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시 시전동 708번지에 '선소 유적'이 있다. 선소는 요즘말로 조선소, 즉 배를 만드는 곳이다. 선소 입구에 닿으면 <충무공 이순신과 여수>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마중을 해준다. 안내문을 읽어 보니 여수 사람들의 자부심이 넘쳐흐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에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로 이곳 여수에 부임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전라 좌수영의 본영이었던 여수는 거북선을 처음으로 출정시킨 곳인데, 1593년(선조 26) 8월부터 1601년(선조 34) 3월까지 삼도 수군 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했다. (중략)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다"라는 이순신의 글을 되새기게 하는 이곳 여수는 임진왜란 때 위태로운 나라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안내문의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로 이곳 여수에 부임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라는 대목을 꼼꼼하게 생각해 본다. 이순신은 여수에 오기 전에는 어디에서, 어떤 직책을 맡아 일했을까?
전라 좌수사가 되기까지 이순신의 벼슬 경력
이순신은 1545년(인종 1) 음력 3월 8일(양력 4월 2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28세이던 1572년(선조 5) 8월 무과에 처음 응시하지만 말에서 떨어져 낙방한다. 이순신은 그 후 4년 동안 부지런히 무예를 연마하여 32세(1576년 1월)에 드디어 합격한다. 그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으로 발령을 받아 국경에서 근무한다.
35세(1579년) 때 충남 서산 해미 읍성에서 충청 병영 군관으로 약 10개월 동안 근무하는 등 주로 육군 생활을 하던 이순신은 44세(1589년)에 정읍 현감(종6품)이 된다. 그 후 1590년 7월 이순신은 함경도 고사리진 첨사(종3품)로 크게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다. 우의정 류성룡이 선조에게 적극 추천하여 이루어진 호기였는데, 지나친 승진이라는 여론에 밀려 실제 부임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이순신은 한 달 뒤인 8월에 또 다시 압록강 하구의 평안도 만포진 첨사로 임명된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부임하지 못한다. 사유는 고사리진 첨사로 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류성룡의 추천으로 파격 승진 기회 얻지만
1591년 2월, 이순신은 진도 군수(종4품) 발령을 받는다. 군수는 종3품인 첨사보다는 한 등급 아래이지만 종6품인 현감보다는 두 등급 높은 직책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번에도 임지에 가지 못한다. 고사리진 첨사와 만포진 첨사로 부임하지 못한 때처럼 조정의 반대 여론이 드셌기 때문이 아니다. 진도로 가기도 전에 가리포진(전남 완도) 첨사로 일하라는 새로운 인사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 무렵 조정은 전라 좌수사 자리를 놓고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조정의 이해할 수 없는 인사는 1월 29일에 원균이 전라 좌수사로 임명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며칠 뒤인 2월 4일에 사간원이 이의를 제기한다.
<선조실록> 당일 기사에 따르면 사간원은 '전라 좌수사 원균은 전에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근무 평가에서 나쁜 점수를 얻었는데 겨우 반 년만에 좌수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격려와 징계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근무 평가의 의의를 망가뜨리는 조치라는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원균에게 다른 벼슬을 주고 전라 좌수사에는 젊고 군사적 지혜가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라고 선조에게 요구한다. 선조는 '그렇게 하라'고 대답한다.
전라 좌수사가 될 뻔했던 원균원균에 이어 유극량이 전라 좌수사로 임명된다. 이번에는 사헌부가 이의를 제기한다. 2월 8일 사헌부는 '전라 좌수영은 직접 적과 마주치는 지역이기 때문에 방어가 매우 긴요한 곳입니다. 따라서 수사는 잘 가려서 보내야 합니다. 유극량은 인물은 쓸 만하나 (중략) 지나치게 겸손한 나머지 부하 장수들은 물론 무뢰배들과도 "너, 나" 하고 지내어 체통이 문란하고 명령이 시행되지 않습니다.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면 대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꾸소서' 하고 요구한다. 선조는 이렇게 대답한다.
"수사는 이미 바꿨다."
왜적의 침입에 맞설 대장 중 한 명인 전라 좌수사 임명을 이토록 허술하게 진행할 만큼 당시 조선 조정은 '엉망'이었다.
엉망진창으로 진행된 임란 직전의 인사 발령새로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에 임명된다. 고위 관료들은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임명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선조가 2월 13일 '진도 군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제수하라.' 하고 결정을 내리자 사간원은 '(정읍)현감 이순신은 (진도 군수로 발령을 받아)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임명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모자라는 상황이라 해도 이렇게 지나친 승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순신에게는 다른 벼슬을 주소서' 하고 반대한다.
그런데 선조의 이순신 인정은 각별하다. 아니, 놀랍다. 선조는 '이순신을 지나치게 승진시켰다는 것은 나도 안다'면서 '다만 지금은 일반적인 인사 규칙에 메일 형편이 아니다. 인재가 모자라니 파격적인 승진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사람(이순신)이면 충분히 (좌수사의 임무를) 감당할 것이다. 벼슬의 높고 낮음을 따질 일이 아니다'라며 밀어붙인다.
선조의 이순신 발탁을 두고 '놀랍다'라고 한 것은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자의 내용 때문이다. 당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였다. 선조가 전쟁 중에 "나는 (해군 사령관)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라고 말한다. 놀라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이 나라 안의 핵심 대장을, 그것도 전쟁 중에 "나는 그 사람 잘 몰라"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선조 "수군통제사 이순신, 어떤 사람인지 나는 잘 모른다"선조는 다시 이순신이 "경성(한양) 사람인가?" 하고 묻는다. 류성룡이 "그렇습니다. 성종 때 사람 이거의 자손인데, 직책을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당초에 신이 조산 만호로 천거했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선조가 또 묻는다.
"글을 잘하는 사람인가?" 류성룡이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정읍 현감)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전라 좌수사)로 천거했습니다."
선조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이순신을 왜 파격 승진시켰을까선조는 이순신이 해군 사령관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고향도 모르고, 글을 잘하는지 여부도 모른다. 스스로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른다'라고 실토(?)한다. 그런 선조가 어째서 6년 전에는 현감에 불과한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엄청나게 승진시키는 일에 그토록 적극적이었을까? 그것도 '이순신은 좌수사의 임무를 잘 감당할 것'이라는 전폭적 믿음까지 내보이면서…….
아마도 선조는 이순신을 추천한 사람이 류성룡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을까? 두 사람의 대화 속에 그런 기미가 엿보인다. 류성룡이 먼저 '직책을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이순신을 조산 만호에 추천했었다고 말하고, 선조가 화답을 하듯이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것'이라면서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임명한다. 물론 그 사이에 류성룡이 선조에게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추천하는 과정이 있었고, 그때도 류성룡은 이순신이 수사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할 능력을 갖췄다고 아뢰었을 터이다.
선조는 "류성룡은 군자이다. 나는 그를 오늘날의 큰 현인이라 할 만하다고 여긴다.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으로 감동할 때가 많다.(<선조실록> 1585년 5월 28일자)"라고 공언한 바까지 있다. 그만큼 선조는 류성룡을 존경하듯이 믿었다. 그래서 선조는 그런 류성룡이 천거한 인물인 만큼 이순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막연한 신뢰를 가졌던 듯하다.
선조 "류성룡은 이 시대의 큰 현인"류성룡이 일개 현감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추천하고, 선조가 고위 관료들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 자리에 앉힌 것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복이었다. 그것도 전쟁 1년 2개월 전에 수사가 됨으로써 이순신은 수군에 대해,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에 대해, 천자총통 등 화포에 대해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새로 거북선을 만들 시간도 있었고, 바다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전술을 연구할 겨를도 있었다. 전라도 일대 바다의 특성과 해안의 지형도 숙지할 수 있었다.
또 1580년 7월부터 1582년 1월까지 약 18개월 동안 바닷가 수군 진지를 지휘하는 발포(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만호를 역임하여 수군 장수로서의 경험을 쌓은 것도 큰 자산이 되었다. 단 13척의 배로 적선 133척을 격파해낸 명량 대첩의 신화는 그 모든 것의 총화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