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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을 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토록 혁혁할 거요."

1905년 일본이 우리(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자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 나라를 팔아먹는 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퇴궐한 이근택이 집에 돌아와 가족들을 모아놓고 했다는 말이다.

"이집 주인 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도 모르고 몇 년간 이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으리오."

이근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엌에서 '꽝!' 소리가 났다. 부엌에서 듣고 있던 계집종이 식칼로 도마를 후려친 것. 계집종은 마당으로 뛰쳐나가며 안방을 향해 이처럼 호통 친 후 집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책표지.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책표지.
ⓒ 인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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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택은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으로 불린다. 을사오적 중 가장 악독하고 교활했다고. 이근택 집안은 한일병합 직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세 명이나 받은 유일한 집안인데, 자식들이 세습을 함으로써 결론적으로 여섯 명이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씁쓸한 것은 당시 기득권들 중에는 이근택 삼형제나, 작위는 물론 대를 이어 친일한 그 자식들처럼 매국 또는 친일을 '황국신민으로서의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후손들이 그와 같은 대가로 얻은 특혜로 승승장구의 삶을 누렸다는 것. 그럼에도 일부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는커녕 미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친일파의 한국현대사>(인문서원 펴냄)의 부제는 '나라를 팔아먹고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던 악질 매국노 44인 이야기'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우범선과 그 아들 우장춘 박사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여자 밀정 배정자, 친일파 1호 김인승, 여성 친일파 대명사 모윤숙 등, 살아생전 정치 여러 분야에서 나름의 인정을 받은 44인의 '친일행적과 그 후'를 들려준다.

"그 많은 여성인사들을 배출했음에도 왜 아직까지 김활란 동상이 그렇게 서 있는지. 그동안 이대생들을 부모 잘 만난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자라 역사인식이나 현실감각도 떨어지고, 개념이나 남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고...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정유라 사태 보면서 이대생들이 모처럼 큰 일 해냈네. 선배들보다 후배들이 낫네. 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정유라와 함께 이대에서 없어져야 하는 것은 김활란 동상 아닌가요?"

10월 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관련 뉴스를 함께 보던 지인이 이처럼 말한다.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한 집단을 몇 사람 또는 특정사건으로 이처럼 단정 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이화여대생들에 대한 평가와 김활란 동상을 함께 없애야 한다는 말에 적극 공감한다.

여성박사 1호 김활란(1899~1970년), 이화여대 초대총장 김활란도 책에서 다루는 44인 중 한 명이다. 저자에 의하면 "김활란은 일제강점기에는 수많은 연설과 담화, 기고, 일련의 활동들을 통해 젊은 여성들, 심지어는 제자들까지 정신대(위안부)로, 청년들은 전쟁터로, 장년까지 일제의 노동현장으로 팔아먹는데 앞장섰다"고 한다.

해방 후 김활란은 미군정 때부터 이승만·박정희 정권까지 단 한 번도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운 적이 없다. 오히려 두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수족으로 활동했다. "김활란상' 제정 움직임이 보도된 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반대성명서에 따르면, 김활란은 "4·19 당시 이대 학생들의 시위 점거를 막았으며, 이듬해 5·16이 터지자 박정희의 특사로 미국으로 달려가서 군사 반란의 정당성 홍보에 날뛰고 다녔다"고 한다. 여기자 최은희는 그를 두고 "모질고 악착한 역경을 맛보지 않고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산 행운아"라고 평했다.

김활란이 60년 가까이 이화인으로 살면서 일제 강점기부터 건국기까지 이화여대를 지키고 가꾼 공로는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그를 여성교육계, 나아가 한국여성계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그의 일생에 흠결이 너무 많다. 이화여대 하나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이해해주기에는 그가 저지른 과오가 너무 크다. 그리고 반성이라곤 없었다. - 책에서.

오랫동안 김활란의 친일행적은 그리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다행히 몇 년 전부터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 행적에 비해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재평가 등 친일행적 관련 어떤 작업이 꼭 필요할 것이다.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활란 여성지도자상'까지 버젓이 존재, 2016년 11월 1일(제51회 여성대회)에 누군가 수상하는 영광을 얻는 현실이니 말이다.

''여성 박사 제1호' 카멜레온 같은 삶'이란 제목으로 시대 변화와 흐름 따라 친일과 반미, 친미 등을 약삭빠르게 선택해 출세인의 삶을 살았던, 그럼에도 여전히 현대 여성들의 귀감으로 미화되는 부분이 더 많은 김활란의 행적들을 조목조목 들려준다.

"학교의 상징적인 인물인 만큼 학교 스스로 철거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동문들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객관적인 판단, 뼈를 깎는 결단만이 김활란 동상을 철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대생들의 김활란 동상 훼손 관련 뉴스도 생각나고, 책을 통해 알게 된 송도고등학교에 세워져 있다는 윤치호 동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궁금해 저자에게 물어보니 이 같은 답변이 돌아온다. 1995년에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의 경우 예를 들면서. 경우에 따라 관련 사실을 알리는 시설로도 쓸 수 있는 건물과 차원이 다른 동상의 상징성과 그 영향 등까지 이야기해주면서.

학교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라고 미화하고, 지키는 것이 위상을 높이는 것인가. 한 인물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모두 말해야 한다. 오점을 그대로 둔 채 공적만 이야기하는 것도 엄연한 왜곡이다. 부인하지 않은 만큼 왜곡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결론적으로 한 인간의 오점을 가리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여러 학교의 동상 관련하여 검색해보니 학교가 교육현장인 만큼 교육에 기여한 부분으로 철거할 수 없다는 학교들도 있다. 그렇다면 교육자 이전에 한나라 국민으로서의 과오인 친일 부분도 같은 비중으로 다룸이 당연하지 않은가. 김활란 동상이나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이 존재하는 한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난은 피할 수 없으리라.

목차만 훑는 것으로 책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는 책의 특징이 크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이처럼 친일파들을 한데 묶은 책들이 많이 나왔으며, 비교적 친일행적이 많이 알려진 이근택이나 윤치호, 김성수, 이광수, 노덕술과 같은 대표적인 친일파 여럿을 책 또한 다뤘기 때문이다.

이 책까지, 최근 1년 저자의 책 세 권을 읽었다. 저자의 책들을 읽으며 느꼈던 것들은 알려진 사실이나 기록에만 의지하지 않고 취재를 더해 들려준다는 것. 김활란의 5·16 군사반란 정당성 홍보 사실처럼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이 저자는 이야기한다는 것. 명확하고 쉬우며 객관적인 평가가 돋보이는 내용이라는 것. 아마도 책을 이미 읽은 사람들은 공감하리라.

국내 언론 사상 처음으로 일간지에 친일파를 연재한 것을 묶어 1999년에 출간한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개정판이다. 5명을 더했으며, 재판이나 복권, 서훈 취소 등 변동사항이 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관련 부분을 개정해 출간했다고 한다. 왜 다시 개정판을 내는가. 저자의 개정판 취지 그 일부를 덧붙이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길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그럭저럭 30년 가까이 친일문제에 천착해왔으나 답답하기는 지금도 매한가지다.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친일파들의 행적 조사는 상당한 성과를 냈다고 판단된다. 문제는 연구 차원이 아니라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들의 반역사적 행태와 역사 왜곡 음모다.

그 절정은 박근혜 정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이다. 이대로라면 장차 친일문제를 둘러싸고 거짓 역사, 뒤틀린 역사가 판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친일문제 하나를 반듯하게 기록하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대서야 무슨 역사 교육을 입에 올릴 것인가.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부산을 떨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냄비 끓듯 하는 언론, '친일망동 처벌법' 등 관련 법 하나 제정하지 못한 채 수수방관하는 정치권,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국민성까지, 어느 하나 미덥지 못하다. 이런 책으로 고발하고 기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머리말에서.

덧붙이는 글 |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정운현) | 인문서원 | 2016-08-16 ㅣ정가 18,000원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 이완용에서 노덕술까지, 나라를 팔아먹고 독립운동가를 때려잡은 악질 매국노 44인 이야기

정운현 지음, 인문서원(2016)


태그:#친일파(매국노), #김활란 동상, #이대 정유라, #박근혜-최순실,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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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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