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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채로운 풍광을 마주하며 달릴 수 있는 화성.
이채로운 풍광을 마주하며 달릴 수 있는 화성. ⓒ 김종성

해가 갈수록 자전거 여행하기가 힘들어진다.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달리기 좋은 봄이 왔지만, 대기를 뿌옇게 오염시키는 미세먼지에 신종 초미세먼지까지 자전거 여행자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 지난 3월 21일 국제 공기질 모니터 앱인 '에어비주얼'은 서울의 공기질 지수가 183위로, 186위인 인도 뉴델리에 이어 공기 나쁜 도시로 세계 2위라고 발표했다.

내가 이러려고 식목일마다 열심히 나무를 심었나 생각까지 드는 속수무책의 봄이다. 무려 2주간이나 우리나라를 뒤덮었던 미세먼지가 바람에 날려간 지난 주말, 열일을 제치고 애마 자전거와 함께 길 위로 나섰다. 밋밋한 내 삶에도 안 하곤 못 배기는 취미가 하나는 있구나, 떠나기 전부터 설렜다.

경기도 화성 여행을 떠나게 된 건 재작년 소설가 김훈과 함께 달려갔던 화성의 염전이 떠올라서였다. 당시엔 김훈 선생이 <자전거여행> 책을 낸 출판사에서 기획한 단체여행이라 찬찬히 둘러보지 못했다. 나중에 혼자 꼭 오리라 찜해 두었던 곳이다.

화성은 자전거여행지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소금처럼 짠한 사연을 품은 염전이 있고, 시골장 분위기가 남아있는 닷새장터와 서해바다에 사는 별의별 조개들을 볼 수 있는 수산시장, 간척을 위해 바다를 막은 시화호 방조제로 생겨난 드넓은 초원이 있는 등 자전거로 둘러보기 좋은 곳이 많다.

다 같이 먹고 살기 위해 만든 소금밭, 공생염전 

 휴전선 부근 철의 삼각지 지역 피란민들이 일궈낸 공생(共生) 염전.
휴전선 부근 철의 삼각지 지역 피란민들이 일궈낸 공생(共生) 염전. ⓒ 김종성

 염부가 소금밭에서 하는 대패질(소금을 끌어 모으는 일) 도구.
염부가 소금밭에서 하는 대패질(소금을 끌어 모으는 일) 도구. ⓒ 김종성

철의 삼각지 피란민들은 미군이 주는 구호물자를 받아먹으며 등짐으로 돌과 흙을 날라서 화성 남양만 바다에 880미터의 둑방을 쌓았다. 미군들은 이 피란민들의 필사적인 개미노동에 경악했다. 미국에서 영상 제작사를 불러들여 피란민들의 노동을 다큐멘터리로 찍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은 '바다를 밀어낸 사람들'이었다. 둑방이 완성되던 날 이 영화는 면사무소 앞마당에서 상영되었고 미국에도 건너갔다. - 김훈 <자전거여행기> 가운데 

좌석버스를 타고 화성시 서신면 매화리 마을이 있는 서신터미널에 내렸다. 서울 사당역이나 수원역 앞에서 이 동네까지 버스가 오가는데 모두 자전거를 실을 수 있는 짐칸이 있어 좋다. (전철 사당역 4번 출구 앞 1002번 버스, 1호선 수원역 4번 출구 앞 1004번 버스)

마을 모습이 마치 매화꽃 모양 같다 하여 이름 지어진 매화리는 서해바다가 가까운 마을이다. 종점 미용실, 진달래 다방이 있는 아담한 동네 매화리에서 서쪽 바닷가 쪽으로 봄이 찾아온 시골길을 조금 달리면 이 동네를 소금 꽃 피는 마을로 만든 공생염전이 나온다.

화성 지역의 갯벌엔 염전이 많았지만 시화방조제, 화옹방조제 등으로 바다를 밀어내면서 대부분 간척지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 매화리 공생염전은 바로 옆 대양염전과 함께 여전히 천일염 산지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갯벌에서 천일염을 생산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프랑스 게랑드 지역이 유일하다 할 만큼 천일염은 귀한 소금이다. 그래서 소금(小金), 작은 금이란 뜻의 한자를 쓰나 보다.  

 소금창고에 눈처럼 쌓여있는 천일염.
소금창고에 눈처럼 쌓여있는 천일염. ⓒ 김종성

 장판이 아닌 옹기로 된 염전 바닥에 맺힌 소금 알갱이.
장판이 아닌 옹기로 된 염전 바닥에 맺힌 소금 알갱이. ⓒ 김종성

아직 소금 꽃 필 때가 아니어서 염전은 한산했지만, 한 염부 아저씨가 나와 천일염이 돼가고 있는 소금을 돌보고 있었다. 염전에서 힘들게 만들어온 소금 결정체는 염전 창고에서 1년 정도 보관하면서 간수가 빠져 비로소 천일염이 된단다. 염전 이름도 특이하고 무엇보다 염전이 생겨난 연유가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연관이 있어서 특별히 기억에 남았다.

이 염전은 강원도 철원·김화 지역의 피란민 55세대가 갯가로 들어와서 간척했다. 한국전쟁 후 동네가 그만 DMZ(비무장지대)로 지정돼는 바람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정착한 것. 공평하게 소금판을 분배하고 함께 살아가자는 의미에서 염전에 '공생(共生)'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옆에 비슷한 규모의 대양염전이 있지만 공생이라는 이름 덕분인지 이 염전이 더 알려져 있다. 

공생염전엔 특별한 점이 또 있다. 바닥이 다른 염전에서 보았던 까만 장판이 아니다. 갯벌에 옹기 조각을 하나하나 박은 뒤, 그 위에서 소금을 생산하는 옹기판염 방식이다. 옹기판염은 장판 염전에 비해 노동력은 많이 들지만 생산량은 3분의 2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옹기 조각이 갯벌을 살아 숨 쉬게 해줘 더욱 친환경적인 소금을 만들 수 있단다. 공생염전에선 찾아온 사람들에게 시중 가에 비해 저렴하게 천일염을 판다 (한 포대 8천 원).

짭조름한 서해바다 내음이 나는 사강시장 

 농산물보다 수산물이 풍성한 사강시장.
농산물보다 수산물이 풍성한 사강시장. ⓒ 김종성

 조갯살이 너무 맛있어 이름 지었다는 맛조개.
조갯살이 너무 맛있어 이름 지었다는 맛조개. ⓒ 김종성

다시 매화리 마을로 돌아와 사강시장이 있는 송산면 사강리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화성시는 서울시의 1.4배나 땅덩이가 크다더니, 305번 지방도는 갓길이 넉넉해서 좋다. 공룡 같은 트럭이 굉음을 내며 지나가도 덜 무섭다. 손등과 얼굴을 마사지 하듯 만져주는 봄볕에 마음이 푸근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행운이 그렇듯 좀체 만나기 힘들다는 행복. 사람은 언제 가장 행복할까. 내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가운데 하나는 화창한 봄날 자전거 타고 신나게 달리는 거다.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는 어느 시구처럼 짧아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지 싶다.

사강리는 대로변에 큰 어시장이 들어서 있어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매달 2일과 7일 시골장 분위기가 나는 아담한 닷새장이 열리기도 한다. 말이 리(里)지 수산시장과 횟집들·가게·작은 버스터미널이 있는 큰 동네다. 화성시에는 사강·남양·조암·발안 등의 전통재래시장이 있는데, 그중에서 바다가 가까운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사강시장이다. 

그래서 농산물보다 수산물이 많다. 도로변에 늘어선 20여 개의 어시장 앞에 놓인 고무 대야마다 낙지·꽃게·칠게는 물론 바지락·맛살·동죽·모시조개·피조개·키조개 등 별의별 조개들이 가득 담겨 있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성해졌다. 보통 조개와 달리 원형이 아닌 일자형의 '맛조개'는 얼마나 조갯살이 맛있으면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싶었다. 

 시골장 풍경이 남아있는 사강 오일장.
시골장 풍경이 남아있는 사강 오일장. ⓒ 김종성

 동네 경찰관 아저씨가 알려준 윤가네 백반집의 5천원 한상.
동네 경찰관 아저씨가 알려준 윤가네 백반집의 5천원 한상. ⓒ 김종성

조개껍질에 새겨진 저마다 다른 무늬들은 서해바다가 매일 2번 썰물과 밀물을 끝없이 반복하면서 새겨진 물결의 흔적처럼 보였다. 그런 조개들로 만든 조개탕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1994년 시화호 방조제가 생기고 바다를 막으면서 코앞에 펼쳐져 있던 천혜의 바다와 갯벌을 잃어버린 후 가까운 궁평항이나 영흥도에서 해산물을 들여온다고 한다.

사강시장은 1915년 4월 15일에 처음 개설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크게 확장되어 (32만 평방미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화성의 다른 전통재래시장들처럼 사강시장은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곳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사람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조선인들이 모이는 걸 절대 금지했던 일제도 교회(또는 성당)와 장날 시장에 사람들이 오는 건 어쩌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성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사강리에 왔다가, 저녁밥을 먹으러 들른 '윤가네 백반집'도 사강시장에 있다. 지나가던 나이 지긋한 경찰 아저씨가 알려줘 간 곳이다. 평범한 식당 모습, 백반 한 상에 5천 원이라는 말에 별 기대를 안 하고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전직 요리사였다는 오십 대 주방장 아저씨의 내공이 그대로 드러나는 백반 한 상이 나왔다. 식당 아주머니는 '자전거 타고 운동하느냐'며 달걀부침까지 서비스로 내주었다.

드넓은 초원의 공룡 화석지, 송산그린시티 전망대가 있는 우음도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소금을 남겨놓은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 초원.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소금을 남겨놓은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 초원. ⓒ 김종성

다시 북쪽으로 길을 달려 송산면 고정리로 향했다.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공룡 화석지와 송산그린시티 전망대가 있는 우음도가 있는 동네다. 주민들은 그냥 '음도'라고 부른다. 옛날엔 바다와 갯벌이었지만 시화호 방조제가 물길을 막고 들어서면서 모두 뭍이 돼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뭍은 온통 초원으로 바뀌어 갈대숲과 바람을 느끼며 자전거 타고 달리고 싶게 한다.

사강리에서 북쪽으로 농촌풍경이 이어지는 305번 도로를 따라 한 길로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오리들이 노니는 한가로운 논과 포도알이 맺힐 송산 포도밭 사이 도로를 달리다 보면 큰 공룡 모형과 함께 갑자기 모든 풍경이 사라지고 오직 갈대숲길만 나온다. 인터넷 지도를 보니 20여 년 전만 해도 갯벌과 바다였던 땅으로 이젠 '송산그린시티'라는 신도시로 개발되고 있는 지역이다.

갈림길도 없는 드넓은 갈대숲 길 저 앞에 웬 커다란 공룡이 그려진 건물이 나타났다. 화성 의 명소가 된 공룡알 화석지(송산면 고정리)다. 안내센터 벽에 그려진 뿔공룡은 한반도 최초의 공룡으로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라는 학명도 얻었다. 천연기념물 제 414호로 지정된 곳으로 시화 방조제로 바다를 가로막고 바닷물이 빠지면서 발견됐다. 희귀한 풍경을 좋아하는 사진가들이 이곳에 출사를 나왔다가 공룡알 화석을 찍으면서 처음 알려졌다고 한다.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화성 공룡알 화석산지.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화성 공룡알 화석산지. ⓒ 김종성

 20여 년 전 까진 바다와 갯벌이었던 고정리 초원 위로 보이는 우음도.
20여 년 전 까진 바다와 갯벌이었던 고정리 초원 위로 보이는 우음도. ⓒ 김종성

드넓은 초원 위로 작은 무인도들과 붉은 색을 띠는 바위들이 떠 있는 게, 정말 공룡들이 살았음 직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풍경이 펼쳐진다. 초원을 가득 메운 갈대숲 사이를 산책하다가 안내판을 통해 파도 소리를 내며 춤추는 이 풀 이름이 '삘기'라는 걸 알게 됐다. 재미있는 이름의 이 풀은 오뉴월엔 머리 쪽이 하얗게 변해 비슷했던 갈대나 물억새 등과 모습이 달라진단다. 인근 들판은 모두 송산그린시티라는 신도시로 개발될 예정이지만, 이곳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덕에 원시적인 풍경을 간직한 초원으로 남게 됐다.  

공룡알 화석지에서 저 멀리 보이는 우음도를 향해 가는 도로 주변도 온통 갈대와 삘기숲이다. 이 한적한 차도 가운데 어느 불쌍한 동물이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로드킬'을 당한 동물은 들짐승이 아닌 매였다. 초원 위를 맘껏 날아다니던 매가 어쩌다 차 사고를 당한 건지... 그런데 초원위에 떠 있는 우음도에도 사고가 발생했다. 어디서 불이 났는지 시커먼 연기가 섬 아닌 섬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송산그린시티로 섬이 수용되면서 주민들이 모두 떠났다고 들었는데 막상 섬에 들어서니, 듬직한 백구 두 마리가 '컹컹' 짖으며 여행자를 맞이했다. 백구들은 이곳까지 찾아온 외지인이 반가웠던지 몇 번 짖다 말고 관찰하듯 쳐다보기만 했다. 대부분 주민들이 떠나고 부서진 빈집이 곳곳에 있는 마을은 화창한 봄날에도 을씨년스러웠다. 들에 난 불 때문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몇몇 주민들이 밖으로 나왔다.

 지도에선 사라진 우음도엔 아직도 주민들이 살고 있다.
지도에선 사라진 우음도엔 아직도 주민들이 살고 있다. ⓒ 김종성

 우음도 뒷산 위에 있는 송산그린시티 전망대.
우음도 뒷산 위에 있는 송산그린시티 전망대. ⓒ 김종성

무슨 사연으로 섬을 떠나지 않고 이곳에 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사정이 있어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실례가 될 것 같아 참았다. 우음도 주변 바닷가에 낚시를 하러 온 사람의 부주의로 들판에 불이 번졌단다. 섬 주변 초원이 온통 까맣게 탔지만 헬기까지 출동한 소방서의 대응으로 다행히 더 이상 번지지는 않았다.

우음도 뒷산이었을 언덕배기에 수자원공사에서 만든 송산그린시티 전망대에 올랐다. 바다에서 호수가 된 시화호와 건너편 안산반월공단, 호수 위로 길게 이어진 송전탑이 한눈에 보였다. 물길이 막힌 시화호는 죽음의 호수가 되었다가, 얼마 전부터 수문을 열어놓아 생태계가 살아나고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섬 주변 초원 위로 큰 트럭들이 쉴 새 없이 공사현장을 들락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금방이라도 신도시가 생겨날 것만 같았다. 육지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이름 지은 우음도, 주민들이 아직 살아가고 있지만 이미 송산그린시티라는 이름으로 지도에서 사라져 버린 섬이 되고 말았다.

* 주요 자전거여행길 : 서신터미널 - 공생염전 - 사강시장 - 공룡알 화석지 - 우음도 - 송산그린시티 전망대 

덧붙이는 글 | 지난 4월 2일에 다녀왔습니다.
제 블로그에서 송고했습니다 : sunnyk21.blog.me



#화성자전거여행#공생염전#사강시장#화성공룡알화석지#우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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