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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시대는 짧은 편이다

 안티오쿠스 3세
안티오쿠스 3세 ⓒ 이상기

셀레우코스((Seleucos Nicator)는 알렉산더 대제의 부하 장수였다. 알렉산더가 기원전 330년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까지 진출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온 다음 이란의 발루치스탄(Baluchestan) 지역을 지나다 건조한 사막 기후로 인해 323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셋으로 다시 분리된다.

그 중 페르시아 지역을 통치한 왕이 셀레우코스다. 그는 기원전 321년 바빌로니아에서 왕으로 등극했다. 기원전 281년까지 통치하면서 영토를 페르시아, 아나톨리아,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확장했다. 그는 헬레니즘으로 알려진 그리스 문화를 중동지역에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6대왕인 안티오쿠스(Antiochus) 3세(223-191 B.C.) 때 다시 번성했으나, 기원전 139년 데메트리우스(Demetrius) 2세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사로잡히면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스 문자가 적혀 있는 셀레우코스시대 비석
그리스 문자가 적혀 있는 셀레우코스시대 비석 ⓒ 이상기

    
그러므로 이곳에 전시된 셀레우코스시대 유물은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이 표현되었다. 예를 든다면 제우스나 디오니소스다. 그리고 비석이 있는데, 비문이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 제우스는 청동상인데, 힘을 자랑하는 모습이다. 예술적으로는 그리스시대보다 퇴보했다는 느낌이다. 흙으로 빚은 디오니소스는 술에 취한 모습이다. 인물상으로는 후제스탄주 이제(Izeh)의 샤미(Shami) 사원에서 발견된 청동마스크도 있다. 이 인물은 안티오쿠스 3세로 추정된다.

하마단주 나하반드(Nahavand)에서 발견된 비석은 기원전 193년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시기는 안티오쿠스 3세 시대로 셀레우코스 왕국이 다시 한 번 정치․경제적으로 세를 과시하던 때다. 왕족이나 귀족의 업적을 칭송하는 송덕비로 보인다. 지금까지 본 문자들 중에서는 그리스 문자가 가장 친숙하다. 그러나 그리스어를 정확히 모르니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파르티아제국은 유리공예품을 만들어 냈다

 파르티아시대 유리 제품
파르티아시대 유리 제품 ⓒ 이상기

파르티아는 그리스적인 것을 페르시아적인 것과 잘 결합시켜 문화․예술적으로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파르티아는 전통적으로 이란의 북동부를 거점으로 살아가는 민족이었다. 셀레우코스시대인 기원전 250년 아르사케스(Arsaces)가 왕을 칭하면서 파르티아 왕조를 열었다. 그 후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 161-138 B.C.) 1세 때 제국을 형성했고 미트라다테스 2세 때 전성기를 맞이했다.

영토는 아르메니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지역으로, 서쪽으로는 로마와 동쪽으로는 인도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와 인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 상에서 상업과 무역으로 경제적인 번성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유목민으로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그 때문에 유능한 전사가 많았다. 종교적으로는 조로아스터교였지만, 불교에도 관대했다. 팔레비 문자를 처음 만들어냈고, 이슬람 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완을 처음 고안해냈다.

 뿔 달린 도자기 술잔
뿔 달린 도자기 술잔 ⓒ 이상기

이들이 만든 대표적인 유물이 유리공예품이다. 파르티아 유리 제품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부터 그 기술을 전수받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투명도, 색깔, 두께 등에서 투박하고, 로마나 후대 작품에 비해 예술성과 미학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모양이나 용도는 아주 다양해 보인다. 물병, 화병, 술병, 향수병, 주전자, 그릇 등 생활용품과 제기 등이 만들어졌다.

서양의 로만글라스와 같이 유리를 불에 녹인 다음 대롱으로 불어 모양을 만든 것이다. 손잡이를 만드는 기술이 아직 부족해 손잡이 달린 용기의 경우 예술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그렇지만 실용적이고 편리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것들이 케르만샤에서 출토되었다. 술잔으로는 테헤란의 다마반드 지역에서 발견된 뿔 달린 도자기 술잔도 유명하다. 아이벡스의 머리와 뿔이 손잡이 구실을 하고 있다.

 파르티아시대 청동상
파르티아시대 청동상 ⓒ 이상기

 파르티아시대 대리석상
파르티아시대 대리석상 ⓒ 이상기

파르티아시대 청동상도 중요한 유물이다. 이 동상은 1930년 오렐 슈타인(Aurel Stein)에 의해 후제스탄주의 이제 샤미사원에서 발견되었다. 왕족이나 귀족으로 보이며 당당한 모습이다. 모자를 쓰고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00년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상의 높이는 1.94m로 실물보다 조금 큰 편이다.  

대리석으로 만든 인물상이나 신상도 남아 있다. 이들은 그리스적인 요소와 페르시아적인 요소가 잘 결합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수사에서 발견된 여인상이다. 여신이나 여왕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 위에 왕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자료를 보니 테르무사(Thermusa) 왕비로 나와 있다. 프라테스(Phraates) 4세의 부인으로 기원후 4년에 죽었다고 한다.

사산제국의 흔적을 찾아

 샤푸르 부조
샤푸르 부조 ⓒ 이상기

사산제국은 아케메네스제국과 함께 페르시아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나라다. 페르세폴리스 주변 이스타크르(Istakhr)를 지배하던 지방영주이던 아르다시르(Ardashir Babakan)가 기원후 224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사산왕조를 건설했다. 사산이라는 국명은 조로아스터교 사제였던 그의 할아버지 이름에서 따 왔다. 사산제국은 400년 이상 페르시아지역을 통치했고, 영토도 넓어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아르다시르의 아들인 샤푸르(Shapur) 1세 때 이르러 동쪽으로는 인도의 펀잡까지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의 카파도키아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했다. 샤푸르 1세는 로마와 영토전쟁을 벌여 로마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를 사로잡기도 했다. 그는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던 파르티아와는 달리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다. 그 때문에 조로아스터교 관련 문화유산이 많은 편이다. 학자들은 사산시대를 예술적 르네상스라 부르고 있다.

 은제 화병
은제 화병 ⓒ 이상기

이곳 박물관에는 바위 부조물, 벽장식 부조, 장신구, 은제 용기, 동전, 유리 그릇 등이 있다. 그러나 유물이 크지 않아 눈에 확 띄는 것이 없다. 파르스주의 하지 아바드(Haji Abad)에서 발견된 샤푸르 부조가 눈에 들어온다. 머리에 관을 썼고, 목에는 염주형식의 목걸이를 걸었다. 가슴에는 X형의 띠를 두르고 교차점을 장신구로 고정시켰다. 바위 부조물에 표현된 샤푸르가 크고 용맹스럽게 표현되었다면, 이 부조는 작고 선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사산시대 금속공예 기술을 보여주는 제품으로는 은제장식 화병이 있다. 화병은 주둥이, 목, 몸통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몸통도 상단부 장식, 가운데 원형 안 새 조각, 받침으로 나눠져 있다. 새 조각이 있는 원형 밖에는 작은 원형을 두 개 만들어 왕의 상징을 조각해 넣었다. 은제 화병이지만 겉에 금도금을 해 화려함을 더했다. 7세기 사산시대 말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사산시대 모자이크
사산시대 모자이크 ⓒ 이상기

또 하나 로마의 영향을 알 수 있는 모자이크가 눈길을 끈다. 이 모자이크는 비샤푸르 궁전 알현실 또는 접견실 바닥과 벽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녀가 왼손에는 꽃을 들고 오른손에는 열매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방을 꾸미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그 외에도 열매를 따거나 하프를 연주하는 여인도 있다. 그러나 비샤푸르에서 발견된 모자이크 대부분은 루브르박물관에 가 있다. 

소금광산에서 미라로 발견된 사람 이야기

 소금 인간
소금 인간 ⓒ 이상기

오히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소금인간(Salt Man)으로 불리는 미라다. 이 미라는 1993년 잔잔(Zanjan)시 외곽의 쉐흐르 아바드(Chehr Abad)소금광산에서 발견되었다. 모두 6구가 있는데, 그 중 한 구의 머리와 왼쪽 다리가 전시되어 있다. 이 미라의 특징은 얼굴과 머리 그리고 수염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왼쪽 다리는 가죽 부츠 안에 들어 있다. 조사 결과 이들 미라는 아케메네스시대에서 사산시대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에 전시된 미라는 1700년 전 사산시대 사람이다. 자세히 보면 귀에 귀찌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그가 감독관 등 고위직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사 결과 미라의 나이는 37세, 키는 175㎝, 혈액형은 B형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망원인은 사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왼쪽 눈 주변 뼈의 골절, 다른 부위의 손상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란 국립박물관의 상징 황소 주두
이란 국립박물관의 상징 황소 주두 ⓒ 이상기

이란 국립박물관은 한 나라 최고의 박물관 치고는 아쉬움이 많다. 우선 가치 있는 유물의 수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페르시아가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늘 전쟁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중요한 문화유산 상당수가 파괴된 것이 그 원인이다. 두 번째는 중요한 유물 상당수가 영국, 프랑스 등으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국주의시대 산물로 돌이키기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많은 나라에서 문화유산 제자리 찾기를 시도하지만, 언제 이루어질지 모른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란 페르시아학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인지 안내 자료나 안내 책자가 턱 없이 부족하다. 박물관에서 판매하는 책자도 이란어 위주다. 영어 등 외국어로 된 책이 몇 권 없다. 박물관 도록이나 안내서도 볼 수 없었다. 또 이란 국립박물관 홈페이지(http://nationalmuseum.ichto.ir/)도 이란어로만 서비스되고 있어 그림의 떡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란의 문화관광 인프라는 아직도 부족하다.


#셀레우코스시대 유물#파르티아 청동상#파르티아 유리#샤푸르#소금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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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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