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오마이뉴스 <2016 청춘! 르포하다> 공모작입니다. 아쉽게 수상작에 선정되지 못한 취재물이지만, 독자와 마주하기 위해 이홍근·윤혜주·김정재 기자가 직접 오마이뉴스에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 기사는 지난해 말 작성되었습니다. 해당 시점을 고려하여 기사를 읽어주세요. [편집자말] |
"안녕하세요. 유범석입니다."익숙했던 외국계 은행 명함 대신, '앙코르 브라보노 이사 유범석'이라는 명함이 들려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 푸근한 미소, 보드랍게 파인 주름살. 아버지의 모습을 한 그는 은행의 지점장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오랜 세월 살아왔다. 그런 그가 '앙코르 브라보노'에 합류한 것은 불과 1년 전이다.
앙코르 브라보노는 능력 있는 퇴직 중장년층을 공공의 영역에 취업시키는 협동조합이다. 경영, IT, 인사, 회계 등 특정 기술이나 전문성을 가진 퇴직 중장년층을 재교육하고, 나아가 이들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기업이나 정부 기관에 연계하는 일을 한다.
투명인간이 된 아버지
"시니어들은 직업을 선택할 때 자기가 잘하고 끼가 있는 분야를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알지도 못했죠. 그저 가족을 위해 급여가 센 곳을 선택했고, 금융권이 돈을 많이 주니까. 먹고 사느라 자아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유범석씨 역시 돈 때문에 은행에 다니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10개가 넘는 기업에서 입사 제의가 들어왔고, 그중 연봉이 가장 높은 은행권에 입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꿈이나 적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유범석씨와 같은 세대는 유년시절을 독재 정권 아래서 보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다. 개인의 존재 의미는 '나' 스스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중흥에 있었다.
청년이 된 이들은 IMF를 마주했다. 생존이 목표인 시대에 직업을 통해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사치였다. 직업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행복은 곧 월급날 손에 들린 통닭 한 마리에 즐거워하는 자식의 모습, 봉투를 받아든 아내의 모습이었다. 가족이 행복해야만 내가 행복했다.
희생에 대한 강요 속에서 아버지는 채도를 잃어갔다. 사회도 가족도, 심지어 스스로도 이를 당연시했다. '누구의 아버지', '어느 회사의 과장'과 같은 수식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투명인간이 되어갔다.
장년이 된 아버지는 당황스럽다. 평생직장은 옛말이다. 조기 퇴직 후 노동과 희생으로 가득 찼던 인생에서 처음으로 공백을 마주했다. 벗겨진 머리의 남자가 홀로 서 있다. 자식은 떠나고 아내는 무관심하다. 이제야 궁금하다. 나는 누구인가.
지천명(知天命)의 자아 찾기"처음에는 여행을 다녔어요. 회사에 있을 때 못 가봐서. 한국에 돌아오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다시 비슷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매일 세일즈 미션을 달성하느라 압박감도 심했고..."결정적인 것은 동종업계에 재취업한 동료의 말이었다. 잘해야 2~3년 버틴 후에 또 다시 직장을 잃을까 불안해하는 그들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해오던 일이 아닌, 가슴이 시키는 일을 찾고 싶었다. 급선무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찾는 일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생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것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이 길을 전문적으로 가고 싶었다. 전직 지원 전문가 교육, 커리어 컨설턴트 교육, 리더십 강사 교육을 듣고 나니 6~7개월은 훌쩍이었다.
"은행에서 일할 때, 고객들을 만족시키기가 어려웠어요. 예금 대출 같은 상품은 너무 흔하다 보니 경쟁력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무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죠. 까다로운 기업 담당자들을 상담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상담 스킬이 쌓여있었습니다."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는지 알아가는 것은 기쁨이었다. 앎의 즐거움을 혼자만 누리고 싶지 않았다. 더 많은 동년배 중장년층이 자아를 찾길 바랐다. 이를 사회로 확장시키고자 사람들이 모였고, 앙코르 브라보노의 시작이었다.
앙코르 브라보노, 당신의 경험을 삽니다고령화 사회가 도래했다. 여생이 너무 많다. 퇴직 후의 여백이 힘든 것은 나의 경력과 능력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기분 때문이다.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사회에서 아직 쓸모가 있다는 걸 증명받고 싶어 합니다. 다들 기업에서 꽤나 베테랑이셨거든요."앙코르 브라보노는 재취업의 열망과 의지를 가진 장년들을 재교육하는 일을 주로 한다. 스스로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일만 해온 중장년층에게 '성격유형검사', '심리검사'등을 통해 장점과 재능을 찾아준다. 이미 경험을 통해 알게 모르게 체화된 지식들이 있어 조금만 방향을 제시해 주어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능력 재발굴과 자아 탐색뿐만 아니라 이들을 사회로 내보내는 것까지가 앙코르 브라보노의 일이다.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적성이 맞는 직종을 찾아 기업에 매칭한다. 이때, 사기업이 아닌 사회적 기업, 정부기관과 같은 사회적 목적 기관에 우선적으로 연결한다. 경제활동이 자연스럽게 사회에 공헌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지속적 수입을 보장하는 동시에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다. 2016년 상반기만 해도 7명의 퇴직 중년이 앙코르 브라보노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했다.
세대공생의 길을 묻다
"중장년의 취업이 청년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장 걱정되는 사회문제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는 의외로 "청년실업"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범석씨에게는 취업 준비생인 자녀가 있다. 취업이 힘들어 졸업을 유예한 뒤, 학원 강사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청년 실업의 심각성을 느꼈다고 한다. 안 그래도 부족한 일자리에 장년들을 취직시키다 보니 '자식의 일자리를 빼앗는 게 아닌가'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취업준비생인 이진주(24세)양은 "사람들과 나서서 친해지고 싶지가 않아졌어요. 친구들도 다 경쟁자로 보입니다"라며 경쟁의 힘듦을 토로했다. 우리나라 전체 이윤의 60%를 가져가는 대기업이 고용하는 노동자는 전체 고용시장의 4%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이윤을 대기업이 독점하면서 고용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임금 격차가 커진다. 노동 임금은 삶의 질이다.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사람들은 4%에 불과한 대기업 일자리를 얻으려 경쟁한다.
치열한 경쟁 속 세대 간 공생은 앙코르 브라보노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청년과 장년을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둘의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 불안한 청년들은 조언이 필요하다. 퇴직 중장년은 본인의 능력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필요하다. 청년 멘토링 전문 인력 양성이 이 둘을 잇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은 노하우를 배울 수 있고, 퇴직 중장년은 전문 인력으로 노동할 수 있다.
실제로 청년들에게 베테랑 시니어 멘토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최동은(29세)씨는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옮긴 후 가장 좋은 점으로 시니어 멘토와의 만남을 꼽았다. "앞에서 잘 이끌어줄 시니어가 필요했어요. 일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일하는 이유도 팀장님 때문"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브라보 마이 라이프' "직업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는 수단이어야 해요. 겪고 보니 알겠더라고."아버지의 청년에는 자아가 없었다. '100억 불 수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따위의 거대 지표에 눌린 자아들은 100세 시대, 조기 퇴직의 조류에 휩쓸려 고개를 내밀었다. 퇴직 후 나의 모습을 마주하니 결핍된 것은 자신뿐이었다.
이제는 퇴직 후에도 50년을 더 살아가야 한다. 퇴직 중장년의 경험과 능력을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고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개개인 자아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심각한 경제적 손실이다.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열쇠는 이들의 움직임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유범석씨의 눈은 설렘으로 빛났다. 관록의 신사의 모습을 한 청춘이 앉아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낡은 벽돌 건물에 걸려있는 '혁신센터 – 앙코르 브라보노'. 누군가와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