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사는게 힘들어서 자신의 꿈을 잃어버린 채 생업에만 종사하다가 나이가 들고 그렇게 인생을 마무리 하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네 인생이다.
하지만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 자신의 꿈을 찾아 가수의 길로 접어든 사람이 있다. 올해 나이 64세인 송종옥씨는 송산이라는 이름으로 무명가수 활동을 하고 있다.
대전이 고향인 그는 7남매 중에 막내로 홀어머니와 남매들과 단칸방에서 힘들게 살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해 동네에서 귀여움을 독차지 했고 학교 노래자랑에서는 늘 상을 받기도 하여 주위 사람들은 그가 커서 가수가 될 거라고 믿고들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난이 싫고 또 어머니께 집 한 채 장만해드리고 싶어서 취직을 한다. 그의 첫 직장은 지금은 LG로 바뀐 금성사. 음향기기 부자재 담당을 맡아서 일을 했다. 누나가 운영하던 수산물 가공회사에서도 일했지만 큰 뜻을 품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을 한다.
서울에 온 그는 중앙시장에서 핫도그 장사서부터 슬리퍼장사까지 여러 장사를 하다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의류 소매업을 시작으로 의류업에 종사를 했다. 2010년에 몇 번의 코수술을 하는 바람에 사업은 부인에게 맡겨 두고 미사리에서 요양 생활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요양생활을 하던 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노래방 기계를 구입했고 그동안 잊고 지내던 노래를 다시 접하게 된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뜻하지 않게 한 정치인 후원 무대에서 남진과 함께 공연을 하게 된다. 그렇게 그는 작은 행사들을 다니며 삶 속에 묻힌 노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노래를 하겠다고 나서자 그의 부인은 완강한 반대를 하였다. 2012년 그가 행사 무대에서 노래를 하면서 행복한 모습을 보이자 그가 원하는 길을 가게 해주었고 적극 도움을 주기도 했다.
2012년 그는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KMF(Korean Music Family)라는 단체를 만든다. KMF에는 현재 20여명의 회원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들은 중년부터 60대 초반까지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그와 회원들의 공연을 본 사람들의 입소문이 이어졌고 그는 불우이웃이나 소외 노인들 그리고 교도소까지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힐링을 줄 수 있는 공연을 적극 추진해왔다.
몇 명 안되는 작은 양로원에서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교도소에서는 죄수들에게 희망을 주는 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노래를 듣고 조금이나마 힐링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너무나 행복했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노래를 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여지없이 불행은 찾아왔다. 자신과 함께 많은 고생을 하며 또한 자신의 노래를 가장 사랑하며 그의 공연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동참했던 부인이 2012년에 간암 판정을 받고 큰 수술을 하게 된다.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그의 부인은 투병생활을 해야만 했다. 사랑하는 부인의 투병생활을 보며 터질 듯한 가슴을 분출하고 싶어 그는 락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접했던 락이 강산에가 부른 라구여라는 노래였고 그 노래를 부르면서 그의 갇혀있던 가슴은 뚫리게 된다. 그렇게 그는 할아버지 락가수라는 타이틀로 부인의 병 간호와 공연을 이어갔지만 4년의 암투병 끝에 그의 부인은 2016년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했던 부인을 보내고 부인의 묘지를 찾을 때면 그녀가 생전에 좋아하던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전인권씨의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 가죽점퍼를 입고 굵은 은팔찌와 은목걸이에 선글라스를 끼고 무대에서 공연을 할 때 나이값 못하는 늙은이라는 비아냥도 듣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락 세계를 지켜내고 있다.
그에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젊은 사람들의 소유물이 되어버린 '케이팝스타'나 '슈퍼스타K'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하는 것이다. 자신처럼 노인들도 꿈이 있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무대에 설 수 있는 힘이 있을 때까지 계속하여 소외된 사람들과 힘든 사람들에게 노래로 희망을 주고 싶다며 그의 꿈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