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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산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부당한 죄명으로 중국에서 욕되게 처형되었으나, 그가 죽고 45년이 지나(1983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의 명예회복과 당원자격을 공식 회복시켰다
님 웨일즈, 김산의 '아리랑'과 박도 실록소설 '허형식장군'  책 표지 아리랑의 김산과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의 삶은 다르면서 같은 길이었다.
▲ 님 웨일즈, 김산의 '아리랑'과 박도 실록소설 '허형식장군' 책 표지 아리랑의 김산과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의 삶은 다르면서 같은 길이었다.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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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히기 십상인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놀라운 역사의지를 읽고 교훈을 얻는다. 최근 나는 일제치하 암울한 시대에 불꽃같은 삶으로 짧은 생(34세)을 마감한 두 혁명가의 전기를 접했다. 그 한 사람은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1909-1942) 장군이고(박도, <허형식장군>, 2016), 다른 한 사람은 조선인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아리랑>(님 웨일즈․김산, 2016)의 주인공인 김산(본명 장지락; 1905-1938)이다.

참 우연찮은 일생이다. 경북 구미 태생인 허형식은 평북 용천 태생인 김산보다 4년 뒤에 태어났으나, 두 사람 모두 33년을 일기로 생을 마쳤다. 한 사람, 허형식은 항일 파르티잔답게 북만주 청봉령 계곡에서 동북항일군 토벌대에 혼자서 끝까지 맞서다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또 한 사람인 김산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부당한 죄명으로 중국에서 욕되게 처형되었으나, 그가 죽고 45년이 지나(1983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의 명예회복과 당원자격을 공식 회복시켰다.

고상만은 <허형식 장군> 서평(오마이뉴스, 2016.12.17)에서 "친일파 박정희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는 그대에게 권하고 싶은 그의 이름, '다시 천고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육사의 <광야> 주인공) 허형식 장군의 실록 소설을 권하는 이유"라 했다. 허형식과 박정희는 같은 구미 사람이다.

님 웨일즈(N. Wales)의 <Songs of Arirang>(1941, 1973)은 국제적으로 먼저 알려졌으나,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것은 1984년이고, 그 개정판이 1992년에 나왔다. 리영희 선생은 생전에 <<아리랑>과 나>에서 "나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와의 만남은 1960년 봄이었다. '어느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생애에 관한 기록을 처음 읽으면서 받은 감동은 그 후 나의 삶의 방향과 내용에 지울 수 없는 크고 깊은 흔적을 남겼다"고 했다.

혁명가 김산의 삶은 리영희 선생의 사상적 은사(恩師)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김산의 혁명가적 삶을 잘 모른다. 나부터 이 책을 최근에 와서야 겨우 읽었으니 더 말 할 나위도 없다.

러일전쟁 와중에 태어난 김산은 기독교계 중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3․1운동을 맞는다. 그해 여름 동경 유학을 갔다가 1년 정도 머문 뒤 만주로 떠나 군사학교에 들어간다. 그 후 1925년까지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그는 베이징협화의학원(北京協和醫學院)에서 공부했다.

상하이에서는 안창호와 이동휘를 만나는 등 임시정부 사람들과 접촉했다. 김산은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았지만, 그 바탕에는 어린 시절의 기독교적 영향이 늘 짙게 깔려 있었다. 그의 삶을 이끈 사상적 기둥은 결국 톨스토이와 마르크스로 집약된다.

그는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던 중 두 번이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35년 무렵 조선혁명가들은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연계하는 협력망 구축을 고민했다. 이런 취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이 결성되었다. 1936년 8월 조선해방동맹은 김산을 북만주 소비에트 지구에 거주하는 조선혁명가 대표로 선출했다.

이듬 해 김산은 옌안(延安)에서 헬렌 스노우(필명 님 웨일즈)를 만나게 된다. 이 때 헬렌은 김산을 무려 스물두 차례나 집중적으로 만나 그로부터 <아리랑>의 구술 자료를 확보했던 게다. 당시 김산은 항일군정대학(中國人民抗日軍事政治大學)에서 물리학, 수학, 한국어 등을 가르치고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과 겹친 피로로 심한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말년에 김산은 자신의 삶과 의식세계를 이렇게 고백한다.

내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나 자신에 대해-승리했을 뿐이다.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역사를 이끄는 인간능력에 신뢰를 잃지 않는다. 역사의지를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폭력을 뒤엎지 않으면 안 되는 피억압자뿐이다. 패배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 새로운 세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잃어버린 사람뿐이다. 억압은 고통이요, 고통은 의식이다. 의식은 곧 (해방)운동을 의미한다. 인간 그 자체가 다시 태어나려면 수백만의 사람이 죽어야 하고 수천만의 사람들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피와 죽음, 그리고 실패는 더 이상 미래에 대한 나의 통찰력을 가로막지 않는다(<아리랑>, 2016, 464-465쪽).

혁명가의 삶과 의식은 엄중하고 명쾌하다. 실패는 자신을 더욱 강하게 해주므로, 그는 역사를 추동하는 인간능력에 대한 신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김산은 확신한다. 역사의지의 주인공은 피억압자이지만 좌절하지 않는 사람, 새로운 세계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잃어버린 사람이다.

감히 단언하기를 그는 "억압은 고통이요, 고통은 의식을 낳고, 의식은 곧 운동"이랬다. 그에게 민중의지는 곧 역사의지다. 따라서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다. 그는 "진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지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아니"랬다. 마을 노파 한 사람의 긴박한 속삭임만으로도 민중들은 손에 총을 잡을 수 있다는 게다. 하여 위대한 민중지도자는 민중을 뒤에서 밀어줄 뿐, 밧줄로 잡아끌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혁명지도자는 여간해서는 깨뜨릴 수 없는 영혼과 쉽사리 파괴될 수 있는 육체를 가공(加功)하는 사람이다. 혁명가는 민중들의 영혼을 일깨우고 해방시키기 위해 때로는 육체적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그에게는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하여 투쟁하다 의식적-자발적-으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하여 혁명가는 자기희생 속에서 행복하게 죽어가는 사람이라는 게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에는 실패하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이끈다는 게다. 그에게 혁명가는 '불사성'(不死性)의 역사다. <아리랑>에서 님 웨일즈는 김산의 일생을 '불꽃같은 조선인 혁명가의 삶'으로 그렸다. 혁명가 김산, 그의 삶이 오늘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고통이 의식이고, 의식이 운동이 된 혁명가 김산의 삶과 "사람은 제힘으로 살지 못하면 남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이 만나는 지점에 역사의 촛불은 횃불이 될 터.

억압이 고통이 된 일제치하 조선인들이 그들의 한을 삭인 <아리랑>은 이랬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 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요
                삼천리 강산도 잃었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에게 '해방'의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 되고 말았다. 일제 식민통치 36년에 이은 분단 72년의 세월, 과연 분단은 고착되는가? 김산과 허형식은 알고 있다. 탈분단 만이 팔천만 동포의 살 길이란 걸. 게다가 한반도 남녘 오천만 동포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앞에 또 한 번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야 할 터. 우리에게 아리랑 고개는 아직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덧붙이는 글 | 혁명가 김산의 불꽃같은 삶 / 님 웨일즈 / 김산 / 아리랑(송영인 옮김, 2016)

김산의 삶을 그린 님 웨일즈의 '아리랑'과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의 삶을 그린 박도의 실록소설은 당대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게하는 역사적 거울이다.



#아리랑과 김산#김산과 허형식#님웨일즈#장지락#조선인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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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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