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탄핵심판 사건 2차 변론에서 박근혜 대통령 측 대리인단이 "광화문 촛불집회의 주도세력은 민주노총"이라며 "국회가 탄핵소추 사유로 누누이 주장하고 있는 촛불 민심은 국민의 민심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대리인단의 주장은 시민들이 자발적 의사가 아닌 민주노총의 선동과 조작에 이끌려 촛불집회에 나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1000만 시민들이 주체적 자아와 인격, 판단 능력을 갖지 못할만큼 어리석다는 소리다.
탄핵심판에 임하는 박 대통령과 대리인단의 본색이 이 주장 속에 모조리 담겨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은 1000만 촛불에 담겨있는 시민들의 분노와 좌절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촛불 민심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호도하고 있다.
촛불집회는 지역과 이념, 세대와 계층을 넘어 시위 문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한 촛불집회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다. 제3자의 시각이라 할 수 있는 외신의 평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수백만명이 운집한 대규모 집회가 비폭력, 평화, 질서 속에 진행됐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민주적이고 성숙한 시민의식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장면에 극찬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촛불집회는 대한민국을 빛낸 2016년 최고의 '히트상품'이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촛불집회가 대한민국 시민의 성숙함과 수준높은 민주적 역량을 세계에 드높인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과 국가권력이 실추시킨 국격을 시민들이 되살려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대리인단은 촛불집회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민의를 철저히 왜곡하며, 박 대통령의 범죄행위를 부정하기에 여념이 없다.
대리인단은 이날 변론을 위해 색깔론을 꺼내들기도 했다. 그들은 "광화문에서 대규모 촛불집회를 주동하는 세력은 민주노총으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따르고 태극기를 부정하는 이석기의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행진을 한다"면서 "집회에서 대통령을 조롱하며 부르는 노래의 작곡자도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어 네 번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고 주장했다.
색깔론은 보수세력이 위기에 처해질 때마다 꺼내드는 전가의 보도이자, 지니의 램프다. 시민의 정당한 비판을 이념 문제로 치환시켜 편을 가르는 '갈라치기 전략'이 또 다시 등장했다. 권위주의와 공안통치를 부활시키고 민주주의와 시민권을 퇴행시킨 정권다운 행태가 아닐 수 없다. 탄핵심판의 순간까지 철 지난 색깔론으로 촛불 민심을 왜곡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대리인단이 박 대통령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촛불 민심을 폄하·매도하고 색깔론을 통해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박 대통령의 인식은 지난 1~3차 대국민 담화가 성난 민심을 추스리기 위한 눈속임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검찰 조사와 특검 조사, 국회의 국정조사 등을 통해 대통령의 범죄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도 이렇게 딴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촛불민심을 왜곡하고 호도하기에 여념이 없는 박 대통령과 대리인단은 그러나 갖은 꼼수를 동원해 탄핵심판을 지연시키고 있어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대리인단은 지난해 헌재에 수사기록 제출요구에 대한 이의신청을 제기했고, 국회 탄핵소추위원단의 답변서 공개에 소송지휘요청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연금공단, 삼성, 전경련,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기업 16곳 등 20곳에 사실조회를 신청하는 등 탄핵심판을 지연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같은 행태는 탄핵심판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변론이 시작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3일 열렸던 탄핵심판 1차 변론은 박 대통령의 불참으로 시작한지 불과 9분만에 종료됐다. 2차 변론에서는 핵심증인들인 안봉근·이재만 전 비서관이 불출석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헌재의 증인 출석을 앞두고 약속이나 한듯 종적을 감췄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리인단은 지난해부터 제출하라는 세월호 7시간 행적에 관한 자료 역시 아직까지 제출하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과 대리인단이 조직적으로 탄핵심판을 지연하고 방해하고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정황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자 세간에는 '이게 나라냐'라는 푸념이 대유행했다. 국가 권력이 비선과 공유되어 국가시스템을 파괴시키고 국정이 사사로이 농단된 현실에 대한 자조섞인 한탄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이 느끼는 부끄러움을 정작 박 대통령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탄핵심판이 시작되자 안면을 완전히 몰수한 채 막가파식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JTBC <썰전>의 유시민 작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대통령 정부 비판하는 대규모 시위는 몇 번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대통령이라도 잘못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다르다"면서 "특정 행위가 문제가 있어서 바로 잡기 위해 대중들이 투쟁에 나섰다면 그것을 고치면 되는데, 이번 사태는 박 대통령의 존재 자체가 문제다. 수습이 안 된다"고 혀를 내두른 바 있다. 박 대통령의 즉각적인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절대 다수 시민들의 인식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은 지난해 "99%의 민중은 '개·돼지'로 보고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했던 정신나간 교육부 정책기획관으로 인해 부지불식간에 '개·돼지'가 돼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졸지에 무지몽매한 '바보'가 된 느낌이다. 박 대통령 측 대리인단의 주장은 민중이 '개·돼지'라는 비유 못지 않게 불쾌하며 모멸적이다. 시민의 존엄과 인격을 우롱하고 모독한 그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