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6구간은 종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마음이 꽤나 설렜습니다. 6구간에는 '영남알프스'라는 거창한 별명이 붙은 해발 1천m 안팎의 산군이 첩첩산중 모여 목을 길게 늘이며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거기에다 전국 제일의 억새밭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한 신불산 억새평원이 바람에 술렁거리며 제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 전 재약산과 천황산에 오른 적이 있고, 2014년 가을에는 영남알프스 최고봉인 가지산에 올랐으므로 이번에 배내고개에서 간월산, 신불산을 거쳐 영축산에 오르게 되면 영남알프스라는 산악 퍼즐을 얼추 맞추게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설레는 마음 한편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영남알프스'라는 애칭이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익숙하고 또 한두 번 영남알프스에 오른 이들도 많긴 하지만, 영남알프스와 유럽에 있는 알프스가 얼마나 닮았을까 하는 대목에서는 아무래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제가 알프스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알프스 풍경은 금세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진으로, 영상으로 자주 접했기 때문입니다. 몽블랑, 마터호른, 융프라우 같은 산 이름도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알프스가 거느린 산들은 빙하에 깎여 뾰족하게 하늘로 치솟거나 거칠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지녔습니다. 해발 4천m가 넘는 산이 58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산들은 언제나 흰 눈에 덮여 있습니다.
알프스와 '급'은 다르지만 어쨌든 영남알프스그러면 우리의 '영남알프스'는 어떤 모습일까요. 일단 높이에서 한 수 접히고 들어갑니다. 영남알프스의 봉우리들은 1천m 안팎입니다. 그러니 산 덩치도 당연히 작습니다. 또 알프스가 거칠고 사나운 모습의 '악산'인데 비해 영남알프스는 둥글고 부드러운 '육산'입니다. 만년설에 덮인 알프스에 비해 영남알프스는 눈 덮인 풍경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눈이 많지 않은 남쪽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서 영남알프스라는 별명을 갖게 됐을까요? 아마도 예전 이곳에 목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너른 평원에 초록 풀밭이 광활하게 펼쳐지고 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풀을 뜯어 먹었겠지요. 그리고 그런 목가적인 풍경 뒤로 장쾌한 산줄기가 지나가니 알프스를 연상한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산속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우리말 오늘은 배내고개까지 버스로 올라간 뒤 고갯마루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배내'는 아기가 막 태어났을 때 입히는 '배냇저고리'의 배내가 아닙니다. 영남알프스에서 흘러내린 개울물이 내를 이뤄 흐르는데, 그 주위에 배나무가 많아서 냇물 이름이 '배내'가 된 것입니다. 순우리말입니다.
먼 옛날부터 산, 내, 들 이름은 대부분 순우리말이었습니다. 그러던 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상당수가 한자어로 바뀌었습니다. '배내'라는 냇물 이름도 배 리(梨) + 내 천(川) → 이천(梨川)으로 바뀌었고, 마을 이름도 이천리가 돼 버렸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배내'라는 이름이 아주 사라지지 않고 산골 마을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는 게 너무나 반갑고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배내" 하고 읊어 봅니다. 나오는 소리도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그 소리를 내는 입술 언저리도 활짝 웃는 모습이 되니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배꽃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과수원 옆으로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흘러가는 풍경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이천" 하고 읊어 봅니다. 나오는 소리도 격하지만, 입 모양도 사납게 보이면서 이빨까지 드러납니다. 배꽃과 시내가 어우러지는 풍경은, 당연히 떠오르지 않습니다.(아내 고향이 또 다른 이천(利川), 경기도 이천인데, 이 글을 읽으면 입 모양이 사나워질 것 같습니다.) 시내 이름에서 시작된 배내는 배내큰마을, 배내고개, 배내봉처럼 이 일대에 널리 스며들었습니다.
몸과 마음 흔들리며 산행 시작언제나 그렇듯이 고갯마루에서 시작하는 종주 산행은 초기 20~30분 정도 경사가 급한 된비알을 올라가느라 턱까지 올라오는 거친 숨을 몰아쉬어야 할 만큼 힘이 듭니다. 종이 "땡" 울리자마자 상대 선수에게 좌우 스트레이트와 어퍼컷 몇 대를 연속으로 두들겨 맞고 몸이 비틀거리고 멘틀이 흔들리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권투 시합 같다고나 할까요. 배내고개에서 배내봉에 오르는 길도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추운 겨울이지만 땀방울이 송송 솟아난 뒤에야 첫 번째 봉우리 배내봉에 오릅니다.
배내봉에 서니 서쪽으로는 재약산과 천황산이 여자 가슴처럼 나란히 봉긋합니다. 두 봉우리 사이가 멀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재약산이란 이름 아래 수미봉과 사자봉으로 불렀다는데, 천황을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때 사자봉에 천황산이라는 이름을 따로 붙였고 그게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합니다. 해방 후 60년이 훌쩍 넘었어도 아직까지 친일파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듯이 일제 잔재는 곳곳에 버젓하게 남아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영남알프스 최고봉 가지산이 고개를 내밀고 기웃거립니다. 큰 산들과 눈인사를 마친 다음 간월산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1천m 안팎의 뾰족한 봉우리를 곳곳에 세운 낙동정맥이 영남알프스의 뼈대를 이루며 거대한 용처럼 꿈틀꿈틀 남쪽으로 움직입니다.
봉우리를 하나 넘으면 고갯마루가 하나씩 나옵니다. 배내봉을 지나서 내려가면 '선짐이질등'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고개가 나옵니다. 기울어진 안내판에는 배내골 아낙들이 산줄기 반대편에 있는 언양장을 보러 갈 때 넘던 고개라 합니다. "등짐을 진 채 서서 쉰다"는 뜻이고요. 안내판 문구는 어떤 시인이 쓴 것인지 다분히 시적인 느낌이 듭니다. 여느 안내판의 딱딱하고 서술적인 표현과는 좀 다른 분위기가 풍겨 납니다.
삶도 인생도 고개를 넘는 일선짐이질등을 지나 간월산에 오릅니다. 달을 보기에 좋은 곳이어서 '看月山'인 줄 알았더니 '肝月山'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실제로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는 '看月山'으로 나와 있습니다.) 간월산 정상에서 주위를 휘~ 둘러보고 간월재로 내려옵니다. 간월재가 나타나는 순간, 눈의 동공이 급격히 확장되고 입은 반쯤 벌어지면서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신불산 억새평원이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산 저 산 억새로 이름을 날리는 산도 많고 또 다녀보기도 했지만 엄지가 척, 올라갈 만큼 신불산 억새평원이 단연 최고입니다.
탄성이 쏟아지는 신불산 억새평원억새밭은 가을의 서정을 떠오르게 하는 풍경입니다. 겨울에 다가가는 11월쯤 절정을 이루지만 이삭이 대부분 떨어진 지금도 낭만적인 풍경을 맛은 볼 수 있습니다. 눈이 오는 겨울밤, 소복소복 쌓이는 눈 때문에 조용함이 몸서리치도록 더욱 조용해지듯,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밭은 가을날의 쓸쓸함을 몸서리치도록 더욱 쓸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로움을 더 처절하게 느끼려고 억새밭을 찾는지도 모릅니다.
억새는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 우리와 더욱 가까이 있었습니다. 나물은 물론이고, '송기'라 불리는 소나무의 하얀 껍질, 새로 돋아나는 찔레나무 순, 잔디 비슷하게 생긴 '삐비'라는 풀 등등...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은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모두 모아 고픈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나물이 지천인 4월이 오면 산자락이나 논두렁에 억새도 푸른 싹을 내밀며 뾰족하게 올라옵니다. 이 억새 새싹에서 마치 벼이삭 나오듯 줄기 사이에 숨어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이삭은 할머니, 어머니의 훌륭한 간식거리였습니다.
줄기 사이에 있는 하얀 속살은 마치 솜처럼 부드러웠습니다. 떼어서 입에 넣으면 달짝지근한 맛이 옛날로서는 별미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솜사탕에 해당하는 군것질거리라고나 할까요. 아니, 군것질이라기보다는 배가 고프니까 그거라도 따서 먹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아직 줄기 사이에 숨어 있어 연할 때 먹어야지, 겉으로 나오면 쇠어서 먹지 못하게 됩니다. 어려운 시절을 지나왔습니다.
논이 없어 볏짚을 구할 수 없었던 두메산골에서는 억새를 베어다가 초가지붕을 잇기도 했습니다. 논이 없는 산촌에도 억새는 지천에 흔했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뒤 한가한 늦가을에 날을 잡아 반나절만 산을 헤집으면 지게 위로 높이 쌓아 올릴 만큼 억새를 베어 올 수 있었습니다. 억새는 볏짚 못지않게 보온 효과도 좋아 두껍게 엮어 지붕에 얹으면 겨울엔 따뜻했고 여름엔 시원했습니다.
보급품이 지금만큼 좋지 않았던 시절 군대에서는 동계훈련을 나가기 전에 군인들이 산에 올라가 억새를 베어 왔습니다. 베어 온 억새를 두껍게 엮어서 깔판을 만들어 훈련 나갈 때 함께 갖고 갔습니다.(저는 포병부대에서 근무했는데 포를 끌고 다니는 포차가 있어서 그게 가능했습니다.) 그 깔판은 밤에 텐트 속에서 잘 때 땅 위에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 담요 순으로 깔면 땅에서 올라오는 혹독한 냉기를 상당 부분 막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몇 번 깔았다 걷었다 하는 사이에 바짝 마른 억새는 뚝뚝 끊기고 꺾기고 하여 1주일 동안 훈련을 나갔다가 부대로 돌아오면 용도가 폐기되는 1회용일 뿐이었습니다.
간월재를 지나 신불산에 오르면서도 "한 번 더" 하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억새밭의 잔상이 눈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 아쉬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산행 중 만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신불산(1159m)에 오른 뒤에도 그 다음 봉우리인 영축산 쪽으로 펼쳐지는 또 다른 억새밭을 싫증이 날 때까지 볼 수 있으니까요.
신불산에서 만나는 전쟁의 상처바삐 걷느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신불산 일대에는 '단조성'이라 불리는 성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단조성이 왜군에게 함락당하며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전합니다. 한국전쟁 때는 '남도부'를 대장으로 하는 빨치산 부대가 낙동정맥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들은 신불산에 아지트를 두고는 배냇골 일대와 낙동정맥 동쪽인 울주군 일대에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일대는 낮에는 대한민국이 됐다가,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인민공화국으로 바뀌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봉우리에 서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아스라하긴 하지만 부산이 보일 만큼 부산과 가까운 곳입니다. 인원도 많지 않아 100명 남짓한 규모의 빨치산 부대가 임시 수도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후방 교란 작전을 벌였다는 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만큼 철저하게 이념으로 무장하였고, 지독한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탁월한 생존 능력을 지녔던 것일까요. 신불산 아래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잠시 상념에 잠겨 봅니다.
신불산에서 신불재를 지나 영축산에 오른 다음에는 내리막길로 접어들며 오늘 산행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오늘도 제 삶을 바꿀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결심 6 / 누구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제게는 "욱" 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까지는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화를 내곤 했었습니다. 지금은 그 습관이 많이 고쳐졌는데, 이제는 누구에게도 아예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아내에게도(아내가 제게 화를 내는 건 몰라도), 친구에게도, 부하직원에게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또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누구도 제가 내는 화를 받으려고 세상에 나온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낼 자격이 있는지, 화를 내면 상황이 더 좋아지는 건지 잘 모릅니다. 어쨌든 저는 누구에게 화를 내지도 않고 누구처럼 '레이저 광선'도 쏘지 않고 그저 '차카게' 살아갈 작정입니다. 저를 품어 주는 산처럼 말이지요.
♤ 낙동정맥 6구간 종주
날짜 / 2017년 1월 21일 (토)
위치 / 울산광역시 울주군, 경상남도 양산시
날씨 / 구름이 많아졌다 적어지고… 대체로 맑음(산행 시간대의 울산 기온은 1~3도, 그런데 1천m 안팎의 산에 올랐으니 6도 정도는 더 낮았을 듯)
산행 거리 / 15.2㎞
소요 시간 / 5시간 20분
산행 코스(남진) / 배내고개 → 배내봉 → 954봉 → 간월산 → 규화목 → 간월재 → 신불산 → 신불재 → 영축산 → 취서산장 → 골드그린골프장 옆 → 산행 날머리 → 고래논 방터들 안내판 → 지경고개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