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함께 견뎌내기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은 지인이 건네준 책입니다.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 제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힘이 든다고 말을 했던가 봐요. 그러자 지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에서 이 책을 꺼내 제게 줬습니다. 읽어보라면서요.
다음 날 잠에서 깨 뒤표지를 읽어보니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칠십 대 두 주인공이 교감하는 믿음과 우정, 나이 듦의 생각들', '황혼을 향해 얌전하게 걸어 들어가기를 거부한 용감한 두 주인공의 품위 있는 모험'이라고요. 저는 방에 앉아 잠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삼십 대인 내가 칠십 대 두 주인공이 나누는 교감에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을까.
왠지 내 스타일의 책은 아닐 것 같아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지인을 몇 번 더 만나게 됐고 볼 때마다 미안했던 저는 마음먹고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읽기 시작한 뒤 단 몇 페이지 만에 이 책이 좋아졌습니다. 바로 이 문장 때문이에요.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 본문 중에서 책은 시작하자마자 애디를 루이스의 집에 들르게 합니다. 에디는 다짜고짜 루이스에게 밤마다 자기 집에 와서 함께 자자고 제안해요. 둘은 몇십 년을 같은 동네 옆 블록에서 살았지만 서로 말을 나눠 본 적도 별로 없고, 또 무엇보다 서로를 거의 모릅니다. 그러니 루이스의 반응이 이러한 건 당연한 겁니다.
"뭐라고요? 무슨 뜻인지?" - 본문 중에서 그러자 애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섹스 이야기가 아니에요." - 본문 중에서 루이스는 이렇게 받고요.
"그렇잖아도 궁금했어요." - 본문 중에서 애디는 함께 자자는 의미를 이렇게 풀이해 줍니다.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걸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그렇죠?" - 본문 중에서 에디와 루이스 둘 다 배우자를 잃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집에 홀로 살며 가끔 멀리 있는 자식과 통화하는 게 하루 일과의 거의 다예요. 마땅히 만나 이야기할 대상도 없이 쓸쓸히 늙어가고만 있는 두 노인이지요. 외로워서인지, 밤에는 잠도 잘 안 옵니다. 수면제와 책에 의지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요.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서글픈 기분. 이 기분을 홀로 감당하기도 만만치 않고요.
그래서 에디는 "누군가가 함께 있어 준다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그 사람과 가까이 누워 "밤중에, 어둠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에디가 바라는 건 이것뿐입니다. 그 대상이 루이스이길 바란 것이고요. 수십 년을 봐왔지만 루이스라는 남자, 참 괜찮은 사람 같거든요.
루이스는 이튿날 에디의 초대에 응합니다. 이발소로 가서 머리도 단정히 자르고, 샤워도 깨끗이 하고, 손에는 잠옷과 칫솔을 든 채 에디 집 뒷문을 두드리지요. 그런 루이스의 방문을 에디는 기쁘게 받고 두 사람은 침대에 함께 누워요. 어색하게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잠에 들고요. 책은 두 사람이 서서히 친구가 되는 과정을 잔잔히 그려줍니다.
단단하게 그려낸 황혼의 사랑 보통 글을 쓸 때 '군더더기 없이 쓰라'고 많이 말하지요. 주로 문장에 해당하는 말인데, 이 책은 소설 전체에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문장도 그렇고, 구성도 그렇고, 인물도 그래요. 어찌 보면 굉장한 파격을 그리고 있는데 에디와 루이스의 행보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것도,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역시 군더더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단단함'인 것도 절제된 감정 표현 덕일 거예요. 쓸쓸한 두 노인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어쩌면 사랑 같은 걸 하게 된 상황. 그 사랑 속에는 뜨거움이나 열정, 질투나 분노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해와 받아들임뿐이에요. 낮과 밤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해 하며 상대를 소중히 여길뿐이고요.
그런데 두 사람의 이런 일탈이 미국 사회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미국은 그래도 꽤 개방돼 보이잖아요.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 다 좋은 평판을 유지하던 사람들인데, 이들의 이런 변화는 바로 뒷담화를 불러오고 말아요.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며 둘 사이를 비아냥 거리지요.
수십 년을 이웃 주민으로 살았던 두 남녀가 다 늙은 마당에 함께 자고, 함께 나들이하고,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이 보기 거북하다는 겁니다. 자식들도 엄마,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고 관계를 끊어버리라 협박하고요. 하지만 두 사람은 끄떡도 안 해요. 첫날 밤, 뒷문으로 들어오던 루이스를 향해 에디는 이렇게 말했었지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갖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너무 오래,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이제 더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 본문 중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둘은 가능하면 더 자주 밤을 함께 보냅니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상대에게 지나간 삶을 이야기하면서요. 젊었기에 어리석었고, 사랑 때문에 울고 싸우던 나날들. 그런 시간들은 이제 다 추억으로 넘어갔고 이제는 좋은 사람과 말동무나 하며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한 명이 죽지 않는다면 이렇게 함께 죽 늙어갈 것 같았던 에디와 루이스. 사회에서의 평판도, 자식의 어깃장도 다 이겨내며 꿋꿋이 소소한 일상을 즐기던 둘에게 벌어진 사건. 이 작은 사건이 두 사람을 떼어 놓은 이유, 그 이유를 뻔히 보고도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고, 아직 노인도 아닌 제가, 어찌 에디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여생을 따뜻이 보듬어 줄 좋은 사람을 만났는데 에디는 그 사람의 손을 놓으려고 합니다. "나는 당최 아무것도 납득이 안 돼요. 이건 당신답지 않아요" 하고 말하는 루이스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에디 때문에 속이 탔어요. 단단하게 흘러가던 소설이 마지막에서 터뜨리는 작은 균열. 균열이 야속하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이 균열 때문에 소설은 더 진실과 가까워졌는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제게 건네준 지인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식이 가장 무섭다고요. 부모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날 버리지 않을 텐데, 자식은 내가 잘못하면 나를 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요. 이웃 남자의 집에 찾아가 함께 밤을 보내자고 제안하던 당당하고 용기 있던 에디. 이런 그녀를 겁먹게 한 것도 그녀가 엄마이면서 할머니라는 사실 하나였습니다.
"요즘 힘들어요" 하고 말했던 저에게 지인이 왜 이 책을 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좋은 책이니까 힘이 들 때 읽어보라는 의미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덕분에 쓸쓸한 밤하늘을 그려보게 됐습니다. 지금은 마냥 좋은 밤하늘이 언젠가는 견뎌내기 힘든 그 무엇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에디가 왜 루이스를 찾아갔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덧붙이는 글 | <밤에 우리 영혼은>(켄트 하루프 /뮤진트리/2016년 10월 05일/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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