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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지난 22일 박범계 의원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 '우병우·안봉근이 육군참모총장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알자회 멤버들을 장성 진급시킨 것 아니냐'고 질의했다.
  • 알자회는 1976년 결성됐다. 이후 2000년대까지 언론에 오르락내리락하다가 2016년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박범계 의원의 질의가 사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병우·안봉근의 입김이 있었다면 박근혜 대통령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 비판적으로 바라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두환·노태우의 하나회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박근혜 정부 아래서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지난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위 제5차 청문회'에서 김성태 위원장이 두드리는 의사봉 뒤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보이고 있다.
지난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위 제5차 청문회'에서 김성태 위원장이 두드리는 의사봉 뒤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보이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22일 최순실 국정조사 제5차 청문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증인으로 출석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에게 군부 사조직인 알자회에 관해 꽤 구체적인 질의를 던졌다.

질의에 따르면, 우병우와 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은 추명호 국정원 6국장(육사 41기, 1981년 입학) 및 조현천 기무사령관(육사 38기, 78년 입학)을 통해 육군참모총장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알자회 멤버들을 장군으로 진급시켰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인사 조치도 있었다고 한다. 알자회 멤버인 권아무개 대령이 뇌종양 때문에 전역을 해야 하는데도, 신체검사를 거쳐 장성 진급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우병우·안봉근의 이 같은 인사개입을 통해 알자회가 부활하고 육군 내에서 힘을 얻고 있다는 게 질의 내용이었다. 물론 이날 우 전 수석은 해당 질의에 대해 "(알자회는) 이런저런 보고서를 보다가 알게 됐다"며 "(알자회로) 거론된 군인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다"고 답변했다.

하나회와 알자회

 장교 시절의 전두환.
장교 시절의 전두환.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전두환이 이끄는 육군 사조직인 하나회가 한창 영향력을 행사하던 1976년 말이었다. 이때 알자회라는 작은 모임이 육군사관학교 내에서 결성됐다. 1974년에 입학한 육사 34기 12명이 이 모임의 주역이었다.

1992년 11월 14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당시 육사 3학년인 이들은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라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도우며 살자"라고 서약했다. 이것을 계기로 알자회가 결성됐다. '서로 알고 지내자'는 의미에서 이 명칭이 나왔다고 한다.

2005년 2월호 <신동아>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문서를 근거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알자회는 1978년부터 본격적인 회원 모집에 들어갔다. 최초 멤버들이 임관을 앞둔 상태였다. 이때 이들은 바로 아래 기수인 35기 후배들에게 가입을 권유했다.

바로 위의 기수가 바로 아래 후배에게 가입을 권유하는 이 같은 방법은 이후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육사 34기에서 43기까지(1983년 입학)의 일부가 알자회 회원이 됐다. 1992년 11월 17일 치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1992년 당시의 회원은 150명 이상이었고, <신동아>에 따르면, 2005년 당시에는 120명 정도였다.

군에서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사조직 '알자회'

알자회 회원들은 휴가 때 회원들의 집을 방문하거나 경조사 때 만나는 방법 등으로 결속력을 키웠다. 그리고 하나회처럼 선배가 후배의 진급이나 승진을 돕는 일도 있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였는지, 1992년 하반기에는 이들 중 일부가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과 수도방위사령부, 청와대 경호실에 포진하는 성과를 낳았다. 이렇게 되자 '알자회가 아니라 알짜회'라는 말도 나왔다고 한다.

알자회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결성된 지 12년이 지난 1986년이다. 최초 멤버들이 서른 초반의 청년 장교였을 때다. 이때, 육사 4학년인 알자회 회원이 3학년 생도를 가입시키려다 실패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로 인해 회원들이 보안사령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각서까지 쓴 일이 있었다.

이때만 해도 육군본부나 보안사에서는 이 모임을 친목회 정도로 파악했다. 규모가 좀 크긴 하지만, 그저 서로 알고 지내는 모임 정도로 이해했다. 전두환이 육사 재학 시절 결성한 오성회(전두환·노태우·김복동·최성택·백운택)나 임관 이후에 결성한 칠성회 같은 수준의 친목 모임으로 본 것이다. 전두환이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 하에 1963년에 결성했으며 1979년에 12·12 쿠데타를 일으킨 하나회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판단한 것이다.

 <뉴스위크>에 실린 12·12 쿠데타.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뉴스위크>에 실린 12·12 쿠데타.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래서 육본과 보안사에서는 알자회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보안사에서 요구한 각서도 '조사 받은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정도였다. 별것도 아닌 일을 갖고 문제를 부각시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 그렇게 마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과 6년 뒤인 1992년, 알자회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 멤버들이 서른 후반이 됐을 때다. 1992년 10월 11일, 육사 38기 임관 10주년 행사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청와대를 경호하는 수도방위사령부 30대대 작전과장 후보로 거론되는 38기 장교에게 또 다른 38기 장교가 "알자회 회원이 그 자리에 가야 하니, 너는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이를 계기로 알자회가 군부 수뇌부에 다시 포착됐다. 이번에도 모임 간부들이 보안사에 불려가 '모임을 갖지 않겠으며 명칭도 사용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갔다.

하지만,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군 수뇌부는 멤버들의 진급이나 승진에 제동을 거는 방법으로 이 모임을 견제했다. 그래서 알자회 회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불이익을 받은 장교들이 있었다. 최초 멤버들은 하나회 수준의 영향력을 갖겠다는 목표로 모임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군 수뇌부의 견제 때문에 알자회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알자회는 은근히 생명력이 길었다. 2005년 2월호 <신동아>에서 거론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조직은 2005년까지도 계속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이번 최순실 청문회에서까지 또다시 거론됐다.

박범계의 질의가 사실이라면... 알자회는 하나회와 동급

그동안 알자회가 군 수사기관에 여러 번 포착되면서도 생명력을 유지한 것은, 100% 순수한 친목 모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명확한 정치적 조직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상호 간의 유대를 통해 군부 내 지위를 높이는 게 현실적 목표였겠지만, 군부 내부의 질서나 기강에 위협을 주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해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박범계 의원의 질의가 사실이라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진다. 만약 우병우·안봉근의 입김 하에 육참총장까지 나서서 알자회를 지원했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관련됐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청와대 비서관들이 대통령의 의중도 확인하지 않고 군부 사조직을 지원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대통령이 여기에 개입했다면, 박근혜 정권 하의 알자회는 오성회나 칠성회 같은 친목 모임과는 다른 것이 된다. 하나회 같은 정치적 사조직이 됐다고 볼 수 있다.

1963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하나회 창설을 지원한 데는 뚜렷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박정희는 김종필·김형욱·강창성·윤필용 등으로 대표되는 육사 8기를 견제할 목적으로, 4년제 육사인 육사 11기 이하를 하나회라는 사조직으로 묶고 이들을 전략적으로 지원했다.

박정희가 하나회를 얼마나 노골적으로 지원했는지는 1973년에 이들에게 하사한 선물에서도 드러난다. 이 해에 육사 11기이자 하나회 멤버인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을 준장으로 진급시키면서, 박정희는 그들의 가슴에 별을 달아줬을 뿐만 아니라 손에 지휘봉도 쥐여줬다. 그 지휘봉에 새겨진 글자는 하나회를 뜻하는 일심(一心)이란 한자였다. 비밀이어야 할 사조직의 이름을 지휘봉에까지 새겨준 것이다.

박정희는 하나회를 노골적으로 돕는 대신, 대가도 톡톡히 받아냈다. 군부가 육사 8기에 의해 독점되지 않도록 하는 한편, 육사 8기와 11기 이하가 상호 견제하도록 함으로써 군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국민을 폭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군 사조직 육성으로 얻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명예회복을 꿈꿨던 딸이다. 그뿐 아니라 국정운영 스타일에서도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만약 박근혜가 군부 사조직을 육성했다면, 그 동기 또한 아버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조직에 대한 지원을 통해 군부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기반으로 무언가를 도모하려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박근혜에게 원래 보장된 임기는 5년이었다. 5년짜리 대통령에게 과연 군부 사조직이 필요했을까? 사조직 회원들을 지원하고 군부 요직에 포진시키는 데는 여러 해가 걸린다. 5년 뒤에 물러날 생각을 갖고 청와대에 들어갔다면, 과연 이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박근혜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는지 궁금증이 더욱더 깊어진다.

박근혜가 알자회를 육성한 게 사실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국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 알자회 회원들만 서로를 알고 지낼 게 아니라, 국민들도 그들에 대해 알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알자회#하나회#군부 사조직#전두환#우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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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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