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군기 10여 대가 제주도 남서쪽 이어도 주변의 우리 방공식별구역을 여러 차례 비행했다. 1월 9일 오전 10시 이후부터 오후 3시경까지의 일이다. 폭격기·조기경보기·정보수집기 등으로 구성된 비행단이 이 구역에 출현하자, 우리 공군 전투기 10여 대가 대응 차원에서 긴급 발진하고 직통전화(핫라인)를 통해 중국 공군에 경고 메시지를 전달했다.
우리 방공식별구역을 비행한 중국 공군기들은 동쪽으로 날아갔고, 그중 8대는 대마도(쓰시마섬) 동쪽 상공을 지나 동해상의 일본 방공식별구역을 비행한 뒤 돌아갔다. 일본 자위대 역시 대응 차원에서 전투기를 긴급 발진시키고 상황 파악에 나섰다.
최근 중국 항공모함 랴오닝호 전단(함대 혹은 선단)이 서해·동중국해·태평양을 오가며 훈련을 실시하자, 미국도 이에 맞서 지난 5일 칼빈슨 항공모함 전단을 아시아·태평양 쪽으로 출항시켰다. 또 일본 자위대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가능성에 대비해 자위대 함대를 대한해협 주변에 배치해놓았다.
중국 비행단의 움직임은 이 같은 미국·일본의 동태에 대한 견제 내지는 정보 파악 차원의 행동일 가능성이 있다. 작년 말 체결된 한일 군사정보공유협정에 따른 한·일 양국의 군사협력 시스템을 시험해보려는 의도도 있었을 수 있다. 여기다가 남중국해 문제나 조어도(센카쿠)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일본을 견제하려는 속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공군기들의 비행경로나 최근 동아시아 정세를 볼 때, 이번 일은 한국보다는 미국·일본을 보다 더 많이 의식한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한·중 양국의 방공식별구역이 겹치는 이어도 주변 상공을 통과한 데는 한국을 살짝 자극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방공식별구역은 자국 영공에 접근하는 비행물체의 식별, 위치 확인, 통제 등을 목적으로 설정하는 공중 구역이다. 자기 나라 영공에 대한 위험한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구역은 자국 영공보다는 주로 공해상의 하늘에서 기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이 구역의 국제법적 효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유 비행이 인정되는 공해상의 상공을 특정 국가가 통제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고, 주권국가가 방공식별구역을 통제하는 것이 수십 년간의 관행을 통해 관습 국제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이 구역에 관해서는 아직 특별히 정해진 게 없다. 그러다 보니, 국가 간에 구역이 겹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이 설정한 방공식별구역은 북한 영공과 겹친다. 또 서해상의 이어도 주변에서 중국측 방공식별구역과도 겹친다. 또 일본측 방공식별구역과도 겹친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에도 구역이 상호 중복된다.
이처럼 정해진 게 없기 때문에 남의 나라가 설정한 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하는 것은 남의 나라 영공을 침범하는 것과는 다르다. 주로 공해상의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전에 상대국한테 통지만 한다면, 문제될 게 별로 없다. 하지만 중국이 그런 절차 없이 이어도 주변 상공을 비행했기 때문에, 한국 공군이 긴급 대응에 나섰던 것이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결정적 계기방공식별구역의 기원은 1941년으로 소급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그 해 12월 7일이었다. 이때까지 미국은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 아침 6시 45분 이후의 1시간에 대한 뼈저린 후회가 방공식별구역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날 오전 6시 45분경, 하와이에 배치된 이동식 레이더 기지에서 근무하던 미군 당직 장교가 레이더에서 이상한 신호를 감지했다. 그는 레이더가 고장 났거나 미군 비행기가 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시간 뒤인 7시 55분, 그 장교는 자기가 1시간 전에 봤던 신호의 실체를 두 눈으로 목도했다. 183대의 폭격기로 구성된 일본 비행단이 하와이 진주만 하늘을 뒤덮은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미군은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전함 8척 손실, 항공기 198대 완파, 항공기 159대 대파의 참패를 당했다. 이것은 미국을 제2차 대전으로 끌어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6일 뒤 미국 대통령과 의회는 자국 주변의 항공구역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민간항공위원회에 부여했다. 방공식별구역의 원형이 이로써 생겨난 것이다. 9년 뒤인 1950년 9월 9일, 미국은 대통령령 10197호를 통해 '국가안보가 위협을 받는 경우에 항공 교통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민간항공위원회에 부여했고, 12월에는 태평양과 대서양 상공에 250~350해리 정도의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했다.
이런 흐름을 보면, 진주만 기습으로 인한 충격이 미국의 방공식별구역 제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비행단이 미국 영공에 접근하기 전에 그 당직 장교가 방공식별 책임을 충실히 이행했더라면 그 같은 참패가 없었을 텐데 하는 반성이 기초가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3월 22일 동아시아 상공에 대해서도 이 구역을 설정했다. 자국의 영향력 하에 있는 한국·일본·대만 상공에도 방공식별구역을 지정한 것이다. 이것은 세 나라 공군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여기서 활동하는 미 공군 내부의 방공식별책임을 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의 영향력이 막강할 때는 동아시아에서 방공식별구역 문제로 충돌이 일어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 패배와 닉슨 독트린(아시아·태평양에 가급적 개입 않겠다는 원칙) 선언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분쟁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미국의 영향력이 이완되는 틈을 타서, 일본이 1969년에 방공식별구역을 확장한 것이다. 이로써 한·일 양국의 구역이 겹치게 되었다. 여기다가 2013년에 중국이 동중국해(동지나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고 이 구역이 한·일 양국과 겹치게 됨으로써 분쟁 가능성이 한층 더 커졌다.
하지만, 각국의 방공식별구역이 겹치고 남의 구역에 대한 비행이 발생한다고 해서 곧바로 무력 분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방공식별구역의 대부분은 자국 영공이 아니므로 각국 공군은 외국 공군기의 진입에 대해 과도한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상대방의 비행에 맞서 자국 전투기를 긴급 발진시키고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선에서 가급적 멈추고 있다.
또 한·일 간에는 상대방 구역 진입 30분 전에 사전 통보를 하도록 되어 있고, 한·중 간에는 직통전화(핫라인)가 존재하고 있어 언제든 연락을 할 수 있다. 불측의 사태를 미리 방지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그나마 평화로운 편이었다. 그래서 한·중·일 3국이 남의 구역을 비행한다 해도 그것이 곧바로 무력 충돌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쉽게 장담할 수 없다.
한국과 일본이 군사정보공유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한·미·일 삼국 군사협력이 한층 더 긴밀해졌다. 이것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에도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다가 한국에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위체계)가 배치되고 일본의 헌법 개정으로 자위대의 침략이 가능해지면, 북한·중국의 위기감은 한층 더 고조될 것이다.
위기를 고조시키기는 북한이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주권국가의 고유 권리를 내세워 미사일을 일본 주변에 쏘고 핵실험을 계속 단행하며, 중국이 동중국해나 남중국해에서 주권 행사를 명분으로 미국을 자극한다면, 한국·미국·일본·대만 쪽의 위기감도 한층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일들로 인해 동아시아 긴장이 높아지면, 사전에 아무런 통보 없이 남의 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하는 일이 한층 더 빈번해질 가능성이 있다. 이로 인해 위기감이나 불쾌감을 느낀 상대방 정부가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면, 방공식별구역에서의 마찰이 곧바로 영공에서의 마찰로 비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어수선해지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방공식별구역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