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라고 하지만 성조기 나부끼는 상황은 도저히...세월호 참사로 절망하고, 메르스 사태로 망연자실하고, 최순실·박근혜게이트로 '이게 나라냐?'며 또다시 분노하길 수 차례. 마침내 촛불로 민의를 표현한 국민의 힘은 국회의 탄핵소추 결의를 이끌어냈고, 곧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 와중에 보수와 진보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서로에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광화문과 서울광장은 촛불과 태극기로 나뉜 '두 개의 한국'이 차벽보다 더 큰 간극으로 병존한다. 그 거리만큼 서로에게 혐오와 비난과 적대감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가 실종되었다고들 한다. "군대여 일어나라", "비상계엄 선포하라" 같은 주장에서 법치주의와 안정을 희구하는 진정한 보수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조한혜정 교수는 한겨레신문의 칼럼에서 정치의 시작은 만남이라고 했다. 자기와 다른 사상, 철학,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합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만나야 한다는 얘기일 테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 100불도 안 되는 시절에 자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야' 하고, '청년기에 육이오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또는 무장공비가 출현한 1950년에서 1970년대를 살아남은 세대가 안보라는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인내심을 갖고 반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대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론에는 동의하지만, 태극기가 폄훼되고, 성조기마저 나부끼는 상황을 볼 때면 안타깝고 부끄럽고 화마저 치민다. 어쩌면 신생국가가 성년기를 앞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것처럼,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등 이념대립의 홍역을 치르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이 통과제의를 거치면 대화와 타협과 상생의 정치를 체득해서 보다 성숙한 민주사회로 거듭나리라 믿는다.
특이해서 차 세웠더니 윤이상기념관
통영이 고향이어서 자주 찾는 편이다. 갈 때마다 문화예술인을 기리는 건물들이 생겨나서 한편으로 뿌듯하다. 청마문학관, 박경리기념관, 전혁림미술관을 비롯하여 김춘수유품전시관이라는 이정표도 보였는데 조만간 기념관도 건립할 계획이라고 한다.
시조시인 김상옥과 서양화가 김용주의 생가 이정표도 보인다. 어린 시절 무심코 지났던 골목에 상전벽해와도 같이 새 길이 나고, 그 길을 따라가면 생가가 보존돼 있다. 지금은 통영시립박물관으로 바뀐 옛 통영군청 건물에서 해저터널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윤이상기념관이 나온다.
그런데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이 건물 앞에 통영시 관광안내도와 함께 '윤이상기념관 Yun I-sand Memorial Hall'이라고 적힌 글만이 유일하게 이 건물의 정체를 알려줄 뿐이다. 차를 타고 지나다가 특이한 건물이 있어서 차를 세웠더니 그 곳이 윤이상기념관이었다고 쓴 어느 블로그의 글도 본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벽면에 붙여진 건물이름은 윤이상기념관이 아닌, '도천테마기념관'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윤이상의 이력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튀빙겐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1970년에 킬 문화상을, 1987년에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수상한 것 외에도, 함부르크자유예술원 공로상, 바이마르괴테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유럽의 평론가들에 의해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과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1995년에는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윤이상은 베르린예술대학 정교수, 함부르크와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 서베를린 예술원 회원이기도 했고, 국제현대음악협회(ISCM)의 명예회원으로도 활동했다.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의 음악당 건물 로비 벽면에는 위대한 음악가 44명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는데, 이 중에서 20세기의 작곡가는 조지 거쉰, 벨라 바르토크,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함께 윤이상이 있을 뿐이다.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을 시도하여, 서양 현대 음악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를 표현했으며, '동서양을 잇는 중계자 역할을 한 음악가'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윤이상과 박정희가 나란히 탄생 100주년 되는 해올해는 나란히 1917년 생인 박정희와 윤이상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 명은 일본 천황에 충성 혈서를 쓰고 일본군 장교가 된 뒤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반면, 다른 한 명은 일본 유학 중에 태평양전쟁의 조짐이 보이자 귀국하여 항일운동을 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고 수감이 된다.
해방 이후 박정희가 서슬 퍼런 독재를 하던 때 윤이상은 유럽에서 당대 최고의 작곡가 반열에 오른다. 그리고 1967년, 대통령 선거에 대한 부정시비가 일자 박정희는 대규모 공안사건을 일으킨다.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그것이다. 한국에 송환된 윤이상은 또 다시 고문을 당하고 수감되지만, 카라얀, 스트라빈스키를 포함한 해외 음악가와 독일정부의 탄원으로 2년 뒤 석방되고 독일로 추방된다.
윤이상과 더불어 재불화가 이응로, 심지어 시인 천상병까지 엮어서 203명을 조사했지만,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이는 예의 동백림사건이 강제연행과 고문에 의해 날조된 사건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에 동백림사건을 두고,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혔다. 또한 사건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박정희와 윤이상의 악연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윤이상평화재단이 오르는 바람에 기념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유네스코 산하의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에 가입된 한국의 첫 국제콩쿠르인데, 이마저도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가 지난 2월에 가까스로 국비를 지원받아 명맥을 잇는다는 뉴스도 접했다.
비단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윤이상죽이기'가 자행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통영 죽림마을에서 원문고개로 넘어서기 전에 걸려있던 윤이상 사진을 볼 때면, 저 고개만 넘으면 예향 통영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새 그 사진은 바뀌어 있다. 2002년에 시작된 통영국제음악제는 제1회 때 '윤이상을 기리기 위하여'라는 부제를 단 이래, 윤이상의 흔적은 조금씩 지워져 가는 모양새다. 2007년에 제정된 국제윤이상작곡상은 2013년 이후 중단된 상태이고, 윤이상의 창작공간이었던 베를린 자택을 기념관으로 만드는 사업도 개보수는 고사하고 유지비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가 재단 임원들이 사비를 털어 미납금을 해결했다고도 전해진다.
"가치에 비해 너무나 소외 받는 윤이상"생전에 윤이상과 친분이 있었던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예술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 자체가 애국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생각은 달랐지만, 그는 진짜 애국자였고 진짜 음악가였습니다. 한국 사람의 감수성을 그렇게 체계화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중략) 윤이상 씨를 지금처럼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정말 훈장 준다고 불러도 시원치 않을 일이었는데 노인이 죽으러 고향에 가겠다는 걸 '사과' '해명' 운운해서 막은 건 큰 잘못입니다.- 2006.1.31, 프레시안 김창희 기자 수원시향의 지휘자인 김대진 역시 "여태껏 만나본 유럽, 미국의 연주자와 지휘자들 중 그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며 윤이상의 위상을 추켜세운다.
이에 반해, 정작 한국에서는 사후 20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이념 논란에 휩싸인 채 제대로 된 평가를 주저한다. 최근에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불거지자, 최수열 서울시향 부지휘자는 "원조 블랙리스트의 피해자인 선생님은 기존에 없던 새 음악의 어법을 사용한 인물"이라며 "가치에 비해 너무나 소외 받는 그의 음악을 올해 사명감을 갖고 자주 무대에 올려야 한다"고 했다.
윤이상이 태어날 때 그의 모친은 '상처 입은 용'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탁무권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은 '자신의 뿌리와 예술가로서 시대적 의무를 고민한 민족주의자'라고 평하지만, 여전히 용의 상처가 아물지 못한 상태다.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은 2014년 총회의 개최지로 작은 항구 통영을 선택했고, 2015년에는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통영시 용남면에 살고 있는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여사는 요즘도 극우단체의 시위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도 미제사건으로 남겨진 '통영의 딸'에 얽힌 윤이상 흠집내기는 집요한 측면이 있다. 이제는 윤이상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작곡가, 민족주의자로 남겨드리는 것이 후대의 몫이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윤 선생님은 당시 세계적으로 명망있는 분이었고, 그 명망이 나의 허황한 믿음을 더 굳게 만든 것 같다"는 오길남 박사의 술회처럼, 이제는 선생을 놓아드리는 게 도리이다.
"월북을 권유했다는 편지 등 구체적인 물증을 오 박사는 단 한 차례도 공개한 적이 없다"며 윤이상의 딸은 '사자 명예훼손죄'로 고소까지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이 모든 파국은 선생의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다.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김형태 변호사의 말을 믿는다.
1985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월북했다가 여의치 않자 1년 만에 처자식을 버려두고 혼자 북을 탈출했다 그러곤 윤이상 선생과 송두율 교수가 가족 송환에 협조하지 않는다며 지금까지도 두 사람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고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상반된 시각의 두 글이 있다. 하나는 <미래연 주간논평>에 '그의 영혼을 통영 앞바다에'(2012.03.19)라는 제목으로 이용중 동국대 법대 교수가 기고한 글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어떤 증거나 정황에서도 이번 사건과 윤이상 선생의 직접적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서울대를 나와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학위까지 수여 받은 불혹의 나이의 학자가 '누구의 꾐에 빠져' 가족을 데리고 교수자리를 찾아 당시 이미 공산 독재체제로 알려진 북한에 의거 입북했다는 것은 공상 소설 같은 스토리다. 더욱이 현대 의학의 발상지인 독일에 거주하던 사람이 부인의 치료 목적으로 의료 후진국인 북한에 갔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북한에서 칭송된다는 이유로 윤이상 선생을 빨갱이로 본다면, 박지원 선생이나 이준 열사도 모두 빨갱이가 되는 것이며, 음악을 위해 입북한 것이 죄라면 마에스트로 정명훈도 즉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정부의 자의적 허가 여부가 양심에 기인한 예술활동의 합법성을 판단하는 최후 보루가 될 수는 없다. 더욱이 예술인생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던 한국계 독일인에 대하여 분단시대의 냉전적 잣대를 들이대고, 심지어 국가보안법까지 운운하는 천박한 안목이 개탄스럽다. 윤이상 선생은 단지 분단된 조국을 동시에 사랑한 죄를 지었을 뿐이다.이와 더불어 <시대정신> 2011년 겨울호에 기고한 세이지코리아 대표 김미영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한국사회가 "위대한 예술가" 윤이상과, "철저한 반한 친북 인사" 윤이상을 동시에 수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예술'의 이름으로 관용하는 것이 문명국의 성숙한 태도인가? 분단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윤이상을 추앙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반역적 행태인가?바스러질 듯 작고 연약한 것에 바치는 우리의 마음이 커질 때, 우리는 마침내 '인간의 존엄성'을 논할 수 있는 성숙한 나라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윤이상도 송두율도 숱하게 민족과 통일에 관해 말했고 북한을 들락거렸지만 북한에서 삶을 영위하는 그 작고 연약한 존재들에 대해서는 무심했던 것이다. '조국통일',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그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대부분은 북한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내정을 간섭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북한의 내정이란 그 작고 연약한 존재들에 대해서 너무 심한 폭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현실을 직시하지 않았다.선생이 고향의 하늘 훨훨 날아다니시길
윤이상에게 남북한은 하나의 조국이었고, 남한 정부에 의해 입국이 거부되어 윤이상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조국 방문은 북한이었다. 이로 인해 생전에 고향인 통영을 다시 찾지 못한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통영에서 자랐고, 고향의 귀중한 정서적인 기억을 온몸에 지닌 채, 그 정신과 예술적 기량을 담아 평생 작품을 써왔습니다. 통영의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지요. 고향에 가게 되면, 그때가 되면, 나는 통영의 흙에 입을 대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미륵도의 산길을 거닐며 얼마나 고향의 흙과 바람 냄새를 맡고 싶었을까? 바다의 푸른 물색과 은빛 파도 소리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연 채, 그토록 사무쳤을 고향의 소리를 얼마나 듣고 싶었을까? 다행히 탄생 100주년인 올해는 한국과 독일 곳곳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계획돼 있다고 한다. 더러 비판적인 시선이 존재하지만, 이제는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해드릴 때다. 고향의 하늘을 용솟음쳐 오르며 훨훨 날아다니시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