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 소추되었다. 박 대통령이 탄핵 소추 되던 날, 나는 많은 상념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먼저 떠 오른 생각은 지난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로 국회의원에 첫 당선된 박 대통령의 일성이었다. 그는 자신이 정치를 시작한 이유에 대해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고 했다. 독재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그가 말하는 '아버지의 명예 회복'은 무엇일까?
박근혜 대통령은 1979년 10. 26 사태로 청와대를 나온 이후 내내 아버지 시대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토로하곤 했다. 특히 아버지 시대에는 '유신만이 살 길'이라던 자들이, 아버지 사후 '바로 유신이 문제'라며 배신하는 행위를 보며 극단적인 분노감을 표시하곤 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정치인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버지 사후 '아버지를 부정하고 배신했던 자들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한 듯하다. 이를 통해 그들이 부정했던 아버지의 선택, 바로 '유신은 그 시대 불가피한 아버지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박근혜가 염원했던 모든 희망은 오늘 이 순간 현재, 적어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부서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부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박근혜 대통령, 그 스스로가 부른 파멸이라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 국민적 비난 대상이 되고 말았다. 실패한 정치인으로 헤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 비난은 자신의 정치적 자산이었던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까지도 비난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적어도 이 파멸의 늪에서 그들이 빠져 나오는 데에는 헤아릴 길 없는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치를 시작했다는 그 딸의 정치적 실패로 그나마 일부 국민들에게 향수로 남았던 아버지의 긍정적 업적마저 파멸시켰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기에 의미있는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왔다. 바로 독재자 박정희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난 또 다른 인물, 허형식 장군에 대한 실록 소설이다. 지은이 박도는 이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무려 16년의 공을 들였다고 한다.
만주 제일의 파르티잔 영웅, 허형식 장군
이 책의 주인공, '허형식 장군'은 지은이 박도가 태어난 경북 구미 출신의 영웅이었다. 이른바 '만주 제일의 파르티잔'으로 알려진 인물, 허형식 장군. '파르티잔'이라는 단어가 낯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파르티잔(partisan)'은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의 후방 등에서 통신, 교통 시설을 파괴하거나 무기나 물자를 탈취하는 비정규군'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쉽게 말해서 게릴라군이다.
허형식 장군은 1909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찻길 하나를 사이에 둔 구미면 상모동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1917년생, 그러니까 허형식 장군이 태어나고 8년 후 박정희가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지근거리에서 태어난 이들이 살아간 삶의 궤적은 크게 달랐다. 일본 왕에게 혈서로 친일을 맹세하며 만주군 장교가 된 박정희와 달리 허형식 장군은 투철한 항일 전사의 길을 걸어갔다. 1930년 5월 1일 중국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습격 사건으로 심양 감옥에 갇힌 이래 항일 군인의 길을 걸었다.
또한 대부분의 친일 군인이 그렇듯 박정희 역시 해방된 조국에서 대한민국 국군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그후 4.19 민주혁명을 총칼로 엎어버리면서 18년 군사 독재자로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하지만 허형식 장군은 자신의 신념과 지조를 버리지 않았다. 일본 군대와 맞서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 참모장으로서 끝까지 항일의 길을 걸어갔다.
이렇게 극명하게 다른 삶을 걸어간 두 사람의 최후 역시 극과 극이었다. 1917년 태어나 1979년에 생을 마친 박정희의 최후는 그저 비참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허형식 장군의 최후는 비장했고, 비극적으로 아름다웠다. 1909년 태어난 허형식 장군이 그렇게 최후를 맞이한 해는 1942년.
그해 8월 3일, 중국 북만주 경안현 청봉령 소릉하 계곡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하기 위한 만주군 토벌대의 습격이었다. 이때 허형식 장군은 자신의 최후를 인식하고 두 명의 부하를 살리고자 자신을 토벌대의 먹잇감으로 내놓았다.
결국 부하 1명이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100여 명의 비밀 조직원 명단을 적의 손에 넘기지 않을 수 있었다. 박정희는 혼자 살기 위해 자신과 함께한 동지들의 명단을 고해바쳤으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은 또 달랐던 것이다. 그의 나이 33세, 젊디 젊은 그의 최후는 진정한 장군의 모습이었다.
허형식 장군의 33년 인생, 잊지 말아야
사실 허형식 장군의 이름을 오늘에 와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시인 이육사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시 '광야'로 유명한 이육사는 바로 허형식 장군과 외척 지간이었다. 그래서 허형식 장군을 기억하는 이들은 시 '광야'에서 이육사가 말하는 이 대목을 주목했다.
'다시 천고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시인 이육사가 말하고 있는 '이 백마 타고 오는 초인'처럼 생전 허형식 장군은 늘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키가 컸으며 잘 생긴 외모. 그렇기에 1930년대 만주에서 허형식 장군과 시인 이육사가 만난 사실이 있는데 이때 백마를 타고 나타난 모습을 이육사가 시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허형식 장군의 일가중 눈에 띄는 분이 또 있다. 구한말 의병장 출신으로서 일제가 만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 1호로 사형장 이슬이 된 왕산 허위 선생님. 이 분의 종조카가 바로 허형식 장군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제1호로 추서될 정도로 항일 운동에 앞장섰던 허위 선생님으로 인해 일제의 핍박이 극심해지자 허씨 일가들이 전부 만주로 망명하게 된다. 이것이 훗날 항일 군인으로서 허형식 장군이 걸어가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된다. 이 책,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은 바로 이처럼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또 다른 영웅에 대한 기록이다.
한편 만주군 토벌대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허형식 장군은 너무도 참담했다. 부대원을 대피시킨 후 혼자 교전하던 그를 사살한 토벌대는 이후 그의 목만 잘라 하산했다. 그리고 다음날, 동북항일연군이 총참모장의 시신만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다시 산을 찾았을 때 확인할 수 있었던 그의 흔적은 오른쪽 다리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밤새 산짐승이 시신을 훼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그의 육신일 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허형식, 그의 이름이다. 친일파 박정희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는 그대에게 권하고 싶은 그의 이름, '다시 천고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장군의 실록 소설을 권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 (박도 지음 / 눈빛 펴냄 / 2016. 11. /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