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를 인상 깊게 본 독자로서 영화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는 짐짓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책에서 보여준 주제 의식을 충실히 담아내지 못한데다 영화적 표현에 있어서도 활자의 스케일을 매력적으로 구현해내지 못했다. 원작을 좋아하는 탓에 <인페르노>도 기대를 했지만 영화는 실망스러웠다. 책에서 줄거리의 맥락만을 가져왔을 뿐 캐릭터의 변형과 상황 설정의 재구성 등은 오히려 원작이 보여준 강한 설득력을 헤치는 결과를 낳았다. 캐릭터의 서사를 살리지 못하고 에피소드간의 개연성은 흐려져 결국 맥 빠지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영화는 실망스러웠지만 소설 <인페르노>는 '기호'와 '상징'의 의미를 밝혀나가는 추리 서스펜스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더라도 내용상으로 충분히 문제성 있는 작품이다. 인류의 팽창으로 인한 지구 환경의 고갈과 불안한 미래, 재앙의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첨단과학기술에 대한 입장, 새롭게 도래하는 환경속에서 인류는 멸망할 것인가 진화할 것인가에 관한 물음 등 <인페르노>는 상당히 무겁고도 까다로운 질문들을 던진다.
이야기는 버트런드 조브리스트라는 한 천재 생명과학자의 죽음로부터 시작한다. 조브리스트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가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고 인류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봤다. 이는 1798년 토마스 맬서스가 발표한 <인구론>의 내용을 연상케 한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맬서스는 그 해결책으로 인구의 조정을 제시했다. 그는 <인구론>에서 "아무런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행동하기 위해서는 사망률을 낮추는 일이나 자연의 작용을 저지하려는 어리석고 헛된 노력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촉진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고 썼다. 끔찍한 전염병의 창궐이나 파괴적인 자연 재앙, 기근, 부랑자나 빈곤 계층 구제의 중단 등을 주장한 맬서스는 당시 '구빈법'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초창기 사회보장 정책이 식량은 증가시키지 않고 인구만 증가시킨다고 비난했다. 맬서스의 인구론 이후에도 20세기 독일의 나치는 우월한 인종만이 살아남는다는 인종 우생학을 앞세워 유태인 학살과 같은 인종 청소를 시도하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 조브리스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류의 일부를 희생시키기로 결심하고 '인페르노'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를 개발한다. '인페르노'는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지옥'을 일컫는 말이다. 조브리스트는 엘리자베스 신스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에게 자신의 계획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고 요주의 인물로 등록된다. 이제 소설은 조브리스트가 어딘가에 숨겨놓은 '인페르노'라는 바이러스 찾기로 돌입한다. 기호학자인 주인공 로버트 랭던이 기호와 상징을 해석해가며 바이러스를 추적해간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조브리스트는 이런 종류의 해결책만이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영화에서는 '인페르노'를 흑사병처럼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대량 살상 목적의 질병 바이러스로 묘사하지만 이는 원작과 다르다.
영화가 대량 살상용 바이러스를 퍼트리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간의 선악 대결로 갈등 구조를 단순화시킨데 비해 책은 '트랜스 휴머니즘'이라는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흑사병과 같은 파괴적 방법이 아닌 유전자 개조를 통해 인간의 번식률을 떨어뜨리는 바이러스의 발명. 조브리스트는 이를 인류 진화의 새로운 단계라고 주장한다.
"가장 끔찍한 건...." 시에나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인페르노가 불임을 초래한다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예요.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바이러스 벡터는 말 그대로 시대를 훨씬 앞서가는 획기적인 도약이에요. 버트런드 덕분에 우리는 하루 아침에 유전공학의 암흑기를 건너 뛰고 곧바로 찬란한 미래로 들어서게 된 셈이죠. 그동안 굳게 잠겨 있던 진화의 문을 활짝 열어졎혀 우리가 스스로 종을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이제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고, 그 상자를 다시 닫을 수는 없어요."(인페르노 2, 338~339쪽)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자연선택의 법칙에 따라 진화를 거듭해왔다. 진화 과정에서 운석 충돌이나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의 대재앙은 원래 있던 종을 멸종시키거나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연선택의 법칙을 유일하게 거스르는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다. 과학 기술 발전 덕분이다. 소설 <인페르노>에서는 '바이러스'라는 극적인 형태로 등장했으나 생명공학의 발전 속도로 볼때 유전자 조작은 전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게다가 이러한 첨단과학기술이 특정 인종을 공격하는 생화학 무기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는 책 <사피엔스>에서 인류는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비유기물 공학 등을 동원해 자연선택의 법칙을 '지적 설계'로 대체하려는 수준까지 도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 자신의 종을 설계하는 단계, 즉 유전공학과 생명공학은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는 수준을 넘어서 인간의 생리기능, 면역기능, 수명 뿐 아니라 지적, 정서적 능력까지도 크게 변화시키는 단계로 발전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과학기술을 이용해 종을 발전시키고 다 건강하고 더 오래 살고 더 강력하고 더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간으로 개조해 나가는 것이 과연 행복한 미래로 가는 길일까. 하라리는 "오늘날의 과학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재설계할 수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며 사회, 경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도 유전공학, 나노기술, 컴퓨터 중계장치에 의해 바뀔 수 있다면 '인간적'이라는 말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지겠느냐고 반문한다.
<인페르노>에서 로버트 랭던은 오랜 시간을 거쳐 이루어져야 할 진화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빠르게 하는 것이 가져올 부작용에 의문을 표시한다. 소설은 이에 대한 입장 정리 대신 인류가 직면한 새로운 도전 과제라는 것을 환기하는 수준으로 끝맺는다. 랭던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구절,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에 선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는 문구를 되새긴다. 위기의 시대에 행동하지 않는 것, 부인과 외면, 묵인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전염병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인페르노> (로버트 랭던 지음 / 문학수첩 펴냄 / 2013 7 / 13,000원)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