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5일, 그러니까 제58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출마했던 김보미가 정책간담회 때 커밍아웃을 한 2015년 11월 5일로부터 정확히 1년 후에, 나는 처음으로 공개적 커밍아웃을 했다.
수십 차례의 비공개 커밍아웃과 두 차례의 공개 커밍아웃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오늘 할 예정인 부모님에 대한 인생 마지막이 될 커밍아웃까지 전부 담아내어, 이 글을 통해 나는 왜 성적지향이라는 사적 영역의 문제를 공적인 영역으로 끌고 올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커밍아웃, 그리고 '인권' 중시한 새터 만들기
성적지향 등의 개인의 성적 특성을 밝히는 행위인 커밍아웃은 지극히 공적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규정짓고 그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은 자연히 커밍아웃에 반하는 방향으로 압력을 은연중에 가하게 되고, 거기에 순응한다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압력에 단호히 저항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 말이다. 사실 나의 커밍아웃은 굉장히 수월하게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내가 소속 공동체들에 확실한 소속감과 동료의식을 심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커밍아웃이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당사자의 사회적인 역량과 그 공동체가 쌓아온 커밍아웃에 대한 수용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나는 그 중 전자가 매우 탄탄했고 후자도 꽤 안정적인 공동체에 속해있던 경우다.
이대로 끝나면 흔한 커밍아웃 해피엔딩이겠지만, 벽장 속에 숨어살던 과거와 나 이외에 다른 퀴어(Queer: 본래 이상한, 색다른 등의 뜻을 가지는 단어였지만, 현재는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단어로 사용)들을 생각한 끝에 나는 더 나아가기로 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인 동시에, 인권의식이 타 단과대학보다 비교적 떨어진다고들 하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이곳이 '모든 구성원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존중과 권리가 보장되는 공간',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 '서로에 대한 배려와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어 나 이후의 다양한 소수자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배제되지 않는 안식처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준비와 노력, 실행이 필요했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공개 커밍아웃 이후에도 나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어야 했고, 단체의 차원에서는 함께 추진해나갈 학생회를 준비해야만 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2016년 11월 5일의 첫 공개 커밍아웃은 페이스북 친구 일부에게만 공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읽을 수 있는 인원의 절반 넘게 지지를 보내주었으며, 내가 참여해서 의견을 개진한 학생회 선본은 소수자와 인권 담론을 내걸었으며 새내기 새로배움터(아래 '새터') 개선 의지 등을 표명한 상태에서 압도적인 지지와 함께 당선되었다.
신입맞이 행사의 핵심인 새터는 그 자체만으로 공동체 문화의 재생산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나는, 그리고 우리는 새터에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저희 새준위는 이번 2017 공과대학 새내기 새로배움터의 기조를 '차별 없는 새터, 강권 없는 새터'로 정하였습니다. 대학생활의 시작점이며 공동체 문화 형성의 장인만큼 새내기 새로배움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모든 신입생 그리고 재학생 여러분에게 환영의 의미를 전달하는 행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애인이든, 성소수자든, 외국인이든 우리 사회에서 차별을 받거나 배제를 당하는 새내기 분들을 비롯한 모든 새내기 분들은 모두 동등한 공과대학의 구성원이며, 공과대학 새준위는 여러분의 나이, 인종, 성별, 장애 여부, 성적 지향, 국적 등에 상관없이 모든 새내기 여러분을 환영합니다.(중략)하지만 저희는 여러분들이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한 명의 주체로서 가져야 할 상호 배려와 존중, 인권의식 등을 함양하고, '각자가 각자로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며 자신의 권리를 온전하게 누리도록 말입니다."
타협하지 않고 '혐오'라는 불의에 함께 맞서 싸우기나는 학생회의 집행위원장으로서 위와 같은 글을 골자로 하는 취지문을 작성하였고, 글의 말미에는 '2017 공과대학 새내기 새로배움터 준비위원회를 대표하여 제30대 공과대학 학생회 집행위원장이며 한 명의 성소수자인 박종관 드림'이라고 적었다. 내가 감수하게 되는 위험에 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고 안정감을 느끼는 효용을 거둘지는 정말로 미지수였지만,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왜냐면 다들 차별과 혐오발언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저 재밌으니깐 옆에 없으니깐 어느 정도 용인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장 중심부에 나라는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가시화(visualization)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까지 오면 최대의 고민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다. 실무자인 동시에 성소수자인 나는 '인권적 요소에 손을 대면서 최대한 프로그램의 완결성과 흥미를 유지한다'라는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 사실 많은 경우에 인권은 이제 챙길 만큼 챙겼으니 차순위로 밀리곤 한다.
그래서 나는 '새터 취지'에 덧붙이는 글을 다시 한번 페이스북에 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쯤 되면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으니 '전체공개'로 말이다. 그날은 금지된 결혼을 집전하고 축복했다는 성 발렌티노의 전설을 기리는 밸렌타인데이였으며, 새터 전날이었고, 문재인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가 사실상 차별금지법 제정 포기를 얘기한 날이었다.
"어제는 공과대학 새내기 새로배움터 스태프들을 위한 인권교육이 있었습니다. 예전보다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아래 사진처럼 1200여 명이 보는 책자에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할 수도 있고, 책자 맨 앞에는 '차별 없는 새터, 강권 없는 새터'라는 기조와 관련된 인권 파트가 수록되어 있어요.하지만 많은 것이 그대로이기도 해요. 대놓고 하는 혐오발언은 줄었지만 여전히 희화화의 대상이 되기도, 혹은 망각의 대상이기도 하지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인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자기검열적이고 재미없으며 불편한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황금률이라는 말이 있지요. 제가 참 좋아하는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눅 6:31)"여러분은 어떤 이유로 인권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누군가는 빻았다는 평가가 두려워서, 누군가는 약자를 위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사실 이 글에서 여러분을 책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한 번 더 고민해보기를 바랄 뿐입니다.내가 혹시 베푼다는, 시혜적 태도로 소수자 인권을 대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인권이라는 개념을 불편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았는지. 사람이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부여되는 천부인권이 무엇이고, 자유와 권리란 무엇인지. 내가 쉬이 내뱉는 말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의 절박함 도움 요청을 묵살하고 절망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전지전능한 제삼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를 책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인지하고 개선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동참하고 있는지. 옳은 일, 옳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현실성과 재미와 분위기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지는 않은지. 인권과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너무도 쉽게 다른 것에 타협하고 내주고 있지는 않은지.이 글을 다양한 사람들이 읽게 되겠지요. 학생사회의 가장 위에서 가장 아래에 이르기까지. 회장단에서 과대를 거쳐 스태프, 재학생, 신입생, 그리고 소수자에 이르기까지. 제가 왜 이렇게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고 스스로 질문해보세요.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성 발렌티노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하여.여러분에게 희생 혹은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겠죠. 누군가는 술자리에서 인권침해를 막아낼 수도, 유들유들하게 방향을 바꿀 수도, 소속 공동체의 문화를 바꿀 수도, 말없이 지지를 보낼 수도, 이 글을 여러 방법으로 널리 퍼트릴 수도 있겠죠. 선택은 항상 여러분의 몫입니다. 다만 힘이 닿는 데까지는 여러분이 함께 해주기를 바랄 뿐이지요. 아마도 앞으로 이런 주제로의 글은 이게 마지막일 겁니다."이 글을 게시하고 새터는 진행되었고 내가 아는 바로는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여전히 평가할 지점은 남아있지만 사회와 공동체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니기도 하지만 참 많은 고민을 하고 글을 써왔다. 그리고 그에 대한 약간의 자부심도 있다.
궁극적인 물음은 이것이다. '평등과 존중은 이미 당연한 가치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이에 대한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타협하지 말고 혐오라는 불의에 함께 맞서 싸우자. 각자의 자리에서 가능한 대로 힘을 보태자. 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나는 오늘 인생 마지막 커밍아웃을 한다. 최악의 경우 생계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묻는다. 당신은 선택의 기로에서 성 발렌티노가 되는 길을 선택할 것인지, 타협할 것인지. 나와 함께 갈 것인지, 현실을 직시하라고 할 것인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의 일부는 박종관씨의 페이스북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