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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사계리 해안. 뒤로 형제섬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태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사계리 해안. 뒤로 형제섬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 석문희

 멀리 산방산과 등대가 보인다
멀리 산방산과 등대가 보인다 ⓒ 석문희

제주, 그 가운데서도 서부는 바람이 유난하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만 같은 바람이다. 육지에서는 태풍에 버금가는 위력의 이 바람이 귀를 먹먹하게 하고 때론 나무를 부러지게 할 만큼 강하다. 하지만 제주 서부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으며 그 실체조차 잡히지 않으나 막강한 위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바람 앞에서 다른 존재들은 절로 겸손해진다. 어쩌면 이게 바로 제주의 숨소리, 한라산의 숨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생명력으로 가득 찬 숨소리. 펄떡거리는 생명력으로 가득한 제주는 그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 같기도 하다.

남편과 사계리 해안을 찾은 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람이 유난한 날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면 영락없이 따뜻한 봄이건만 우리는 위력적인 강풍에 추위로 벌벌 떨며 4월의 봄해변을 산책했다.

사진에 바람을 담을 수 있다면 아마도 이 기사를 읽는 사람들은 따스한 봄 풍경과는 사뭇 다른 거센 바람 소리에 깜짝 놀랄 것이다. 장담하건대 여름에 읽는다면 에어컨 바람 따위는 필요 없을 정도다.

산방산과 송악산 사이에 있는 사계리 해안은 사계리 해안 체육공원을 끼고 있는 해변이다. 바다 건너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곳에 형제섬이 있다.

사계리 해안 근처를 수없이 지나다니면서도 정작 사람들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이런 해안이 가까이 있다는 걸 잘 모른다고 한다. 사계리 해안은 썰물에만 자신의 숨은 속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찌 이런 곳이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한적한 곳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남편과 나는 해변을 걷는 내내 거센 바람에도 감탄을 연발하며 사진을 찍고 조개를 주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변 옆 체육공원을 지나며 보니 축구 골대 하나는 바람에 넘어져 쓰러져 있고, 쇠로 된 울타리는 끊어지거나 휘어져 있다. 가히 바람의 위력이, 자연의 위력이 사람들을 압도하고 남음이 있다.

 송악산을 배경으로 한 사계리 해안
송악산을 배경으로 한 사계리 해안 ⓒ 석문희

 화산활동과 물결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아름다운 사계리의 해안
화산활동과 물결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아름다운 사계리의 해안 ⓒ 석문희

한 마디로 이곳은 경치는 좋지만 사람이 살기는 힘든 동네다. 아마도 그 때문에 아름다운 사계리 해안이 이토록 잘 보존될 수 있지 않았을까. 드문드문 올레꾼들과 왕발통을 타고 나온 사람들,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주민들이 보인다. 걷기보다는 왕발통을 타고 이곳을 둘러보고 싶다면 송악산으로 가서 왕발통을 대여하면 된다. 대여 가격이 다른 관광지보다 꽤 높은 편이긴 하나 독특하게도 왕발통 가이드가 있다.

태곳적 지구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을 축소한 모습이 이와 비슷할까. 아니면 인간이 아직 가보지 못한 어느 행성의 모습이 이러할까. 바닷물결이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바위들을 오랜 세월 다듬어 놓은 모양은 절로 탄성이 터져나오게 한다.

딱딱한 바위가 어찌나 부드러운 형태로 다듬어졌는지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다. 자연 마블링같다. 군데군데 구멍이 나있고 이끼가 끼어있는 곳도 있다. 어떤 바위에는 거북손에 뒤덮여 바위 색깔이 거북손과 같은 황회색이 돼버렸다. 누가 거북손을 작다고 했던가.

마치 누군가 바위를 동글동글하게 뚝뚝 떼어내 놓은 것 같은 모습도 흔하다. 화산 활동으로 이런 독특한 모양의 바위 해변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화산 활동과 파도와 세월이 이토록 상상과 스케일을 초월하는 장엄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가운데 움푹움푹 패인 자국도 보이는데 사람 발자국과 동물 발자국 화석이라고 한다. 자연이 빚어낸 이 예술 작품은 우리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짐작하기조차 힘든 기나긴 생명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 한쪽 해변에는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다.

그 옛날 이곳에 발자국을 남긴 인간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유로 이 발자국을 남기게 되었을까. 그는 자신이 사라지고도 5만년 동안 발자취가 남아있을 줄 알았을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토록 덧없다. 이 덧없는 존재들이, 지구 역사와 우주 역사와 비교했을 때 겨우 몇 초도 되지 않는 삶을 온갖 욕심으로 가득차서 천년 만년을 살 듯이 행동한다. 그리고 그 발자국의 주인이었던 인간의 후손은 이제 발자국이 아니라 쓰레기를 남기고 환경오염을 남기고 유전자 조작이 된 생명체들을 남기고 원자력 재앙을 남긴다. 온갖 아귀다툼의 증거과 욕망의 증거들을 지구 곳곳에 빈틈없이 남겨 놓는다.

지구라는 별은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는지, 어디까지 욕심으로 자신과 후손을 비롯해 지구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5만년 전의 어느 인간은 바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겼고 그 인간의 후손들은 이제 다양한 쓰레기를 남긴다. 우리들은 정말 5만년 전의 인간보다 더 진화한 것일까.

써놓고 보니 뒤늦게 아직은 제주의 숨은 명소지만 행여라도 후에 이곳이 사람들로 들끓는 관광지가 되는 데 일조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슬그머니 들기도 한다. 부디 이 기사로 인해 사람의 손길과 욕심으로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라본다.

 오래도록 남기를
오래도록 남기를 ⓒ 석문희



#사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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