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기사를 통해서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힐 계획이다. [편집자말] |
⇒전편 (
경찰에 납치돼 수용소로, 탈출하자 삼청교육대가)에서 이어진 기사.
소년 한일영을 가장 아프게 한 일은 친구의 배신이었다. 소년 보호소부터 동고동락한 절친(친한 친구) 4명 중 하나가 사장(막사의 장)한테 잘 보이기 위해 그를 팔아넘긴 것이다.
"'사장은 악독한 사람'이라고 흉본 것을 고자질한 거예요. 그 뒤로 지옥이 펼쳐졌는데 '어~휴' 그 배신감! 그 일이 두고두고 저를 괴롭혔어요. 사장 눈밖에 나면 살아도 산 게 아니거든요. 그 뒤로 툭하면 사장한테 두들겨 맞았어요. 엄동설한에 발가벗기고는 속옷 차림으로 저를 두 시간 동안이나 한데 세워두기도 했고요. 2일 동안 연달아서 그랬는데, 며칠 지나니까 발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퉁퉁 붓고." 동상이었다. 의무실 담당자는 이유도 묻지 않고 동상 치료와는 별로 관련도 없는 약(안티푸라민)만 발라줬다. '사장이 그랬다'라고 이야기하려다가 도리어 '매만 벌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며칠이 지나자 발가락 3개 끝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지금도 그 상처는 끔찍한 기억과 함께 일영씨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도 발을 다 자르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라고 말할 때, 그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목숨 걸고 바다 건넌 소년,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
살아서 집에 돌아가는 길은 탈출뿐이었다. 그러려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수영할 줄 몰랐다. 또한 '갑바'라는 별명을 가진 사내의 눈도 피해야 했다. 서른 살쯤 된 사내인데 그가 하는 일은 운동해서 가슴 근육을 키우고 망원경 들고 산에 올라 막사 주변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소년 한일영이 탈출을 결심한 것은 선감학원에 온 지 1년 뒤다. 그는 틈틈이 수영을 익혔고 갑바라는 사내의 망원경을 피할 방법도 연구했다. 바다에 도착하기 전에 거쳐야 하는 늪 같은 갯벌을 건너는 방법도 모색했다. 탈출했다가 실패해 되돌아온 아이들이 훌륭한 정보원이었다.
두려움에 탈출할 결심이 흐려진 적도 있다. 도망치다가 물에 빠져 죽은 처참한 시체를 보고는 탈출할 결심을 잠시 접기도 했다. 탈출에 실패해 붙잡혀 온 아이가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는 의지가 약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를 향한 그의 갈망이 죽음의 두려움보다 훨씬 더 강했다.
"누군가 떠밀려 왔다고 하면서 단체로 데려갔는데 따라가 보니 몸이 퉁퉁 불은 시체였어요. 물고기가 뜯어 먹었는지 살점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얼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고. '어~휴' 그 처참함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이런 식으로 겁을 주는 거죠. 도망치면 이 꼴이 된다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탈출을 감행한 것은 1974년 여름이다. 선감학원에 온 지 3년 만이고, 탈출을 결심·계획한 지 2년 만이다. 다행히 절친 2명이 그와 함께 하고 있어 외롭지는 않았다. 탈출은 낮에 감행했다. 깜깜한 밤에는 목적지인 어섬을 찾아 헤엄을 칠 수가 없어서다. 그들의 탈출 경로는 선감도 갯벌(200여 미터) ⇒ 바다(200여 미터) ⇒ 어섬(화성 송산면)이었다.
갯벌은 거북이처럼 포복해서 건넜다. 늪처럼 푹푹 빠지는 갯벌이라 걸어서 건너기가 불가능해서다. 걸어서 건너다가, 기력이 딸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밀물에 휩싸여 죽은 아이도 있다는 것을 소년 한일영은 알고 있었다.
갯벌을 건너고 나니 바다가 그들의 앞을 막았다. 먼발치에서 보던 것보다 어섬은 훨씬 더 멀었다. 기가 질린 친구 하나는 '꼭 살아서 돌아가라'는 말을 눈물과 함께 남기고는 선감학원으로 되돌아갔다. 그 친구가 무사히 갯벌을 건너 돌아갔을지, 만약 돌아갔다면 선감학원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4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바다에 뛰어드는 순간 '죽느냐 사느냐'가 시작되는 거예요. 무척 두려웠죠. 죽은 아이 시체를 실제로 봐서 두려움이 더 컸어요. 그래서 친구하고 서로 떨어져서 헤엄치기로 약속했어요. 헤엄치다 힘이 빠지면 옆 사람을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질 수가 있거든요. 한 명이라도 살아야 하잖아요. 어섬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힘이 바닥나 발이 저절로 물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그때 무엇인가 발을 꽉 물었어요. 아마 게였을 거예요. 그 녀석이 제 생명의 은인이죠."게한테 발을 물린 소년 한일영은 깜짝 놀라 발을 디뎠다. 발에 무엇인가 밟혔다. 땅이었다. 땅을 딛고 서니 물이 가슴 부근에서 넘실거렸다. 게가 발을 물지 않았다면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기력이 다해 죽게 됐을지도 모른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와 정말 고맙다"
기력이 바닥난 소년들을 기다리는 것은 굴 양식장에서 일하는 어섬 주민들이었다. 도망쳐야 했지만 한 발짝을 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중년 사내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소년 한일영의 손을 잡았다.
"선감학원에서 도망쳤지?" "네! 집에 가야 돼요. 제발 도와주세요." "우리 집에 갈래, 아니면 선감학원으로 돌아갈래?"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생각할 것도 없이 선감학원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두 소년의 노예 생활이 시작됐다.
"죽지 않고 바다를 건넌 아이는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였던 거예요. 선감학원에 보내겠다는 협박 한마디면 우린 꼼짝도 할 수 없으니까요. 한 푼도 안 주고 맘껏 부려먹는 거죠. 그날 밤 그 집 광(창고)에 숨었는데 선생들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저를 찾는 소리죠. 숨이 멎는 것 같았어요." 어섬에서 그가 한 일은 지게에 굴을 지고 나르는 일과 굴을 까는 일 등이다. 밀물 때는 망둥이 낚시도 해야 했다. 시킬 수 있는 일은 다 시킨 것이다. 그래도 밥을 많이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부부싸움을 하면 화풀이 삼아 쥐어박기는 했지만 선감학원에서 당한 매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어서 견딜만했다.
소년 한일영 말고도 주민들한테 붙잡혀 노예 생활을 하는 아이가 몇 명 있었다. 그중에는 함께 탈출한 절친도 있었지만, 만날 수는 없었다. 작당 모의를 해서 도망칠까 봐 소년들의 만남을 철저히 막았기 때문이다. 주민 전체가 한통속이 돼 소년들을 감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그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은 탈출뿐이었다.
어섬에서 노예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그는 탈출에 성공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산에 오른 날이었다. 썰물 때라 바닷길(개미 다리)도 열려 있었다. 혹시 누군가를 마주치지 않을까 가슴 졸이며 그는 800여 미터를 쉬지 않고 달려 마산포(화성 송산면)로 건너왔다.
마산포는 안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어섬과 가까워 누군가 붙잡으러 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해서, 그는 큰길을 피해 작은 길만 골라 타고 이동했다. 밤을 낮 삼아 걷고 또 걸었다. 차비를 빌려주는 고마운 이도 만났다. 이렇게 해서 1975년 초여름에 서울 삼선교(성북구)에 있는 삼촌 집에 도착했다. 5년 전인 1970년 그가 13살의 나이로 찾아가던 삼촌 집에 18살이 되어서야 도착한 것이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서 돌아와 정말 고맙다." 지금도 그의 귓가에는 이 말이 가끔 들린다. 어머니가 18살이 되어 돌아온 아들한테 한 말이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