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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저울의 추'
내가 이 연재의 기사를 쓰면서 가장 고심한 부분은 '내 저울의 추'에 대한 문제다. 오래 전 베이징에서 만난 당시 93세의 독립운동가 이명준 선생은 "이 세상에 '진선진미'한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선과 악의 요소를 다 함께 지니고 있는데, 그 비율이 7:3이냐, 5:5냐, 3:7이냐가 문제다"는'금과옥조'와 같은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내 마음속에 선과 악을 다 지녔으며, 빛과 그림자도 다 지니고 있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 글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와 같은 필부들로 다만 내가 그때 그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에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미 지난날의 모습이라는 것을 새삼 상기하는 바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피차 많이 변했으리라 믿으며,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데, 다만 한 글감으로 썼음을 밝힌다. - 기자의 말

학생회 지도교사가 되다

1988학년도 신학기에 최윤애 교장선생님이 부임한 뒤 나는 곧장 보직 사표를 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 이듬해인 1989학년도에야 교무부장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나는 쉬운 보직을 맡으면서 수업에 충실하려고 하였는데 학기 초 새 보직 발표를 보니 학생회 지도교사였다.

그 무렵은 민주화 열풍으로 각 학교가 몸살을 몹시 앓을 때였다. 많은 대학에서는 학생회 간부들이 총장실을 점거하거나 심지어 총장을 감금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또 어느 학교에서는 학생회 간부가 스승의 머리를 삭발하는 전대미문의 불상사도 벌어져서 사회를 경악케 한 일까지도 벌어졌다.

나는 이런 어수선한 과도기에 학생회를 맡는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닐 것 같은 예감으로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한번 발표된 인사를 바꿀 수 없다고 하여, 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교장선생님에게 학생회 정·부회장 선거를 현재 간선에서 직선제로 바꾸도록 허용해 줄 것과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학교 측에서 최대한 받아들여줄 것을 말씀드렸다. 다행히 최 교장 선생님은 내 제의를 흔쾌히 수락해주셨다. 그분은 대학에서 학생처장을 역임한 분으로 시대의 흐름과 민주주의를 제대로 아는 훌륭한 교육자였다.

 1, 2기 학생회 정부회장단(왼쪽부터 1기 부회장 채수진, 이영수, 회장 이병일 기자. 2기 회장 강승관 부회장 서정실, 이금옥 1989. 10.)
1, 2기 학생회 정부회장단(왼쪽부터 1기 부회장 채수진, 이영수, 회장 이병일 기자. 2기 회장 강승관 부회장 서정실, 이금옥 1989. 10.) ⓒ 박도

직선제로 학생회장을 뽑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이전에는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간선으로 뽑았다. 그 때문에 학생회 임원도 간선 아니면 임명제로 이름만 민주주의 교육이었다. 그해 학기초 학생회 임원 첫 상견례에서 내가 학생회 선거를 직선으로 한다고 발표하자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뒷이야기로는 자기들이 그해 투쟁 목표로 세운 것을 지도교사에게 빼앗겼다고 했다. 아마 그때 우리 학교가 전국 고교에서 학생회장단 직선제를 가장 먼저 시행한 학교였을 것이다.

그동안 학생회칙은 모두 간선제로 유신의 잔재였기에 새로운 학생회칙과 선거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법전을 펴고 공부해 학생회칙을 보다 민주적으로 개정하고 새로운 선거법을 학교 실정에 맞게 만들었다.

새 선거법으로 학생회 선거를 치렀다. 그런데 복병은 학생회 간부들이 아니라 일부 동료교사였다. 나는 그제야 우리나라에 민주 발전이 더딘 까닭과 민주화 장애요인을 알았다. 일부 교사들은 나에게 직간접으로 불평했다. 나는 이를 통해 기득권자들은 내심으로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또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있기에 주연이 독재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직선제로 뽑힌 정부회장들과 학생회를 조직해 발대식을 치렀다. 첫 모임에서 학생회장 이병일(현 변호사)군이 대의원에게 한 말은 지금도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 있다.

"여러분에게 나눠드린 빵과 우유는 학우들이 낸 학생회비로 산 것입니다. 맛있게 드시고 학우들을 위해 일합시다."

그 전 학생회장들이라면 "학교에서 사 준 겁니다"라고 하면서 지도교사에게 감사히 먹겠다고 인사했을 것이다. 곰곰이 뜯어보면 지당한 말이었다. 분명 그 빵과 우유는 학생회비로 산 것이다.

나는 학생회 임원들과 함께 보낸 1년은 즐거운 일보다 난처한 일이 훨씬 더 많았다. 회장이 고3이라 부회장인 고2 이영수군이 주로 나에게 찾아와서 학생회 건의사항을 전달하거나 요구했다. 그는 무표정한, 냉정한 얼굴로 "선생님, 학생회비 지출장부를 공개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는 내 처분을 기다렸다.

학생들이 얼마나 학교를, 어른들을 못 믿으면 이런 사태에 이르렀을까? 나는 우리 학교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학생회 간부들이 서무(행정)실로 가서 장부 공개를 요구했다.

서무과장이 흥분해서 내게 뛰어왔다. 다행히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장부를 공개해 위기를 모면했다. 학생회비 집행에 몇 가지 문제는 있었지만 큰 흠은 드러나지 않아 다행히 학생들의 오해가 풀렸다.

 이대부고 학생들과 대관령으로 생활훈련을 가다(1993. 5.)
이대부고 학생들과 대관령으로 생활훈련을 가다(1993. 5.) ⓒ 박도

학생회와 학교 사이 샌드위치가 되다

그 일 외에도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도교사인 나에게 여러 문제들을 조목조목 따지거나 건의했다. 그때마다 나는 늘 판정패를 당하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거나 때로는 학생회와 학교 사이 '샌드위치맨'이 됐다.

스승의 날, 학생회 임원들이 여러 날 기획 준비하여 '사제동행의 행사'를 마련했다 하지만 일부 선생님들의 비협조로 그 행사는 어정쩡하게 끝나버렸다. 그날 행사를 준비한 여학생들은 일부 선생님 태도에 격분하며 학생회 실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선생님들, 너무 하세요. 우리 학교는 사제가 동행하는 학교로, 선생님들을 즐겁게 해 드리고자 이 행사를 마련하였는데…. 선생님들은 행사에는 불참하시면서 저희들이 마련한 다과는 드시고, 학생회에서 전체 학생에게 모금해 마련한 선물꾸러미는 들고 퇴근하시면서…."

그 말에 나는 지도교사로서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나는 그해 마음고생도 많이 하였지만 그들을 통해서 많이 배웠고, 우리나라의 앞날이 밝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그동안 우리나라에 우리 사회와 교육계에 왜 부정부패가 사라지지 않는지 그 까닭도 알게 되었다.

그 근본은 교사가 학생 위에 군림하려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한 예로 학생회 간부와 교사들이 수련회를 가는데 준비하는 학생회 간부가 한 여선생님에게 소금을 부탁했다. 그러자 그 여선생님은 내가 그런 것도 준비해야 하느냐고, 학생회 간부들이 버릇없다고 불참을 선언했다.

그동안 교사들은 '선생님'이라는 직함으로 학부모나 학생들에게 대접을 받는데 너무나 익숙해 있었다. 앞으로 그것을 버리지 않는 한, 이 나라에는 부패 접대문화와 갑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의올림픽 나라소개를 마치고(1993. 10. 이대강당 앞)
모의올림픽 나라소개를 마치고(1993. 10. 이대강당 앞) ⓒ 박도

직위해제당한 교장선생님

후일 나는 그때 학생회장과 부회장의 결혼식 주례를 모두 맡았다. 그들은 멀리 경주와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굳이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의 내 집까지 약혼자를 데리고 찾아와 나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결혼식 날 식장에서 만난 연세대 상대 한 주임교수가 내게 결혼주례 자리를 빼앗겼다는 시샘도 했다.

 학생회 이영수 부회장이 졸업 후 약혼자를 데리고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내 집으로 주례를 부탁하러 찾아오다(2006. 9.).
학생회 이영수 부회장이 졸업 후 약혼자를 데리고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내 집으로 주례를 부탁하러 찾아오다(2006. 9.). ⓒ 박도

제7대 최윤애 교장선생님이 임기 만료로 물러나시자 제8대 이종록 교장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다. 그분은 다행히 부속학교의 가장 큰 문제점을 곧장 파악하셨다. 그리하여 인사개혁을 하고자 인사위원회를 발족시켜 부장, 교감 선발과 자격, 임기 등을 정하는 등 정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교내 고질적인 부정부패 부조리 척결문제도 언급했다.

 학생들에게 참고서 리베이트 반환금 영수증(1994.)
학생들에게 참고서 리베이트 반환금 영수증(1994.) ⓒ 박도
나는 그 말씀에 호응해 참고서 업자에게 리베이트로 받은 돈을 학생들에게 돌려주기도 했고, 여러 선생님들에게 호소하여 그런 떳떳치 못한 돈을 기부받아 교내 도서관 도서구입비로도 썼다.

그래서 당시 우리학교 도서관에는 신간서적들을 그때그때 구입 비치해 학생들의 독서력 향상에 힘썼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종록 교장선생님은 재단으로부터 직위 해제 당하는 수모를 겪고 물러나셨다. 아마도 인사 개혁에 불만을 품은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벌인 비열한 공작의 한 결과 내려진 조치로 짐작이 갔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증거는 없었다. 기독교 학교에서는 역린과 같은 예배를 소홀히 한다, 교직원들과 음주를 자주 한다는 풍설이 요란했다.

나는 이대부고에서 27년 근속하는 동안 모두 아홉 분의 교장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다 훌륭하신 교육자였지만 개중 한두 분은 지금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흐르는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그 첫째는 교장으로서 매우 오만, 교만한 태도와 교사에 대한 비하였다.

제10대 이아무개 교장선생님 오만, 교만한 언행과 교사들에 대한 비하는 유독 심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가 아닌 영국에서, 남아공화국에서 인종차별을 목격하고 반영주의자가 된 까닭은 직접 당해 보았기 때문이다.

 김옥길 전 이대총장과 기자(1989. 10. 고사리마을에서)
김옥길 전 이대총장과 기자(1989. 10. 고사리마을에서) ⓒ 박도
그 무렵 이화학당 측에서 교내 주차장을 유료화하면서 월 주차비를 대학교수에게는 1만 원을 받는데 견주어, 부속학교 교사들에게는 월 2만 원씩 받아 일부 교사들의 불만을 가득 샀다.

나는 그제나 이제나 운전면허증이 없는, 평생 대중교통만 이용하였기에 그 문제에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그런 차별은 기독교 학교의 근본정신에 크게 어긋나는 처사일 것이다.

전임 김옥길 총장 재임 때는 당신 사저에서 이화학당의 모든 식구들에게 자주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분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그분은 오히려 그늘에서 고생하는 청소노동자, 수위, 부속학교 교사 등 낮은 곳에서 수고하는 분부터 먼저 초대했다. 그게 바로 참다운 기독교인의 바른 자세요, 정신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숭고한 이화 정신은 날이 갈수록 점차 퇴색되더니 급기야 교내 문제에 경찰까지 불러들이는, 한 국회의원의 말을 빌리면 '이대 OOO'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듣는 사태에 이른 것 같아 매우 안타깝고 씁쓸하다. 아마도 설익은 벼는 고개를 숙일 줄 모르나 보다.

교직원 해외연수

1996년 학년도 말, 나는 아주 황당한 일을 겪었다. 내가 학생회 지도교사를 맡은 해에 민주화 덕분으로 학생회 간부들을 직선으로 뽑았다.

그때 그들이 학생회 임원선거에서 내건 공약 가운데 하나는 '교내 협동조합 설치'였다. 다행히 당시 교장선생님은 학생회장단의 의사를 존중해, 그 이듬해 학생과 교사들의 공동 출자로 교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협동조합이 설립된 이후 교장선생님도, 담당교사도 바뀌더니, 협동조합은 슬그머니 본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협동조합 물품이 바깥 문구점보다 결코 싸지 않다는 학생들의 불만도 터져 나왔다. 하지만 학생들은 등교 후 바깥에 나갈 수 없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협동조합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연말 협동조합 이익금은 예년보다 훨씬 많았다. 이는 협동조합 운영을 잘한 게 아니라,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빌려 독과점으로 폭리를 취한 것으로 이는 협동조합 설립 취지에 위배된 운영이었다.

그해 연도 말 교사에게는 100%의 현금 배당금을 나눠주고, 학생들에게는 100%에 해당하는 값의 노트를 나눠주고도 이익금이 남았다. 그러자 해당 교사와 일부 간부 교사들은 그 이익금으로 학기 말 교직원 해외연수를 가자는 기상천외의 일을 꾸몄다. 그런 발상을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교육자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나는 그 분위기를 감지하고, 어찌 협동조합 이익금으로 교사들이 해외연수를 갈 수 있느냐고, 담당 교사에게 협동조합 정관을 보자고 말했다.

"같은 교사끼리 협조해 주지 않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그는 나에게 정색을 하며 반발했다. 도대체 무엇을 협조해 달라는 말인가. 나는 하는 수 없이 계통을 밟아 이아무개 교장선생님에게 그 부당성을 지적하며, 해외연수의 즉각 중단을 요청했다.

당시 이아무개 교장선생님은 사범대학 유아전공 교수로, 이전에는 부속초등학교 교장이었고, 퇴직 이후에는 어린이육영회 이사장이었다. 그분은 아주 독실한 신앙인이요, 사범대학 교수인지라 나는 그분의 양심과 상식, 그리고 판단력을 믿었다. 하지만 이아무개 교장의 답변에 나는 망연자실했다. 

"우리 선생님들이 해외 견문을 넓혀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는 것도, 협동조합 정관에 나온 대로 '이익금은 교육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에 부합합니다."

학년 말 방학 때 대부분의 교사는 교직원 해외연수를 떠났다. 평소 국회의원이나 도·시의원들이 변칙예산으로 해외연수를 떠난다는 보도에 게거품을 물던 교사들도 '나는 예외'라고 떠났고, 돌아온 뒤에도 그 누구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그 대열에는 성경선생(교목)도, 심지어 참교육을 부르짖던 전교조 소속 교사도 동행했다. 그저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일부나마 우리 교육현장의 한 단면이었다. 하지만 몇 분은 학교 간부와 동료들의 끈질긴 동참 권유에도 끝내 불참했다. 그분들은 사회과 김아무개, 가정과 정아무개, 음악과 김아무개, 그리고 과학(물리)과 엄아무개 교사 등이었다. 이 기록은 그때의 역사이기에 여기 글에 남긴다.

 조기 퇴직 후 강원 산골로 내려와 얼치기 농사꾼으로 텃밭에 두엄을 내다(2004. 4. 안흥마을)
조기 퇴직 후 강원 산골로 내려와 얼치기 농사꾼으로 텃밭에 두엄을 내다(2004. 4. 안흥마을) ⓒ 박도

그 누구도 믿지 않는 풍토

사실 이런 일은 그 무렵 내가 재직했던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 시내 일부 학교에서 자행된 일들이었다. 일부 학교에서는 동창이나 학부모를 통한 '육성회비' '학교발전기금'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모금하여 변칙 운영하는 일들이 잦았다.

그런 돈은 제대로 된 장부도, 감사하는 사람도 없는, 재단이나 교장 주머닛돈으로 일종의 비자금이었다. 그런 검은 돈은 학교를 부패시키는, 그리하여 지난날 일부 학교(상문고교)에서는 사학 비리의 복마전이 됐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비극은 이런 일들을 잘 추진하는 사람은 유능한 이들로 추앙돼 주류사회를 이루는데 그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이다. 심지어 대학교 총장은 학문과 인격, 도덕심을 두루 갖춘 이보다 '학교발전기금'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돈을 잘 긁어 들이는 이를 자리에 앉히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학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불신'이 가득하다. 누군가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히 손볼 곳은 종교, 교육, 검찰, 언론계라고. 나는 이 말에 딴죽을 걸고 싶지 않다.

앞으로 우리 교육계가 그 근본 뿌리부터 정화되지 않는 한 미래는 없다. 위층의 개편도 중요하지만, 중간층과 아래층도 몽땅 의식을 개혁해야만 비로소 선진 대한민국이 될 것이다.

(* 한 회 더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2부 '교단일기'는 다음 회인 22회로 끝날 예정입니다.



#학생회#협동조합#교직원 해외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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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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