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벽에 창밖을 보니 어젯밤 동쪽에서 보았던 달이 서산 위에 있습니다.
오늘은 정월대보름(2월 11일)입니다. 하지만 저 달은 지고, 오늘 저녁에 동쪽 하늘에서 만나는 달이 대보름달입니다.
헤이리 주민들은 어젯밤, 미리 오곡밥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로부터 상원절식의 오곡밥은 정월 열 나흗날 저녁에 먹는 것입니다. 보름날 새벽에 부럼을 까고 귀밝이술을 마셨습니다.
오곡밥은 흰쌀, 검은 쌀, 검은콩, 붉은 팥, 수수, 차조 등 여섯 가지를 넣어지었습니다. 오곡밥은 이웃과 나누어 먹어야 좋다고 했으니 어제 동네 이웃들 수십 명이 함께 먹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습니다.
여러 재료가 들어간 이 오곡밥은 익는 정도가 달라 생각보다 밥짓기기 수월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헤이리의 며느리를 자처하시는 유해분 선생님은 수십인분의 오곡밥도 실패 없이 지어냅니다. 큰 압력솥에 쪄내는 방식으로요. 적당히 간이 맞는 밥맛만으로도 모두들 고봉밥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8가지의 진채식 나물들은 사흘전에 멀리 큰 시장을 방문해 준비한 재료들입니다. 가지, 박고지, 무시래기, 민들레, 부지깽이, 취나물, 고구마줄기, 망초대나물(담배나물) 둥, 이 중에는 박고지는 지난 여름 내내 코지하우스의 정원에서 볕을 받은 나물입니다.
보름에는 생채나물대신 모두 묵나물을 사용합니다. 생체를 말리거나 삶아서 햇볕에 말려 둔 것을 삶거나 볶아 조리해냅니다. 유해분 선생은 파주에서 나고 자란 분이라 조리와 양념에도 파주 지역색이 반영될 수 에 없습니다.
고기 한 점 없어도 오곡밥에 묵나물, 시래깃국만의 밥상이 이렇게 맛있고 개운할 수 없다며 모두들 두어 번 접시를 비우는 모습을 바라보는 안현정, 나진영 선생의 얼굴이 유난히 밝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도예를 하시는 이 두 분은 마을 분들을 모시는 이 일들에 가장 앞장섰던 분입니다. 특히 결혼 이태밖에 안 된 나진영 새댁은 이런 마을의 공동일을 전통으로 이어가야 할 차세대입니다.
#2
올해 팔순을 넘긴 안상규 화백님이 부럼으로 준비한 밤을 이빨로 '오도독' 깬 것을 지켜보신 이명희 여사님이 말했습니다.
"아이고, 그것을 어떻게 이빨로 깰 수 있어요? 참 이도 든든하시네."
그 말을 들은 여든넷의 전 명현 어른께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죽는 사람이 형님이야." 어젯밤, 형님의 정의가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전명현 어르신은 여전히 건강하심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앞에서 5년 뒤, 10년 뒤를 얘기하면 참 우서워요. 80년을 넘게 살아보니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더라고요. 그러니 욕심낼 필요가 없어요." 전 명현 어른은 헤이리의 까다로운 생태건축 기준을 꼼꼼하게 챙기시는 건축과 명예교수로 헤이리의 건축 전에 충족해야 할 숱한 조건들을 살피는 건축환경위원장으로 여전히 봉사 중입니다.
안재영 선생이 따라준 귀밝이술을 한잔 받은 이명희 선생님이 잔을 받아놓고 말했습니다.
"예전에 이 막걸리를 우리는 '화랑이 술'이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달달해서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취하는 줄도 모르는 무서운 술이라는 뜻일 거예요. 제가 국민학교 때 '화랑이 술'이라는 제목으로 웅변대회에 나갔던 것이 생각나네요. 그 당시 집집마다 누룩으로 막걸리를 만들어 농주로 마셨습니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가난한 나라 살림을 충당할 세수를 위해 그것을 엄하게 단속했어요. 무시로 밀주단속반원들이 나와서 집의 이곳저곳을 긴 작대기로 찔러보곤 했지요. 걸리면 큰돈의 범칙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아마 제가 했던 웅변은 밀주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세무서가 주도한 웅변대회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대보름날은 아주 신나는 날이었습니다. 동네 청년들은 마을 동쪽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생솔가지를 쌓아 달집을 만들고 달이 떠오를 때에 불을 붙였습니다. 낮에 음식준비와 손님맞이로 바빴던 부녀자들도 모두 달집에 모여 비손을 하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안 화백님이 천천히 깨물어 쪼갠 밤을 씹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볏짚으로 거북이 등을 만들었어요. 두 사람이 들어가서 앞사람은 머리를 내밀고 뒷사람은 나뭇가지를 볏짚 밖으로 내어 거북이 꼬리가 되었지요. 그렇게 마을을 집집이 돌면서 음식을 거두었어요. 이 날은 세 집 이상의 남의 집 밥을 먹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당산제나 지신밟기 등 마을은 이런 공동의 제의나 놀이를 통해 공동체로서의 끈끈한 유대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각자의 삶을 예술이라는 공동 주제로 살아내기 위해 각처에서 모인 예술마을 헤이리. 마을만들기를 시작한 것이 올해로 20년입니다. 여전히 모자라는 것은 세월입니다. 100년이 흐르고 500년이 흘렀을 때의 삶의 풍경을 생각해보면 오늘 대보름날의 헤이리 오곡밥나누기가 그저 밥 한 끼의 허기를 해결하는 일이 아님이 곡진해집니다.
오늘 복쌈 드셨나요? 올해도 풍요와 안녕을 빕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