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귀국한 반기문(73) 전 유엔 사무총장은 참 부지런하다. 매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식으로 전국을 누비며 강력한 대권 주자 행보를 이어간다. 그에 따라 이런저런 해프닝도 발생하고 코미디 같은 구설도 생겨난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다. 1위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와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진다. '반기문 돌풍'을 기대했거나 예상했던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 당황하는 기색이다. 불안감과 초조감 때문인지 반기문 캠프의 자중지란도 노출된다. 외교관 출신 그룹과 정치인 그룹 간에 갈등이 일어나서 캠프 밖으로 파열음이 들린다고 한다.
'반기문 돌풍'은 애초에 글렀다. 초장에 잠잠했던 기운이 종장으로 가면서 화들짝 깨어난 듯이 반등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글쎄다. 나는 반기문 돌풍도, 지지율 반등도 뜬구름이라고 생각한다.
본질과 허울을 분별하는 눈매
최근 몇 년 사이에 유권자들의 눈매는 매우 예리해졌다. 과거 수평적 정권교체도 경험했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을 살면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학습했던 다수 유권자들은 이명박과 박근혜를 거치면서 민주주의 후퇴 현상을 혹독하게 체험했다. 이명박과 박근혜에게 속았음을 지금 뼈저리게 감득하고 있다.
이명박에게서는 '경제 환상'에 속았고, 박근혜에게서는 '빈 수레'가 내는 소리들에 철저히 속았다. 민주주의를 유린하면 경제도 쪽박이 된다는 사실이 오늘 증명되었다. 본질을 헤아리지 못하고 허울에 두 번 기만당했던 유권자들은 반기문에게는 유엔 사무총장이 허울임을 잘 간파하고 있다. 본질을 가리는 그 허울만을 보고 판단하는 어리석음에 또다시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SNS 시대를 살고 있는 유권자들은 스마트폰 하나로 세계를 읽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수만 가지 정보를 습득한다. 그리하여 반기문이 10년 동안 유엔 사무총장 자리를 잘 지켰지만, '치적'으로 삼을만한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훤히 알고 있다. 외국 언론들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투명 인간'이라는 비판과 '미국의 푸들'이라는 비난을 쏟아낸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인사는 이임 이후 5년 동안 자국의 대선이나 중요 직책에 나서지 않기로 한 유엔의 윤리강령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이임 직후 곧바로 대통령 선거에 나선 반기문을 신임 총장부터 곱잖게 보고 있다. 외신들은 모두 비판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유엔 사무총장 퇴임과 한국 대통령 선거가 시기적으로 맞물린 탓이기도 하겠지만 반 전 총장이 이임 직후 고국의 대선 판에 뛰어든 것은 스스로 자신의 '허울'에 집착한 탓이다. 다수 유권자들이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그 허울에 몰입해 주리라는 기대가 팽배한 탓이기도 하다.
지금 와선 말을 바꾸지만, 2015년 말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 대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발언을 유권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반 총장이 2016년 1월 1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위안부 합의에 이른 것을 축하한다. 매우 다행이다. 올바른 용단을 역사가 높이 평가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유권자들은 기억에서 지우지 못한다.
반기문에게서 느껴지는 명암들
유권자들 중에는 반기문에게서 이명박의 체취가 느껴진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박근혜의 그림자가 보인다고 토로하는 이도 있다. 또 그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고국의 '세월호 참사'에 대해 입을 다물었던 것에 분개하는 이도 있다. 반기문이 한국 대통령이 된다면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가 계속 이어지는 현상을 겪게 될 것임을 우려하는 이도 있다.
나는 반기문 전 총장이 노무현 정부의 외무부 장관을 하던 시절을 빼고는 줄곧 외국에서 생활하여 고국의 실정을 전혀 모르고 있음을 우려한다. 고국의 실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덥석 대권을 노린다는 사실이 괴이하기만 하다. 그가 귀국 후 연일 전국을 누비며 강행군을 계속하면서 만들어내고 있는 갖가지 해프닝들을 보며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가 '전 유엔 사무총장'으로 사는 것이 올바른 처신이라고 생각한다. 대권으로 가는 길에서 도중하차하거나 패배로 귀결되면 유엔 사무총장 경력과 명예도 추락하리라는 생각이다. 대권 가도에서 반기문이 어떤 확실한 메시지를 던지지 않고 있는 것에서는 사고의 빈약함 같은 것을 느낀다.
반기문의 고향인 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는 '반기문 기념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음성군이 국민세금 수십억 원을 들여 반기문의 생가를 복원하고 공원을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수십 개의 동상을 줄줄이 세워놓았다.
<시사인>의 보도에 따르면 2016년 8월 <워싱턴 포스트> 파이필드 기자가 반기문 기념광장을 방문한 뒤 북한에서 김일성을 추앙하는 행태와 다름없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이에 음성군은 반기문 동상들을 대부분 철거했는데, 아직 생가 앞에는 동상이 하나 남아있다. 그러니까 반기문 기념광장에 가면 반기문 동상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이라니! 너무 어색하고 기이하다. 자신의 동상에 대해 반 전 총장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자신의 동상 철거를 요구하지 않은 그가 내심으로는 흐뭇해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