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남다른 노력과 소신 없이는 나오기 힘든 귀한 책이 나왔다. <이연주 시전집>(최측의 농간 펴냄)이다.
시인 이연주(1953~1992). 시인으로 짧게 살았다. 1991년에 등단해 1992년에 삶을 마감했다. 그래서 지인 또는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기억될 시인이다. 시인은 특히 '매음녀' 연작시로 유명하다. 제일 먼저 찾아 읽었다.
한번의 잠자리 끝에/ 이렇게 살 바엔, 너는 왜 사느냐고 물었던/ 사내도 있었다./ 이렇게 살 바엔/ 왜 살아야 하는지 그녀도 모른다. - '매음녀·1' 부분.
그런데 당혹스러웠다. 특히 '매음녀·3'의 '오늘밤에도 가랑이를 열댓번 벌렸다'와 같은 부분은 더욱 그랬다. 이런 표현이 맞는가 모르겠는데, 무언가 '낭자한' 느낌이기도 했다.
몇 번의 마른기침 뒤 뱉어내는/ 된 가래에 추억들이 엉겨 붙는다./ 지독한 삶의 냄새로부터/ 쉬고 싶다.//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함박눈 내린다.-'매음녀·4' 부분.그러나 '매음녀·4'란 시는 제목을 빼고 보면, 독자들은 우리 누군가, 가진 것 없는 누군가의 삶의 비애를 이야기하는 시로도 받아들이지 않을까. 이런 부분들 때문일 것이다. 매음녀 연작시들을 다시 읽자 당혹스러운 첫 느낌과 달리, 거대한 자본과 욕망에 희생된 우리 누군가의 이야기로 와 닿았던 것이.
이것 봐, 총과 칼로써 네 몸을 무장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문제는 맨몸으로 기도문 한 구절 없이 버티는 용기와 저항의 힘이란다. 기도문이란 다만 죽은 자들을 위한 문장일 뿐이니까(…) 제발 잊지 말아, 저 전깃불이 얼마나 큰 어둠을 감추고 있는지…. - '신생아실 노트' 부분.이 시는 특히 더 강한 인상으로 와 닿았다. 25년 전 시인의 말하고 싶었던 것들과 달라진 것 없는, 2016년에도 여전한 우리에게 드리운 참담한 어둠 때문이리라.
시집 발표 당시 문단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 조금이나마 이해됐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의 노출 범위까지 규제하던 1990년대 초 누구든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매음녀를 소재로 쓴 시라 가십거리 쪽으로 더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것 아닐까?란 추측도 무너졌다. 출판사 측이 밝힌 이연주 시인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한국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인입니다. 시에 관심을 두다보면 당연히 만나게 되는 시인인데, 일반인들은 잘 모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일반인들이 공감할 그런 시들이 많아요. 매음녀란 시로 특히 유명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시들이 조명 받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우리 사회 억눌리고,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이야기한 시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이를테면 '신생아실 노트'란 시에 '제발 잊지 말아, 저 전깃불이 얼마나 큰 어둠을 감추고 있는지'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깃불 대신에 '자본'이나 '권력'과 같은 것들을 넣어 음미하면 시인이 말하는 어둠이 무엇이며, 시인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이해가 쉽죠."(최측의 농간) 내가 이연주 시들을 만난 느낌은 뭐랄까. '내 안에서 뭔가가, 쉽게 그리고 간단하게 표현 못할 비정하며 불편한 뭔가가 몇 차례 뭉턱뭉턱 떨어지는 슬픔과 충격'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으려나.
유족이 디자인한 <이연주 시전집>
출판사 측에 복간 이유를 물었더니 "처음엔 남성으로서 여성의 심리 그런 것들을 좀 알고 싶기도 해서 관심 가졌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그로 인한 어둠에 관한 너무 강한 시들이어서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원형에 가깝게 복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시집을 낸 출판사 최측의 농간은 나오기 힘든 책들을 주로 복간한다. 이렇다보니 단 한 권의 책을 내기까지 많은 발품과 수많은 수소문을 필요로 한다. 그 과정에서 특별한 사연도 생겨나고, 숨어있던 사연들이나 미발표 작품들이 발굴되기도 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 다른 책보다 좀 더 특별한 사연으로 복간됐다고 한다.
"남동생 이용주씨(북 디자이너)에 의하면 시인이 고전음악에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작품들을 음악적인 형식과 구성을 차용하여 교열, 배치하고자 고심이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복간 과정에서 발굴해 수록한 시극 '끝없는 날의 사벽'이 가장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시인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등단 직후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세계사)을 출간해 문학계의 주목과 기대를 받았던 시인은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그래서 화제의 시인인데도 그간 재출판이 힘들었다고 한다. 유족을 찾을 수 없어 출판연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인 스스로 작정하고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운 후 자살했다. 그래서 유족 찾기가 더 힘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실오라기 같은 연결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파고, 또 파고들다가 고인이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풀빛 동인들과 연결됐고, 유족까지 연결 되었단다.
책에는 시인 생전에 낸 시집의 시들과 유고집(<속죄양, 유다>(1993.세계사)의 시들이 초판 그대로 실려 있다. 그리고 등단 이전 동인지에 발표되었으나 시인 스스로 첫 시집에 수록하지 않아 사실상 미발표작에 가까운 24편의 시와 시극 1(끝없는 날의 사벽)편이 실려 있다.
"검정색 표지부터 속표지까지, 그리고 페이지 시 제목 배치 등 책 전반을 유족인 남동생 이용주씨가 디자인했습니다. 시인의 시 가장 큰 특징인 어둠과 어둠 속으로 너무나 빨리 사라진 시인의 삶에 맞춰 표지색도, 글씨 배치로 인한 여백도 의도적으로 이렇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전집 제목 글씨색이나 글씨크기, 생몰년도, 출판사 이름 넣는 공간배치도 모두 유족의 뜻이구요. 속지와 시 제목 배치도 모두 유족의 뜻에 따랐습니다."파독간호사였으며, 귀국 후 의정부 기지촌 인근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일했던 시인 이연주에 대한 동생의 말이나 풀밭 동인들의 시인에 대한 추억, 시평 등도 들어갈 법하건만 수록하지 않았다.
고인 스스로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려 그 흔한 사진도 없는 터, 지인들이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는 사진 몇 장이나, 두 권의 시집 초판본 표지 사진이라도 들어가면 더욱 좋았을 것을. 어렵게 복간된 과정이나 유족의 책 복간 참여 사연의 편집노트, 뒷표지 속에 흔히 들어가는 근간이나 목록을 넣으면 좋았을 것 같지만, 역시 모두 생략됐다.
"유족에 의하면 시집을 발표한 이후 "시인이 매음녀라더라", "사생활이 지저분하고 복잡하다더라"와 같은, 사실과 다르고 근거 없는 수많은 몹쓸 소문들로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이란 시집 제목을 그리 유쾌하지 않게 받아들였다고요. 이런 이유도 있고, 시인의 시를 오로지 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과 복간 과정에 발굴된 작품까지 모든 작품을 수록한 의미를 담아 <이연주 시전집>이란 제목으로 출간했습니다."까만 뒷표지에도 바코드만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앞서 말한 이유로 유족과 합의한 것이라고 한다. 고인과 유족에 대한 당연한 예의로 말이다. 두루두루 남다른 <이연주 시전집>이다.
덧붙이는 글 | <이연주 시전집>(이연주) | 최측의농간 | 2016-11-02 ㅣ정가 13,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