르다 걷다 했다. 두툼히 쌓인 낙엽은 푹신했지만 잔가지들이 목을 찔렀다.
기특하게도 나는 혼자서 마을로 내려왔다. 그러니까 우리집에서 뒷산을 올라 반대편 양짓말로 내려간 것이다. 큰길 가 어느 집에 들어가 주인할머니한테 집에 전화를 빌려달라고 한 건 내 기억이지만, 내가 사라져서 이미 온 동네가 발칵 뒤집힌 상황이었기에 아마도 할머니가 먼저 나를 안아주고 집에 전화도 걸어주었을 테다.
그러나 기억은 제멋대로 뒤섞이고 왜곡된다. 다음 장면은 내가 깜깜한 들판을 가로질러 양짓말에서 웃말 우리집까지 홀로 걷는다. 파란 대문을 열면 엄마와 작은엄마가 울면서 버선발로 뛰어나온다. 정황상 이것 역시 다른 날의 기억이 엄한 데 가서 붙은 것일 테다. 매일매일 온 동네를 쏘다니던 말괄량이였으니까.
그러나 나는 이렇듯 씩씩하게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억으로 그날의 공포를 이겨낸 듯하다. 그날 이후에도 뒷산이 무섭지는 않았으니까. 산속엔 재밌는 게 너무도 많았다. 산딸기며 으름이며 철마다 달콤한 열매가 열렸고, 겨울엔 썰매장이 돼 주었다.
아빠는 시루산에 호랑이가 산다고 했다. 옛날에 할아버지가 산 넘어 시장에서 고등어를 사오는 날이면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나 여느 가족의 전설이 그렇듯 할아버지는 호랑이를 무찔렀고 고등어는 무사히 산에 올랐다. 산 중턱 동굴이며 외딴집에 얽힌 으스스한 이야기는 셀 수도 없었다.
인간은 추억 속에 사는 존재라고 했던가. 유년의 기억은 갈수록 짙어진다. 떠나보내기 싫어 더 애쓰는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 자취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나는 눈을 감으면 금세 고향집에 가 있곤 한다. 내 옆에는 젊은 아버지가 나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 별자리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원한 바람에 물기가 스며 있다. 귀뚜라미가 이따금 귀를 간질인다.
어렸을 때 우리는 모두 탐험가였다.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같은 책을 닳도록 읽지 않았는가. 지금의 나는 어떤가. 휴대폰만 잠시 안 보여도 아무 것도 못 하는 건 아닐까.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문명의 이기들에 몸과 마음을 모두 의지해버린 나, 산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불안을 지닌 나와 같은 당신에게 추천한다. 여행 가방에 넣을 첫 번째 책, <모험도감: 캠핑과 야외생활의 모든 것>.
덧붙이는 글 | 개인 SNS(브런치)에 게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