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말이 많은 남성입니다. 저를 알고 계시는 분들은 주변에서 말 많은 남성 중에 저를 손에 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남성성들' 글의 주제로 '말하기'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권력'으로 선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말하기'가 저의 남성성의 핵심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하기에 대한 문제제기를 많이 받았습니다. 최근까지는 무엇이 문제인지, 왜 남들이 불편해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이라는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여성들의 이야기였는데요. 주인공인 '선'은 반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지만 친구를 사귀고 싶은 아이입니다. 여름방학을 하는 날 전학 온 '지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선은 흔히 말하는 내향적인 아이입니다. 선은 자기주장을 잘 하지 않고, 누군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거나 하면 "그게 아니고"를 항상 말 앞에 붙이며 말을 이어갑니다. 자신감이 없고, 말이 느리고, 명확하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전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과 선의 엄마는 "말을 해야 알지"라는 말을 쉽게 내뱉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무척이나 답답해했습니다. 저는 왜 답답해했을까요? 영화에서 선이 자기 주장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아와 선의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에 선이 지아에게 "너도 전의 학교에서 왕따였다면서, 너도 거짓말쟁이잖아"라고 소리치는 장면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너무 통쾌함을 느꼈고,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왜 이 공격적인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꼈던 걸까요?
남성이라서 획득할 수 있었던 것
생각해보면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선'의 처지에 더 가까웠습니다. 작은 체구에 낯을 많이 가려서 친구를 사귀지 못했었습니다. 눈이 많이 나쁜 것도 어린 시절 집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비디오 게임을 많이 해서 나빠진 것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나 되어서 친구들과 같이 축구를 한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있을 때 누군가 한 명을 놀림거리로 만들면 모두가 재밌어 한다는 것을 알아챈 것 같습니다. 그 대상이 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더욱 공격적이고 빠르게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적 능력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 말로 이기려고 기를 쓰고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남성사회 속에서도 말하기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싸움은 못하지만 공부를 적당히 잘하고 말 잘하는 것은 저에게 무기처럼 작용했습니다. 영화 속 선이의 '그게 아니고'라는 말과 우물쭈물한 태도가 답답했던 이유는 저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시작하면서 저의 말하기는 남성적으로 더 강화되어 갔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일은 꽤나 적성에 맞는 일이었습니다. 대체로 많은 학생들은 말하기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 앞에 선다거나, 일대일로 앉아서 주장을 설득하거나 반박하는 것을 어색해 했습니다.
남성사회 속에서 더 이상 육체적 힘겨루기가 경쟁의 무기가 아닌 곳에서 저는 더 많은 권력을 쉽게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저의 말하기는 너무도 쉽게 권위를 획득했습니다(대학사회에서 한 살 선배가 가지는 권위는 교수에 필적할 정도입니다).
공격적인 말하기, 거침없이 말하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권위를 획득하는 말하기가 남성적 말하기라고 정의내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저의 남성성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저의 말하기 방식을 쉽게 획득할 수 있었던 원인은 제가 남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까지 나의 말하기를 '개인적' 특성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저의 말하기가 마초적, 남성적, 공격적이라고 지적받았을 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것은 극복의 경험이었지만 그 속에 남성 중심적인 한국사회에서 남성으로서 다른 성 보다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의 특권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참 답답해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남성으로서의 특권은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목소리'가 나올 수 있도록 말을 줄여보려고 합니다저는 생물학적 남성으로 살면서 말하는 것 자체를 부정당해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남을 공격하는 말하기는 실제로 나를 공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위협받아본 경험도 거의 없습니다. 아마도 저의 말하기는 이런 경험과 조건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성주의를 접하고 최근에 여성주의적 삶을 진지하게 실천하기로 마음먹은 이 시점에서야 제가 가지는 특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여성들을 비롯하여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들은 말하는 것 자체를 부정당하는 경험이 많이 있다는 사실, 여전히 물리적 위협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주변의 여성분들에게 '말하기'에 관해서 이야기해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자기 주장보다는 타인의 의견을 듣는 것을 덕목으로 학습했고, 상대방이 나의 말을 듣고 기분상해하면 그것이 자신을 위협하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상황과 조건을 이해하지 않은 채 내뱉고 있는 나의 말하기가 왜 공격적인지, 왜 남성적이라고 하는지 알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아마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남성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남성적 말하기에 익숙한 저에게 여성주의 운동에 함께하는 것은 꽤나 무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남성인 저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미지의 영역이기도 하고 권위가 없습니다. 매 순간 검열을 해야 하고, 나의 말이 혹시나 상대방을 상처 입히지 않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것도 의심을 받거나 공격받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를 지적받기도 하지만 도저히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존재나 역사를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어렴풋하게 이것이 내가 편하게 말해온 과정 속에서 여성들이 겪어왔던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의 남성성들 중 남성적 말하기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말하기 방식이 사회적으로 올바르고 좋은 것으로 간주되고, 그렇지 않은 말하기는 부정적으로 간주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것이 특정 성별에 따라 다르게 학습된다면 그 구조를 바꿔나가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타인을 상처 입히지 않고,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 겸손하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성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그 모든 것들을 너무도 쉽게 무시하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여전히 남성으로서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이 듭니다.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여성주의자는 말의 양을 줄여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남성들이 점유해온 말하기의 시간과 공간에 다른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여백을 만드는 것, 그것도 일정 부분에서는 남성적 특권을 내려놓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히 말을 줄이는 것을 넘어서 더 잘 들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