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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김태원 공훈 의혹 진실규명 시민 공동조사단'(공동대표 이순옥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이하 공동조사단)가 지난 2015년 6월, 대전지방보훈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김태원 공훈 의혹 진실규명 시민 공동조사단'(공동대표 이순옥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이하 공동조사단)가 지난 2015년 6월, 대전지방보훈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심규상

광복 70주년인 지난 2015년. <오마이뉴스>는 남의 독립운동 행적으로 수십 년 동안 보훈 혜택을 받아온 대전의 한 독립운동가(김태원, 金泰源, 1902~1926) 후손의 사례를 심층 보도했다.

같은 해 8월,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합의제 의결기관)는 광복절을 앞두고 대전 출신 독립유공자(아래 대전 김태원)의 후손이라며 약 50년 가까이 보훈 급여금 등을 받아온 김아무개씨 등에 대해 "유족이 아니다"고 결론 내렸다.

정부가 1963년 3.1절을 기념해 독립운동가인 '평북 출신 김태원'에게 일제강점기 벽창의용대 활동 등의 공적을 근거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정작 훈장과 보훈 급여금이 동명이인인 '대전 출신 김태원'과 그 후손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가 3.1절을 앞두고 국가보훈처 결정, '그 후'를 취재했다.

국가보훈처-중앙행정심판위 '보훈 급여금 1억 원 환수 처분'

국가보훈처는 보훈 심사위 결정에 따라 보훈처 '대전 김태원' 후손에게 최근 5년간 지급된 보훈 급여금(약 1억 여 원)에 대해 환수 처분을 내렸다.

'대전 김태원' 후손은 국가보훈처의 '유족이  아니다'는 결정과 보훈 급여금 환수 조치에 대해 행정심판위원회에 각각 이의를 제기했다. '대전 김태원' 후손은 "독립유공자 후손 해당 여부에 대한 심사 책임은 정부 당국에 있고, 부친이 벽창의용단 활동을 한 것으로 판단한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대전 김태원은 평북 김태원과 공적은 물론, 출생지, 가족 관계 모두 다르다"며 "정부가 '대전 김태원'의 행적에 대해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훈장과 유족 자격을 준 잘못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상을 받게 된 사유에 후손들의 책임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따라서 청구인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심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정황상 후손들도 '평북 김태원'을 '대전 김태원'으로 오인할 만한 정당한 사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대해 '대전 김태원' 후손들은 중앙심판위원회의 결정에 불복해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대전시, 대전 김태원 생가 안내판-표석 철거

 '대전 김태원' 생가 터와 안내판(위쪽)가 안내판 철거 모습(아래)
'대전 김태원' 생가 터와 안내판(위쪽)가 안내판 철거 모습(아래) ⓒ 김영진

대전시는 '대전 김태원'이 독립유공자 명단에서 제외되자 그로부터 두 달 뒤인 2015년 9월, 그의 생가터에 대한 시 문화재자료 지정을 해제했다. 1997년 생가터를 문화재 자료로 지정한 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대전시는 또 인쇄물, 홈페이지 등에 기재한 독립운동가 명단에서도 대전 김태원을 제외했다.

하지만 생가터에 설치한 문화재 안내판과 표석은 쉽게 철거되지 않았다. 후손들이 행정소송이 완료될 때까지 철거를 거부한 때문이다.

대전시는 지난해 8월 말에서야 생가터에 있는 독립운동가 문화재 안내판과 표석을 철거했다. 국가보훈처가 대전 김태원을 독립운동가 명단에서 제외한 지 꼭 1년여만이었다.

대전 근현대전시관에 전시된 '대전 김태원' 독립유공자 명단과 기록은 이보다 늦은 같은 해 10월경 철거됐다.

대전 시민단체, 89년 만에 '평북 김태원 선생' 추모제

 2015년 12월, 독립운동가 평북 김태원 선생 추모제
2015년 12월, 독립운동가 평북 김태원 선생 추모제 ⓒ 심규상

대전민족문제연구소 등 대전지역시민사회단체는 국가보훈처가 '대전 김태원'의 후손들에 대한 유족 자격을 박탈한 같은 해(2015년), 당초 정부가 훈장을 추서한 '평북 김태원 선생'에 대한 추모제를 거행했다.

추모제는 '평북 김태원 선생'(1902~1926)이 평양형무소에서 사형당한 12월 23일 오전 11시에 맞춰 거행됐다. 선생은 17살 나이에 무장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군자금 모집과 일경 및 밀정 처단을 위해 종횡무진 움직였다. 일제는 그에게 국경을 소란하게 한 혐의를 적용해 사형대에 세웠다.

당시 참석자들은 축문에서 "조국이 해방됐지만, 선생의 영전에 제사상 한 번 올리지 못했고, 선생이 사형 순국하신 지 37년이 지나서야 추서된 훈장은 대전에 사는 이름이 같은 유족에게 지급돼 빛을 잃고 있었다"고 사죄했다.

순국한 지 89년 만에 독립유공자 지위를 되찾은 '평북 김태원' 선생에게 바친 반성문이기도 했다.

관련 보도한 언론사 '소송 중'

이런 가운데 '대전 김태원' 후손들은 엉뚱한 후손에게 보훈 혜택을 줘 왔다는 의혹을 보도한 <오마이뉴스>와 <SBS>('궁금한 이야기 Y' 보도 관련)를 상대로 정정보도와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각 제기, 계류 중이다.

국가보훈처는 1963년 '평북 김태원'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훈장은 '평북 김태원'이 아닌 '대전 김태원'과 그 후손에게 주어졌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015년 수 차례 보도를 통해 '평북 김태원'에게 추서한 서훈이 엉뚱한 '대전 김태원' 후손들에게 잘못 전달돼 행사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국가보훈처 또한 재심의를 통해 지난 8월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대전 김태원' 후손은 유족이 아니다"고 결론 내렸다.


#독립운동가#독립유공자#대전 김태원#평북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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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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