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가게에서만 쓸 수 있는 화폐를 만들고 수익의 일부를 모으면 가게와 공동체 모두에게 이롭지 않을까.'
국가도 시장도 더 이상 먹고사는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주지 못하는 시대, 혁신적 해법을 찾아 나선 이들이 있다. '마포 공동체경제네트워크 모아'다.
'모아'는 서울혁신파크 리빙랩 '내가 바꾸는 서울, 100일의 실험' 공모에 선정돼 지역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폐해를 뛰어넘을 지속가능한 대안 경제 모델을 실현해보려는 실험을 벌이고 있다. 리빙랩(Living Lab)은 삶의 현장 곳곳을 실험실로 삼아 사회적 난제의 새로운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다.
이들은 경제 행위의 또 다른 축인 소비자, 즉 시민에 주목한다. 시민의 소비 행위에 숨겨진 엄청난 힘 말이다. 시민이 소비 습관을 바꾸면 세상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바로 '모아'의 당찬 도전에 깔린 철학이다.
"능동적 소비운동을 시작으로 공동체 경제 모델을 구축하는 게 실험 목표다. 경제활동의 대상으로만 여겨져 온 소비자와 공동체가 주체로 나서고, 생산·유통·소비 활동에서 발생하는 잉여와 부가가치를 공동체가 공유함으로써, 지속가능한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 한다."'모아' 윤성일 상임대표의 말이다.
대안화폐와 공동체가게로 지역을 잇다
실험의 중심에는 지역대안화폐가 있다. 모아의 뜻에 공감하는 가게(공동체가게)들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는 이용권이다. 대안화폐를 구매한 소비자들에겐 5%의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대안화폐를 매개로 능동적 소비가 이뤄지면 재정난에 힘겨워하던 지역의 협동조합이나 마을기업·가게들은 수익이 늘게 되고, 이들 가게 수익의 약 2~5%가 공동체기금으로 쌓여 다시 공동체로 돌아온다.
대안화폐를 현금으로 태환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지금까지의 대안화폐 실험에 비춰 흔치 않은 실험이다. 대안화폐가 지역 안에서 활발하게 순환되도록 하려면 현금과 다름없이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모아의 생각이다. 그래서 어렵지만 태환성(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더해 모바일 결재시스템도 시범 도입했다. 대안화폐가 소비 습관을 바꿀 진짜 '대안'으로 자리 잡게 하려는 노력이다.
공동체가게들 가운데는 특별한 곳이 많다. 최근 언론에 오르내리는 '아현포차(아현동 포차마차)'도 그 중 하나다. 30년 동안 아현역 인근 이른바 '아현포차거리'에서 포장마차를 세워놓고 장사를 해온 이들 노점상들은 2014년 재개발로 들어선 아파트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한 민원 탓에 정든 터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오래 세월 구청과 지역 주민의 공감 아래 큰 문제없이 장사를 해오던 곳이 하루아침에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미관을 해치는 공간이 돼버린 것이다.
'모아' 회원들은 아현포차들에 공동체가게 참여를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포차 상인들도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모아'가 이끄는 소비운동이 돈과 개발의 논리로 단절돼가는 관계를 복원하고,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재래시장인 망원시장 안의 공동체가게들도 특별하다. 망원시장은 최근 들어 제법 인기를 끌고 있는 재래시장 중 하나다. 망원동 주민들뿐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도 제법 많이 찾는다. 이 망원시장 안 80여개의 가게 중 공동체가게가 무려 23곳이나 된다. 물건 팔고 흥정하고 거스름돈 챙겨주느라 정신없이 바쁜 상인들에게 대안화폐를 받으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상인들이 선뜻 공동체가게의 행렬에 동참한 것은 몇 년 전 대형마트 입점을 저지하는 활동 과정에서 쌓인 신뢰 덕이다.
그동안 소비자로만 바라보았던 지역사회이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겠다며 기꺼이 힘을 모아주는 모습을 보면서 연대가 무엇인지, 지역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고 상인들은 말한다. 대안화폐와 공동체가게는 이렇듯 지역사회에서 상인과 다른 구성원들을 더욱 더 단단하게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소비의 즐거움과 의미를 되찾다
"대안화폐를 이용하면서 소비의 즐거움과 의미를 되찾았다."'모아'의 운영위원이자 '괜찮아요 소비컨설팅 협동조합' 한선경 대표의 말이다.
생활은 소비의 연속이다. 24시간 소비가 이뤄진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소비는 일상이다. 이렇듯 우리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소비를 많은 이들이 별다른 고민 없이 빚까지 내가며 하고 있다. 기업이 주도하는 시장은 각종 혜택을 주면서 소비를 조장하고 이들은 단단한 카르텔로 소비자를 꼼짝 못하게 포위한다. 대안화폐는 이렇듯 익숙한 소비 행위로부터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소비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 욕구가 중심에 놓였던 소비만족도에 '관계 맺기'라는 가치를 추가하게 됐다. 또 관계를 통한 소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더 질 좋은 소비, 효율만을 생각했던 소비에서 벗어나 더 넓은 만족기준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도 갖게 됐다."선불로 지급하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소비규모도 가늠해가며 적정소비를 해나갈 수 있게 된 것도 큰 변화로 꼽았다. 여기에 더해 "소비의 이익이 신용카드 회사와 대기업으로 흘러가지 않고 공동체가게와 지역 공동체로 다시 돌아온다는 점도 엄청난 변화"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물론 이런 변화의 과정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신용카드 후불결재 습관을 바꾸는 일이자 그에 따른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이다. 하지만 변화가 가져다주는 만족감을 맛본 사람들은 다시 대안화폐를 구매해 쓰게 된다는 것. 이렇게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나타나는 변화들이 이번 실험의 정당성과 가능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누군가 대안화폐를 왜 이용하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나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모아'는 계속 노력해나갈 생각이다.
관계의 가능성에 거는 기대
모아는 '공동체경제'의 구상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팟캐스트도 제작했다. 11월 17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모두 일곱 차례 방송을 했는데, 2회차인 '공동체경제 전격해부, 공동체경제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에는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홍기빈 소장이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모아'라는 이름을 지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자본이라는 것의 요체는 관계다. 대안화폐를 주고받고 관계가 형성되면 뭐라도 해보자는 의기가 생겨나고, 지금껏 사용해보지 못한 자원을 한 번 사용해볼 수 있게 된다. '관계'가 곧 자본인 셈이다. 이제부터 우리 앞에 펼쳐질 세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열린 마음으로,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없던 가능성에 도전하길 빈다."대안화폐를 쓰는 공동체가게들은 이 새로운 경제 모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매출과 수익 증대에 대한 기대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보다는 무한경쟁 시장에서 나를 지켜줄 든든한 '경제 연대'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윤성일 대표도 공동체가게들 사이의 협력과 연대를 이어가기 위해 애쓴다. 행여나 있을지 모를 '둥지내몰림(젠트리피케이션)'을 비롯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돼주길 바란다. 공동체가게끼리의 이러한 협력과 연대는 대안화폐가 가져온 또 하나의 결실이다. 스마트폰에서 mapo.network(마포.네트워크)를 누르면 어떤 공동체가게가 어디에 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마포의 새로운 '대안 소비지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 목표는 '공동체 은행'을 세우는 것경쟁과 탐욕의 시대에 맞서 단단한 공동체로 든든한 대안 경제를 만들어보려던 '모아'의 실험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를 만들어 냈을까.
대안화폐 사용자 300명에 총 사용액은 4100여 만 원, 그 사이 쌓인 공동체기금도 100만 원을 넘어섰다. 공동체가게를 100개로 늘리겠다는 목표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최근 망원시장 상인모임에서 시장 전체가 공동체가게로 가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좋은 소식도 들린다. 망원시장 전체가 거대한 공동체가게가 되는 셈이니 이렇게만 되면 대안화폐 사용자도 크게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대안화폐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능동적 소비로 지역경제의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번 실험의 1단계 목표라면, 다음 단계는 이렇게 형성된 관계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잉여자금운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잉여자금운동'은 말 그대로 남은 자금을 어떤 방식으로 모아두고, 또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새로운 대안을 찾는 운동이다. 지금까지는 잉여자금을 각자가 시중은행에 모았다면, 이제부터는 공동체를 위해 쓸 수 있게 하자는 것이 '모아'의 생각이다.
'모아'는 지난 1년 동안 기금실행분과를 두고 이를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해왔다. 이번 실험으로 어느 정도의 유동성자금이 생기면서 조금 더 속도를 내기로 했다. 2016년 12월 300명의 약정자 모집을 시작으로 공동체은행을 향한 '모아'의 새로운 도전이 막을 올리게 된다. 공동체은행이 만들어지면 신용카드 대출을 탕감해주는 일도 해볼 계획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이 좌표를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대통령이 바뀌면 대한민국도 다시 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 요즘,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든든한 공동체를 향해 '작은 이정표' 하나 세워가고 있는 '모아'의 도전이 더더욱 값지게 다가온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울혁신파크 블로그 http://s_innopark.blog.me/ 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