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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선생 국가표준영정으로, 권오창 화백이 그렸다. (청주충렬사 내 천곡기념관 전시사진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비율, 색조 등에서 원품과는 여러 모로 차이가 있습니다.)
 송상현 선생 국가표준영정으로, 권오창 화백이 그렸다. (청주충렬사 내 천곡기념관 전시사진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비율, 색조 등에서 원품과는 여러 모로 차이가 있습니다.)
ⓒ 천곡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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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일본군은 그 이튿날인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한다. 그 후 일본군은 동래읍성 공격에 앞서 취병장(현 동래경찰서)에 군사들을 집결시킨 다음, 군졸 백여 명을 보내어 '戰則戰矣 不戰則假道(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라는 글을 쓴 나무 팻말을 읍성 남문 밖에 세워두고 돌아간다.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은 '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이라고 쓴 목패를 적들에게 던져 결사항전을 표명한다.

4월 15일 왜군이 동래읍성을 포위하면서 전투가 시작된다. 그러나 조총 등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 정규군 1만 8700명은 애당초 돌멩이, 기왓장 등을 들고 대항한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합해도 3000여 명에 불과한 동래읍성 사람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갑옷 위에 조복(관원이 조정에 갈 때 입는 예복)을 받쳐 입은 채 절명하는 그 순간까지 처절하게 싸운 동래부사 송상현 등 거의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때 일본군들은 송상현의 뜨거운 충절에 감동, 동문 밖에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전해진다.

"충성이 중하니 효도는 포기하겠습니다"

1592년 4월 14일자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발발 첫날의 기사를 '왜구가 침범해 왔다'로 시작한다. 실록은 이어 일본 적추(적의 두목) 풍신수길이 중국의 조공 불허에 대해 앙심을 품고 "요동을 침범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 하고 청했는데, 우리나라가 준엄하게 거절하자 온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침입해왔다고 덧붙인다.

4월 15일 동래읍성 전투에 관한 <선조실록>의 기사는 간단하다. '(전쟁 시작) 이튿날 동래부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이 죽었으며, 그의 첩도 죽었다'가 전문이다. 적들이 동래읍성으로 몰려 왔을 당시, 지금의 경상북도 동쪽 일원과 울산, 부산 전역의 군대를 지휘하던 경상좌병사(좌병영 울산) 이각도 처음에는 성 안에 있었다. 그러나 적의 기세가 엄청난 것을 눈으로 확인한 이각은 아예 적과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이각은 북문을 열고 달아나 버렸다. 심지어 이각은 미리 첩에게 금은보화를 챙겨 먼저 도주시키기까지 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를 그린 <동래부 순절도>는 1658년(효종 9)에 그려졌다. 이 그림은 송상현 종가가 소장한 것으로, 청추 충렬사 천곡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참고) 같은 이름의 그림이 한 종류 더 있는데, 1658년 그림을 바탕으로 그려진 1709년 작품이다. 이는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를 그린 <동래부 순절도>는 1658년(효종 9)에 그려졌다. 이 그림은 송상현 종가가 소장한 것으로, 청추 충렬사 천곡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참고) 같은 이름의 그림이 한 종류 더 있는데, 1658년 그림을 바탕으로 그려진 1709년 작품이다. 이는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천곡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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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동래읍성의 장졸들과 백성들은 용감히 적에 맞섰다. 그들은 이미 부사가 '戰死易 假道難'이라 쓴 목패를 적진에 던져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겠노라는 의지를 밝힐 때 그 앞에서 함께 결사항전의 맹세를 한 사람들이었다. 피아간에 탄환과 화살이 서로 쏟아지면서 산이 무너지는 듯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가 개시되고 두 시간 가량 지나자, 마침내 적들이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송상현은 편안한 낯빛으로 누각에 올랐다. 그는 북쪽으로 엎드려 대궐을 향해 큰 절을 두 번 올린 후, 두 손을 모아 단정하게 앉았다. 그리고는 부채를 펼쳐 거기에 편지를 썼다. 아버지께 올리는 글월이었다.

孤城月暈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됐지만
列鎭高枕 이웃 진들의 지원 기척은 없습니다
君臣義重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니
父子恩輕 아버지의 은혜는 가벼이 하오리다

예로부터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고 했다. 비록 왜적과 싸우다가 죽는 것이지만, 그래도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불효는 불효였다. 변명이 필요했다. 송상현은 아버지에게 '신하된 자로서 나라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니 아버지의 은혜는 본의 아니게 가벼이 여기고 저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용서를 빌었다. 물론 용인·평강·송화 현감,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한 아버지 송복흥(宋復興, 1527-1594) 또한 관직에 있었던 선비였으므로, 자식의 죽음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부채 위에 쓴 아들의 혈서를 이해 못할 리는 없었다.

부채에 글을 다 쓴 송상현이 주위를 둘러보며 "혹시 오늘 이곳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사람이 있거든 이 부채를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께 전해 다오. 그리고 내 주검을 거두어 묻어주기 바라노라. 나는 배꼽 아래에 검은 점이 있으니 목이 없더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최후의 유언을 말했다.

"내 목이 없어지더라도 시체는 찾을 수 있을 것"

둘러서 있던 장졸들과 노비들이 눈물을 쏟으며 공 앞에 엎드렸다. 그때 적장 평조익(平調益)이 저쪽에서 피신하라는 신호를 송상현에게 보내왔다. 평조익은 일본 사신단의 일원으로 자주 동래부에 드나들었던 자로, 마음으로 송상현을 존경해 왔었다. 그래서 성 안으로 들어온 즉시 그는 송상현에게 달려와 몸을 피하라는 권유로 눈짓, 손짓, 발짓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송상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평조익은 다른 일본군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송상현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성 아래 빈터로 데려 가려 했다. 송상현은 평조익의 팔을 뿌리쳤다. 마침내, 적군의 날카로운 칼이 공의 머리를 쳤다. 불과 42세, 그는 목이 잘리고, 가슴에 칼이 박히고, 다리에 창날이 찍힌 채 세상을 떠나갔다. 곁에 머물러 있다가 사로잡힌 공의 첩 금섬(金蟾)은 사흘 동안 내내 적들을 통렬히 꾸짖던 끝에 결국 살해되었다.

충렬사 천곡기념관에 들어서면 입구 정면에 걸려 있는 동래성 전투도를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부산 충렬사에도 전시되어 있는 기록화이다.
 충렬사 천곡기념관에 들어서면 입구 정면에 걸려 있는 동래성 전투도를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부산 충렬사에도 전시되어 있는 기록화이다.
ⓒ 천곡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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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군수 조영규, 비장 송봉수와 김희수, 향리 송백, 백성 김상 등 무수한 사람들이 이날 적과 싸우다 죽었다. 이촌녀(二村女, 두 사람의 시골 여인)도 김상을 도와 지붕 위 기왓장을 떼어 아군에 전해주다가 마침내 적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겸인 신여로는 노모를 모시고 산다는 이유로 송상현이 성 밖으로 피신하라 했지만 공이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 왜적에 대항하다가 순절했다.  

동래교수 노개방도 향교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전사했다. 왜적이 쳐들어온 날 어머니를 뵈러 밀양에 가 있었던 그는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급히 향교로 돌아와 제자 문덕겸과 양조한 등과 더불어 적에 맞서다가 모두 죽었다.

3천여 동래 사람들, 2만에 육박하는 일본군에게 죽임 당해

전투의 시작과 끝을 모두 지켜본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등 적장들은 조선인들의 끝없는 충절 앞에서 탄식을 거듭했다. 소서행장은 송상현 부사에게 칼질을 한 군사를 끌어내어 참수했다. 뒷날(1595년) 송상현의 시신이 청주로 옮겨갈 때에도 부산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들은 적극 협조하였다.

송상현을 모시는 청주 충렬사의 천곡기념관 안에는 일본군들의 이같은 태도에 대해 '세계 전사(戰史)에 유례가 없는 일'로 평가한 게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부산시가 발행한 <충렬사>에도 '이런 일은 전사상(戰史上, 전쟁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충렬사 신사당 안의 모습.
 충렬사 신사당 안의 모습.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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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송상현 선생은 나라 곳곳의 서원과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청주와 부산의 충렬사 외에도 개성의 숭절사, 청주의 신항서원, 고부의 정충사, 청원의 충렬묘 등이 그를 정기적으로 제향하는 곳이다. 서원도 사당도 아니지만 부산 동래시장길 27의 송공단(宋公壇, 부산시 기념물 11호)도 성격은 마찬가지이다. 송공단은 1608년 이래 동래읍성 전투 전사 선열들을 기려 온 제단이다.

송공단의 본래 이름은 전망제단(戰亡祭壇)이었는데, 처음에는 지금 자리가 아니라 동래읍성 남문 밖에 있었다. 그 후 1742년 들어 낡은 전망제단을 새로 키워서 송상현 순절 장소인 정원루(靖遠樓) 터에 재건했다. 물론 이곳에는 송상현만이 아니라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 비장 김희수, 비장 송봉수, 양조한, 문덕겸, 송백, 김상, 신여로 등 동래읍성 전투에서 전사한 선열들을 기리는 비석들이 모두 세워져 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분들을 함께 모시는 비석도 건립되어 있다.

여산송씨정려각 경내에 있는 현대판 송상현 선생 신도비이다. 한문 전용인 탓에 가독성이 떨어지는 점을 감안, 한글과 한자를 섞어 써서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신도비 복제품을 이곳에 세워두었다.
 여산송씨정려각 경내에 있는 현대판 송상현 선생 신도비이다. 한문 전용인 탓에 가독성이 떨어지는 점을 감안, 한글과 한자를 섞어 써서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신도비 복제품을 이곳에 세워두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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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송공단 경내에는 별도의 담장을 치고 그 안에 금섬을 기리는 비석 '金蟾殉亂碑(금섬순란비)'와, 2기의 '義女位(의녀위)'도 세워놓았다. 의녀위는 지붕 위에서 기왓장을 떼어 김상에게 전해주다가 결국 왜적들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은 두 여성을 기려 세워진 비석이다. 남성들의 경우처럼,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부녀자들을 섬겨 세워진 비석이 별도로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가 하면, 송공단 경내에는 관청 노비 철수와 매동을 기리는 '故官奴鐵壽邁同効忠碑(고관노철수매동효충비)'도 있다. 이 두 관노는 송상현의 주검을 수습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후 공의 시신을 찾아내는 정성을 보였다.

'청주 충렬사- 충청북도 기념물 16호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렬공 송상현(1551-1592)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사당은 1610년(광해군 2)에 지어 제향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다가, 1980년에 크게 중수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송상현의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충렬공은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친 후, 1591년(선조 24)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4월 13일 왜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14일에 동래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동래부사였던 충렬공은 왜군이 항복을 권했으나, 끝까지 항전하다가 15일 순절하였다. 왜장도 그의 충절에 탄복하여 동문 밖에 장사를 지내주었다. 국가의 위난을 죽음으로 지켜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하였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상로18번길 44에 있는 '청주 충렬사'는 송상현을 기리는 대표 유적지라 할 만하다. 충청북도 기념물 16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에는, 위의 현지 안내판이 해설해주는 바와 같이, 420년 이상의 역사가 서려 있다. 동래읍성에서 전사한 송상현의 묘소가 이곳으로 옮겨온 때는 1596년(선조 29), 사당이 건립된 것은 1610년(광해군 2)의 일이다.

충렬사 입구 도로변에 있는 '청주 여산송씨 정려각'(충청북도 기념물 151호) 중 중심 비각으로 좌우에 가문이 낳은 두 열녀, 효부를 기리는 비각을 각각 거느리고 있다. 충렬사는 이 여산송씨정려각 뒤편 마을 안에 있다.
 충렬사 입구 도로변에 있는 '청주 여산송씨 정려각'(충청북도 기념물 151호) 중 중심 비각으로 좌우에 가문이 낳은 두 열녀, 효부를 기리는 비각을 각각 거느리고 있다. 충렬사는 이 여산송씨정려각 뒤편 마을 안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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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는, 경내로 진입하는 도로변부터가 심상하지 않다. 좌우에 작은 비각을 각각 하나씩 거느린 세 칸짜리 정려가 버티고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충청북도 기념물 151호인 이곳의 공식 이름은 '청주 여산송씨 정려각'으로, 송상현 집안이 낳은 충신, 열녀, 효부들의 정려를 한곳에 모아놓은 문화재이다.

정려각 앞 안내판에는 '충렬각은 묘소 이장 후 세운 것으로 보이며, 1594년(선조 27) 12월에 처음 명정(銘旌, 정려에 이름과 관직 등을 새김)되었고, 1704년(숙종 30)에 한금섬과 이양녀의 열녀문을 합쳐 다시 세운 것이다. 또한 후손 송현기(宋鉉器, 1684-1750)의 처 밀양박씨의 효열각, 송명휘(宋明輝, 1737-1793)의 처 연일정씨의 효부각이 있다. 이러한 일문삼려(一門三閭, 한 집에 정려 셋이 내려진 예)의 형식은 흔치 않은 사례이다'라는 해설이 쓰여 있다.

동래성에서 전사하는 금성의 성은 한씨

해설을 통해 동래성 전투 때 끝까지 왜군에 저항하다가 숨진 금섬이 한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양녀는 누구인가? 안내판에 밝혀져 있지 않아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충렬사에 가면 해답이 있을 것이다. 그런 기대를 품고 150m 남짓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청주 충렬사의 구사당. 1610년(광해군 2)에 처음 지어졌고, 그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1980년에 신사당이 크게 건립된 이후 일반 참배객들은 신사당을 찾고, 이 사당은 송씨문중이 매년 제사를 지내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물론 구사당 안에도 송상현 공의 영정이 있다.
 청주 충렬사의 구사당. 1610년(광해군 2)에 처음 지어졌고, 그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1980년에 신사당이 크게 건립된 이후 일반 참배객들은 신사당을 찾고, 이 사당은 송씨문중이 매년 제사를 지내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물론 구사당 안에도 송상현 공의 영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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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나는 곳에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왼쪽으로 강촌노인복지회관, 오른쪽으로 충렬사 관리사무소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관리사무소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구(舊)사당에 간다. 구사당이 있다는 것은 신(新)사당도 있다는 말이다. 구사당은 1610년에 처음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된 건물이고, 신사당은 1980년에 지어졌다.

그런데 관리사무소과 홍살문 사이에는 절대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이 있으므로, 천천히 걸어야 한다. 충청북도 산림환경연구소가 임진왜란 420주년(7주갑)을 맞아 이곳에 기념 식수한 정2품송 2세목이 바로 그것이다. 정2품송은 천연기념물 103호인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상판리의 소나무를 말한다. 참으로 심을 만한 곳에 식부(植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식부라는 낯선 용어는 나무 아래 표지석에 새겨져 있는 '식부일 2012년(임진년) 5월 19일'에서 본 어휘이다.

뒤로 천곡기념관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정2품송(천연기념물 103호) 2세목의 모습. 충렬사 관리사무소에서 구사당으로 가는 중간쯤에 심어진 이 소나무는 충청북도 산림환경연구소가 2012년 5월 19일 이곳에 식부했다. 사진 속의 인물은 청주시 문화관광과 하동만 문화관광해설사로, 청주 충렬사를 찾아온 나그네를 위해 아주 성심껏 안내를 해주신다.
 뒤로 천곡기념관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정2품송(천연기념물 103호) 2세목의 모습. 충렬사 관리사무소에서 구사당으로 가는 중간쯤에 심어진 이 소나무는 충청북도 산림환경연구소가 2012년 5월 19일 이곳에 식부했다. 사진 속의 인물은 청주시 문화관광과 하동만 문화관광해설사로, 청주 충렬사를 찾아온 나그네를 위해 아주 성심껏 안내를 해주신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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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을 지나면 약간의 오르막길 위에 구사당이 서 있다. 구사당 안에는 지금도 송상현 공의 영정이 있고, 매년 그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다만 건물이 소규모인 탓에 영정도 신사당의 것보다 크기가 작다.

구사당 왼쪽 뒤로 신사당이 보인다. 구사당에서 신사당으로 가는 도중에도 빠뜨리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이 있다. '戰死易 假道難'에 버금갈 만큼 유명한 송상현 공의 또 다른 명언이 새겨져 있는 조각 작품이다. 그래도 이것은 정2품송 표지석에 견줘 크기가 훨씬 두드러지기 때문에 놓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군신의중 부자은경"이니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탑으로 느껴지는 조각 작품에는 '君臣義重(군신의중) 父子恩輕(부자은경)' 여덟 글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조각 앞의 표지석은 이 여덟 한자의 뜻이 "군신의 의가 중하니 부모의 은혜는 오히려 가볍다"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큰따옴표가 붙어 있는 것은 송상현 공의 "말"이기 때문이다. 송상현 공이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 부채 위에 혈서로 써서 아버지에게 보낸 글을 간명하게 풀이한 표지석의 해설을 읽어본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해도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큰 불효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忠)을 위해 효(孝)는 가볍다"라고 한 것은 부모에 대한 효의 정신도 중요하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의 정신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충(忠)을 기반으로 한 송공의 죽음은 불효(不孝)가 아니라 '참된 효'라는 사실까지 일깨워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충렬공 송상현 선생의 의로운 죽음은 진정한 의미의 충(忠)이자 효(孝)이다.

청주시는 선생의 충절과 효를 기리기 위해 그 묘소가 있는 이곳 강서 수의동 일원에 '충렬 공원'을 조성하였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선생의 맑고 곧은 정기가 '충렬의 고장 청주'를 지켜줄 것을 바라며, 송상현 공의 충과 효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만들어 여기에 세운다. 2001.5. 청주시장'

충렬사 신사당. 1980년에 지어졌다. 일반 답사자는 구사당 왼편 뒤쪽 있는 이 신사당을 참배하게 된다.
 충렬사 신사당. 1980년에 지어졌다. 일반 답사자는 구사당 왼편 뒤쪽 있는 이 신사당을 참배하게 된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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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당의 송상현 공 영정 앞에는 커튼이 쳐져 있다. 사당 안으로 조심조심 들어가 커튼을 좌우로 연다. 420여 년 전 동래성에서 순절할 때처럼 조복 차림으로 앉아 계시는 송상현 선생이 밝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신다. 

향에 불을 붙이고, 묵념을 한다. 향에서 올라온 뽀얀 연기가 바람에 흩날려 사방으로 흩어진다.

청주 충렬사 사당 앞에 놓여 있는 추도 묵념 견본 2종


1 : 사당 앞에서 성인들이 단체로 묵념을 할 때 읽는 추도문 견본
("묵념")
존경하는 충렬공 송상현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동래부사의 직위에서 참으로 위대한 충성심과 효성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선생님의 영정 앞에 조용히 머리 숙여 선생님의 거룩하신 충과 효 정신을 본받고자 다짐합니다.
저희들은 진정한 애국자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참된 효를 실천하겠습니다. 나라를 바로 지켜서 가정의 행복을 꽃피우겠습니다. 먼 훗날 선생님께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선생님의 영정 앞에서 맹세합니다.
("묵념 바로")

2 : 사당 앞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묵념을 할 때 읽는 추도문 견본
("묵념")
존경하는 충렬공 송상현 선생님!
오늘 저희들은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을 본받고자 이 자리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머리를 숙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로울 때 왜적과 싸워 끝까지 굴하지 않고 고귀하게 순절하셨습니다. 특히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충과 효 정신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선생님께서 앞장서 적과 싸우신 함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저희들은 선생님의 나라사랑 정신을 본받아 조국통일을 완수하고 경제부흥과 정의사회를 구현하여 우리나라를 세계의 으뜸 국가로 만들겠습니다. 선생님의 영정 앞에서 맹세합니다.
("묵념 바로")


덧붙이는 글 | 기사가 길어 청주충렬사 천곡기념관과 송상현 신도비와 묘소(송상현, 금섬, 이양녀) 관련 내용은 별도로 게재합니다.



태그:#송상현, #충렬사, #송공단,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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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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