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귀농한 지 15년째다. 2002년 봄, 자발적 하방을 결행했다. 서울의 도시 난민에서 농촌의 마을시민으로 살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뒤돌아보면 지난 귀농 15년의 여로는 내내 아쉬운 우여곡절과 안타까운 시행착오의 파노라마였다. 흐릿하고 아득한 험로였다. 겨우 복원한 기억과 기록이 8권의 책으로 남았다. <오래된 미래마을>, <마을시민으로 사는 법>, <마을을 먹여 살리는 마을기업>, <사람 사는 대안마을>, <농부의 나라>, <농촌마을공동체를 살리는 100가지 방법>, <행복사회 유럽>, <마을주의자> 등이다.
나는 남녘의 고도, 예향 진주에서 1963년 가을에 태어났다. 700만 베이비부머의 말석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일곱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려는 아버지를 따라 유년에 상경했다. 고향의 기억이 있을 리 없지만 그곳이 고향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늘 고향이 그리웠다. 서울에서 성장하고 서울에서 공부하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서울에서 가정을 꾸렸다. 말단 은행원, 군소언론 기자, 소호벤처 경영자로 고단한 밥벌이를 했다.
하지만 '먹고 살려고 꾸역꾸역 모여든 지방난민들'이 다투듯 살아가는 난민촌 서울특별시는 고향이나 정처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도 일은 삶과 하나가 되지 않았다. 쉼과 놀이를 즐길 여유는 분수 넘치는 사치였다. 일과 삶과 놀이가 하나 될 수 없는 도시생활의 구조악과 늘 싸움을 했다. 홀로 맞서느라 마음과 몸은 늘 지치고 힘겨웠다. 한낱 개인으로서 역부족이었고 계속 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술을 많이 마셨다.
마흔에 이르자 제정신이 들었다. 도시에서는 더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는 냉정한 자가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마을로 자발적 유배를 떠났다. 도시난민에서 귀농인 또는 마을시민으로 전향을 시도한 것이다.
농업회사 농장관리자, 유령작가, 생태마을 막일꾼, 농촌·귀농 컨설턴트, 마을연구원, 마을선생 행세를 하고 제멋대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능히 먹고 살 수 있는 일터, 일과 삶과 놀이가 하나 되는 사람 사는 마을'를 찾아 이사만 12번 했을 정도다. 그동안 내 앞가림도 못 하는 귀농인에서 내 입장만 생각하는 마을시민으로, 나아가 남의 처지도 걱정하는 마을주의자로 점점 진화한 느낌이다. 착각일 수도 있다.
오늘날 무주 초리넝쿨마을에서 비인가 '마을연구소(Commune Lab)'의 소장이자 급사, 무허가 '마을살이 공동체학교'의 교장이자 소사 노릇을 자처하고 있다. 사회적경제의 힘으로 지속가능하게 진화하는 마을공동체와 농촌사회의 모델을 탐구하고 개발하려 애를 쓰고 있다. 한마디로 '마을에서 먹고 사는 법'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돈도 되지 않고 폼도 나지 않는 일이다. 다만 최소한 스스로 부끄럽거나 남을 괴롭히거나 세상에 죄를 짓지는 않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게 아니라도 이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결정한 일이고 내가 책임질 일이다.
<오래된 미래마을>에서 <마을시민으로 사는 법>을 귀농한 첫 농촌마을은 진안의 산골마을이었다. 무주, 진안, 장수가 서로 만나는 곳이어서 '무진장 지역공동체 네트워크'를 꾸려보려는 야심 찬 사업계획을 세웠다. 일과 삶이 하나되는 생태공동체마을을 염원하던 아홉 사람이 의기투합해 공동 귀농을 한 것이다.
사업기획자, 도시디자이너, 농촌계획가, 환경연구원, 웹프로그래머, 출판편집자, 대안교육자 등 인적 구성이 다채로웠다. 이만하면 각자 도시의 학교와 회사에서 갈고 닦은 이런 특기와 경험을 살려 마을공동체와 지역사회의 재생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일은 마음 먹은 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면서 마을이 낯설고 마을사람들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왜 마을에 내려왔는지" 이유와 목적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마을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할 준비가 너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마을과 지역사회도 느닷없이 마을로 쳐들어온 도시난민들을 받아줄 준비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우리 아홉 사람 모두 서로를 돌보고 보살필 역량과 품성이 모자랐다. 3개월여 만에 매월 30만 원씩 나누던 생활비가 바닥나자 선택의 여지마저 사라졌다. '생태공동체마을 건설 패거리 풀씨네'라는 이름의 공동귀농연습단은 예정된 실패를 깨끗이 인정하고 해산했다. 첫 책 <오래된 미래마을>에 그때, 그 마을에서 겪고 느낀 일상과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공동귀농 실패로 낙담은 했으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새로, 다시 시작했다. 대열에서 흩어져 혼자 지리산 자락의 산골마을을 찾아 깃들었다. '고향이 가까울 것, 지리산 자락일 것'. 평소 정해둔 귀농 적지를 결정하는 2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산청의 웅석봉 아랫마을이었다. 보증금 없이 월세 5만 원에 1백 년이 넘었다는 빈 농가를 구했다. 시가 10억 원의 행복감을 주는 생태적인 집이었다. 그래서 당호를 '십억재'로 명명했다. 하지만 농사지을 땅, 농사짓는 기술 등 먹고 살 준비는 여전히 되지 않은 불안한 상태였다.
그런데 지리산 자락에서는 '도시 월급쟁이 특기자'가 먹고살만 한 일거리를 찾기 어려웠다. 배후도시 진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먹고는 살겠지'라는 근거없는 낙관론이 흔들려 몹시 당황했다. 길거리 생활정보지에는 생활정보가 드물었다. 인터넷을 뒤져 겨우 서울에서 남의 글과 책을 대신 써주는 '유령작가' 일을 찾았다.
하지만 "더도 덜도 말고 한달에 100만 원만, 아니 50만 원만 벌었으면…" 하는 소박한 욕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무명작가, 또는 유령작가로서 글 쓰고 책 짓는 일은 안정된 수입을 보장하지 않았다. 대필노동의 단가를 높여보려 지방문예지의 하류시인으로 등단하는 무리수까지 두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농사를 짓든, 농사를 짓지 않든 귀농해서 먹고 사는 일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때 볕이 잘 드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심각하고 절박하게 궁리하고 연구했다. '농사를 짓지 않고도 마을에서 먹고 살 수 있는 방법', 이른바 <마을시민으로 사는 법>을. 결국 이런 결론에 다다랐다.
"농사짓는 농부만 사는 곳은 농촌이나 마을이 아니고 농장의 꼴이 아닌가. 모름이지 농촌이 마을이려면 농부의 육신이 다치거나 아프면 고쳐줄 마을의사도 있어야 하고, 농부의 마음이 힘들면 치유해줄 마을성직자도 있어야 한다. 농부가 아이를 낳으면 공부와 기술을 가르치는 마을선생도 있어야 한다. 먹고 살아야 하니 경제, 문화, 교육, 생태 분야 등 다종다양한 업종과 직종의 '마을월급쟁이'와 '마을자영업자'들도 공생해야 마을이다. 그래야 비로소 농촌은 마을공동체라 할 수 있고, 마침내 삶과 일과 놀이가 하나 되는 우주 같은 대동사회가 될 것 아니겠는가. 안 그런가."
<마을을 먹여살리는 마을기업>의 '마을회사원'으로 이렇게 '마을시민으로 사는 법'을 필생의 화두처럼 붙잡고 매달리던 어느날 칠곡의 어느 매실농장이 떠올랐다. 귀농준비를 하면 훗날 찾아가보리라 기억해두고 있었다. "어차피 농사 지을 땅도 기술도 없는 처지로 혼자 힘으로 농부가 될 수는 없으니 일단 농사를 제대로 배워보자. 그러자면 농장을 운영하는 농업회사에 '마을회사원'으로 취직을 해서 일도 하고 월급도 받으면서 농사도 배워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농장주에게 연락하자 기다렸다는듯 반겨주었다. '일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왜관 낙동강변 2만여 평의 농장에서 매실 농사를 짓고 가공도 하는 농업회사법인 주식회사였다. 기획, 관리, 마케팅 등의 업무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12년여 중소기업, 벤처기업 전문가로 일한 입장에서 볼 때 미비하고 부족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수십억 원을 투자해 번듯한 식품가공라인까지 갖추고 선도적 6차산업화 농업벤처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내실은 농촌의 농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본적인 회사 꼴을 갖추는 게 급선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농촌에서는 마케팅, 식품가공, 농장관리, 회계 등 적재적소의 인력을 구하기 어려웠다. 일을 할만한 인재는 모두 도시로 떠나 농촌에 남아있지 않았다. 농장과 마을공동체사업에 필요한 '마을시민'들을 찾기 위해 인터넷 귀농커뮤니티를 헤맸다. 귀농인들이 희망이자 대안이었다. "우리 농장은 아니지만 우리 농장처럼, 우리 마을처럼 마을공동체사업을 함께 하고, 그 보람과 성과를 함께 나누자"고 호소하고 유인했다.
하지만 인재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수개월의 탐색과 수소문 끝에 삼성그룹의 마케팅전문가, 다국적 식품회사의 식품공학 전문가, 회계사무소 출신 경리, 농장관리자 등 10여 명의 귀농인, 또는 마을시민들로 농업회사법인의 업무조직을 가까스로 갖췄다. 그러자, 농촌의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 매실농장에서 '마을기업'이란 말을 처음 지어냈다. 마침 사회적기업육성법이 시행된 무렵이라 '농촌형 사회적기업'이란 뜻의 '마을기업' 모델을 그 현장에서 실천해보려고 했다. 농부는 물론 기획, 마케팅, 회계, 식품가공 등 다양한 특기와 경험을 가진 '마을시민'들이 모여 '마을공동체사업을 역량있게 꾸려가는 사업의 책임주체'를 '마을기업'이라 정의내린 것이다.
훗날 행자부에서 '마을기업 육성사업'으로 빌려쓰면서 '마을기업'이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일자리와 소득을 창출하는 목적으로 '마을기업'의 의미와 가치가 자꾸 협소해지는 아쉬움이 있다. '마을기업'의 본뜻, 참뜻은 책 제목 그대로 <마을을 먹여살리는 마을기업>으로서 '마을공동체사업의 책임주체'라야 하는 것이다.
<사람 사는 대안마을>에서 '마을주의자'로 그리고 농장을 떠나 '마을시민'들이 모여 '마을기업'을 중심으로 '일과 삶이 하나되는 마을공동체'를 꾸려가는 <사람 사는 대안마을>을 찾아 나섰다. 마을컨설턴트, 마을연구원 노릇을 '생업이자 생활'로 삼으면서 자연스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의 마을을 넘나들었다. '사람 사는 세상'의 맹아와 단초나마 발견해보려는 조바심에 집보다 길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던 시절이다.
그러면서 깨달은 진리가 있다. 마을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사실. 마을은 외부인의 구경거리나 체험거리 삼아 농촌관광지나 생태공원을 만드는 토건사업의 칼을 대면 안 된다는 각성. 마을은 그저 원주민이 생활하는 삶의 터전이자 대대손손 후손에게 고이 물려줘야할 마을사람 모두의 공유자산이라는 교훈. 그래서 '마을 만들기'가 아니라 '마을 살리기' 또는 '마을 살이'를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자면 행정 공무원, 토건 기술자가 주도하고 결정하는 '마을 만들기' 방법론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마을이 품고 있는 사회적이고, 인문적이고, 문화적인 요소와 자원들을 융·복합적으로 결합해 마치 종합예술 작품처럼 승화시켜야 한다. 이때 '잘 훈련된 마을시민'과 '잘 조직된 마을기업'이 당연히 준비되어야 한다.
아니면 마을공동체사업에 섣불리 나서면 안 된다. 틀림없이 낭패를 보고 실패한다. '사람 사는 대안마을'은 고사하고 마을사람들이 서로 상처와 손해를 주고받으면서 마을공동체의 뿌리마저 송두리 째 뽑히고 만다. 마을이 사라질 수도 있다.
이렇게 10여년 동안 '마을'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원칙과 방법론을 정립했다. 농사짓는 낫과 호미가 아니라 도시에서 저마다 익힌 경험, 기술 등 생활의 농기구를 써서 농촌에서 먹고 살 수 있는 '마을시민', 마을공동체의 예측가능한 경영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책임지는 사업주체로서 '마을기업', 외부인의 구경거리로서 '마을만들기'가 아니라, 원주민·귀농인 등 내부인의 생활의 질을 높이려는 '마을살리기 또는 마을살이'를 하는 '대안마을'이라야 이른바 '세 마을 법칙'이다.
이때 '마을시민'들이 '마을기업'으로 '사람 사는 대안마을'을 만들려면 마을지도자가 가장 중요하다. 남보다 먼저, 더 희생하고 헌신할 각오가 서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말이나 생각보다 행동으로 이웃을 배려하고 타인에게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경지에 오른 사람을 '마을주의자'로 부르고자 한다.
<마을주의자>가 되려면 국가나 정부의 구조악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심신이 강해야 할 것이다. 마을 속으로 들어가, 마을사람들과 더불어 사람사는 마을을 건설하고 경영하는 길이 상책이자 정도라고 확신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진보적이고 정의롭고 창조적이며 이타적인 고귀한 품성과 역량을 갖춘 마을사람이다. 어렵지만, 누구나 '마을주의자'가 될 수 있다.
<농촌마을공동체를 살리는 100가지 방법>으로 <농부의 나라>를 그렇게 '마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동안 '마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때도 없지 않았다. '마을에서 살아가기'가 '마을공동체를 함께 하기'가 너무 어렵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마을'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나 있는건지 자꾸 자문했다. '마을은 이런 것이다'라는 자신있는 대답을 듣기 어려웠다. 그래서 마을에서 잘 살기 위해서 마을을 더 잘 알아야겠다는 반성을 했다. 그리고 마을을 더 잘 알려면 국가와 사회부터 다시,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자책이 들었다.
서울로 올라와 국회에서 농업·농민·농촌을 연구하는 정책연구위원 일을 1년여 맡았다. 돌아가는 나라안팎의 농정과 정세를 모르고 마을의 현실과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때의 공부와 연구의 성과물로 정책적 대안의 총론격인 <농부의 나라>와 각론격인 <농촌마을공동체를 살리는 100가지 방법>을 책으로 펴냈다. 우선 "사회적 농민을 키우자"고 주장했다. 농사 짓는 농민이 먼저, 농사 짓지 않는 타인과 공동체를 더불어 생각하는 사회적 농민이 되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또 "사회경제적 농업을 살리자"고 제안했다. 다국적 농기업, 대농에 맞서려면 협동과 연대의 사회적 힘을 바탕으로 중소농, 가족농이 농업공동경영체로 뭉쳐야 살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사회생태적 농촌을 지키자"고 거듭 강조했다. 관광지화, 공원화의 토건적, 상업적 마을만들기의 미신적 주술에서 어서 깨어나 '사람 사는 농촌'을 재생하자고 당부했다.
이렇게 '생활기본소득이 보장되는 농업'을 통한 경제공동체마을, '일상생활이 행복한 농민'을 통한 생활공동체마을, 그리고 '농촌 다운 농촌'을 통한 생태공동체마을이 우리 농촌공동체가 가야 할 정도이자 정석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야 비로소 농민이, 마을 원주민이, 귀농인이 모두 마을공동체와 지역사회의 주체이자 민주시민으로 마음껏 주권과 행복권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고작 5%의 존재감, 자존감도 남아있지 않는 우리 농민들은 나머지 95%의 노동자, 도시민, 국민들과 협동하고 연대하는 '협동연대 대안국민농정'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모두가 조금씩 농부인, '돈 버는 농업' 이 아닌 '사람 사는 농촌'이 농정의 목표인 독일, 오스트리아 등 <행복사회 유럽> 같은 <농부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마을당 문고>를 한상 차린 후, '무위의 마을'로앞으로도 계속 마을을 걱정하고 연구하면서 마을에서 '마을시민'으로, '마을주의자'를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무엇보다 살고 있는 초리넝쿨마을에서는 마을주민들, 그리고 마을을 찾는 지역주민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준비하고 있다. 마을카페, 마을학교, 마을방앗간을 함께 꾸려보려 한다. 가령 한달에 1만 원의 회비를 내는 조합원 1천명만 모을 수 있다면, 그러니까 2만여 무주군민의 5% 정도만 조합원이 될 수 있다면 살림을 능히 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마을주민들이 협동해서 마을공동체사업으로 모은 공동소득으로 번듯한 마을양로원을 세우고 싶다. 평생 살던 마을에서 편안하게 여생을 마칠 수 있는 최소한의 생존권과 행복권을 지키고 싶다. 그리고 마을 농가마다 단 몇십만 원씩이라도 매달 기본소득 월급을 나눠가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초리넝쿨마을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농촌관광 명소가 아니라, 그저 마을 주민들이 더불어,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는 생활공동체마을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마을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기억과 기록을 책으로 몇 권 더 펴내고 싶다. 독일, 옥스트리아 등 EU의 행복한 농부들 이야기 <독일의 농부>, 산문집 <마을이란 무엇인가>, 시집 <詩는 졌다>는 이미 원고는 지어놓았다. 돈이 되지 않는 '마을 이야기' 책을 기꺼이 떠맡는 착한 출판사들에게 미안해 염치 없이 내밀기가 미안하고 조심스러울 따름이다.
나아가 마을학교의 교재로 사용할 <마을학 개론>, 국가의 대안을 마을에서 찾는 <마을과 국가-마을공화국>, 농촌사회학 박사논문을 풀어 쓸 <사회적 마을>, 자전적 단편소설집 <마을주의자>를 더 짓고 책으로 묶겠다는 욕심이다. 이른바 마을을 알고 싶은 이들을 위해, 마을로 내려갈 마음을 먹고있는 이들을 위해<마을당문고-Commune Books>를 한상 잘 차려놓고 싶다. 감히 교과서나 지침서는 못 될지언정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반면교사 정도로는 쓸 모가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는, 더 이상 아무 짓도 안 하고 싶다. '무위의 마을'로 13번째 이사를 감행하고 싶다. 최소한 기소불욕이면 물시어인이라도 싶다. 반드시 정신노동은 그만 하고 싶다. 머리 말고 가슴과 손발로만 먹고 살고 싶다. 그냥, 산과 물은 맑고, 하늘과 들은 밝고, 바람과 사람은 드문, 작고 낮고 느린 어느 마을의 마을사람이고 싶다.
그 아무 것도 아닌 마을에서, 아무 것도 아닌 마을사람으로 겨우 살아가다 깨끗하게 죽고 싶다. 묘비같은 흔적도 추모도 바라지 않는다. 마치 나무나 풀, 돌이나 흙, 비와 바람 같은 자연과 우주가 당연히 그런 것처럼.
덧붙이는 글 | ▶ '귀농의 대전환' : <다음스토리펀딩-마을로 내려가자, 마을이되자 & 마을에서 먹고 사는 방법>을 재구성한 것으로, "귀농 또는 자발적 하방을 결행, 농사를 짓든 농사를 짓지 않든, 마을과 지역공동체의 당당한 구성원인 ‘마을시민’과 ‘마을주의자’로서, 예측가능하고 지속가능하며,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협동과 연대의 공동체 생활과 사회적경제의 생업’을 능히 꾸려갈 수 있는 ‘귀농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주장하고 제안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