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드 왕조 이야기
카림 한 궁전은 궁성이다. 잔드 왕조(1751-1794)를 세운 무하마드 카림 한에 의해 지어졌다. 카림 한은 사파비제국의 몰락과 함께 생겨난 이란지역의 분열과 혼란을 종식시킨 사람이다. 1760년 아프샤르(Afshar), 카자르, 아프간, 잔드족 간의 주도권 다툼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사람이 카림 한이다.
그는 이 때 자신을 왕(Shah)이라 칭하지 않고 민중의 대표(Vakil e-Ra'aayaa)라 칭했다. 궁전 옆 시장이 바킬 바자르가 된 것은 이 호칭과 관련이 있다. 1760년부터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이란 지역에 평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1766/67년에는 쉬라즈에 왕궁을 신축하고, 바자르와 마스지드를 건설했다. 1778년에는 테헤란을 제2수도로 정하는 등 통치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1779년 결핵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아부 알 파트(Abu al-Fath)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무능했고, 카자르족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1789년 카림 한의 손자뻘 되는 로트 알리 한( Lotf Ali Khan)이 왕이 되어 1794년까지 통치했다. 알리 한은 1794년 밤(Bam) 성채에서 카자르족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그 때부터 카자르 왕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카림 한 궁전 입구에서 만나는 타일 벽화
카림 한 궁전은 사방을 높은 담장으로 둘러싼 성채다. 높이가 12m나 되며, 성벽 두께도 3m에 이른다. 사방에는 망루 겸 진지에 해당하는 둥근 탑이 있는데, 높이가 14m다. 성 밖으로는 해자를 둘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로와 광장으로 변했다. 동쪽으로 정문이 나 있으며, 문 위에 조각된 타일 그림이 인상적이다. 이란의 대표적인 서사시인 페르두시의 <왕들의 서>에 나오는 내용으로, 카자르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왕들의 서>는 신화시대, 영웅시대, 역사시대로 나눠 페르시아의 전설과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 이 그림은 페르시아 고대 영웅 로스탐(Rostam)이 사나운 악마를 물리치는 모습이다. 카이 카부스(Kai Kavus) 왕이 마잔다란(Mazandaran) 원정에서 실패해 그와 군사들이 포로가 되자, 로스탐이 그들을 구하러 나선다. 로스탐의 영웅담은 7번의 모험을 통해 절정에 다다른다.
첫 번째 로스탐이 자신의 말 락쉬(Rakhsh)를 타고 마잔다란으로 향하다 잠을 자는데, 사나운 사자가 나타나 락쉬를 공격한다. 락쉬는 자신의 이빨과 뒷발로 사자를 물리친다. 두 번째 로스탐이 락쉬를 타고 사막으로 들어갔으나 물이 없어 갈증에 시달린다. 신에게 기도하니 양이 나타나 그를 샘으로 안내한다. 로스탐은 진정으로 신에게 감사한다.
세 번째 로스탐은 무시무시한 용을 퇴치한다. 네 번째 로스탐이 숲속의 시냇가에서 쉬고 있는데, 놀랍게도 사슴구이, 빵, 소금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탬버린과 와인병이 있는 것이다. 그는 악기를 들고 노래를 부른다. 그때 노래 소리를 들은 묘령의 여인이 나타나 그의 옆에 앉는다.
그녀가 악마라는 사실을 모르는 로스탐은 그녀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술을 한 잔 따라준다. 그러자 그녀가 검은 악마로 변해 그를 공격한다. 이에 로스탐은 올가미를 던져 악마를 사로잡는다. 그리고는 칼을 꺼내 악마를 두 동강 낸다.
다섯 번째 로스탐은 마잔다란에 있는 악마의 소굴을 공격해 마왕 아르장 딥(Arzang Div)을 살해한다. 여섯 번째 로스탐은 악마의 소굴에서 카이 카부스왕을 구한다. 그러나 카부스왕은 마법에 걸려 눈이 멀어 있었다. 일곱 번째 마지막으로 로스탐은 하얀 악마 디베 세피드(Div-e Sepid)를 무찔러 죽인다. 그러자 악마의 심장에서 피가 흘러나와 카이 카부스왕의 시력을 회복시켜준다.
이곳에 있는 벽화는 로스탐이 하얀 악마 디베 세피드를 공격하는 장면이다. 이들 두 주동(Protagonist)과 반동(Antagonist) 주변에는 이야기 속의 동물들이 보인다. 말, 사자, 양, 사슴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검은 악마와 마왕 아르장 딥도 보인다. 그 외 공작, 토끼, 멧돼지, 새 등이 보인다. 나무와 꽃도 있다. 이를 통해 이곳이 영웅시대의 배경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궁전과 오렌지 정원으로 이루어진 성채
우리는 이제 문을 통해 성채 안으로 들어간다. 궁전은 분수대가 있는 수로, 오렌지정원, 본채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수로가 동서로 길게 이어지고 그 끝에 궁전의 본전이 위치한다. 본전에는 바람의 탑이 있어 한여름의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먼저 수로와 분수 그리고 정원을 살펴본 다음, 오른쪽으로 돌아 본전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수로에는 물이 가득해 정원에 물도 공급해주고 여름에는 더위도 식혀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사는 동물들에게는 식수로 역할도 한다. 더욱이 궁전이 물에 비치는 모습이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날이 더워지면 분수를 가동할 것이고, 그럼 궁전에 생동감을 더해줄 것이다. 이슬람 건축의 아름다움은 물과 나무 그리고 건물이 조화를 이루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오렌지 정원에서는 인부들이 열매를 따고 있다. 우리처럼 일일이 손으로 따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흔들어 열매를 떨어뜨리는 방식이다. 그리고 떨어진 열매를 부대자루에 담아 운반한다. 우리가 몇 개 얻을 수 없느냐고 하니까 흔쾌히 준다. 그렇지만 오렌지를 먹어보니 너무 시어서 다 먹을 수가 없다. 이곳의 오렌지는 식용이기보다는 가공용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궁전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다
우리는 궁전의 동쪽과 북쪽으로 지나가면서 외관을 살펴본다. 벽에 그림들이 있었을 것 같은데 일부가 훼손되어 있다. 잔드 왕조를 무너뜨린 카자르시대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남쪽의 벽은 나무문과 유리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거나 외부와 소통할 수 있다. 이곳 남쪽 궁전은 주거공간 또는 업무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들을 지나 나타나는 서쪽 궁전은 왕이 거주하면서 집무를 보던 통치공간이다. 이곳은 안으로 들어가 내부공간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왕의 집무실에서 우리는 벌집모양의 무까르나스, 채색벽화, 격자문과 꽃무늬가 어우러진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금박을 많이 사용해 화려함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들 그림 역시 훼손된 부분이 많다.
바로 옆방에는 카림 한 왕이 프랑스 사절을 접견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칼을 찬 카림 한 왕이 앉아 있고, 그 옆에 아부 알 파트 왕자가 서 있다. 좌우에는 관리가 좌정하고, 앞에서 프랑스 사절이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그는 왕에게 교역을 제안하고, 왕은 그러한 제안을 경청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잔드 왕조는 대외교역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국, 러시아 등 신흥 강대국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잔드 왕조로부터 카자르 왕조에 이르는 18-19세기는 서방 제국주의 침략이 절정에 달하는 때다. 또 무력에 있어서도 동양의 국가들이 서양 강대국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앉아서 국토와 이권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종족간의 갈등이 있었으니 나라가 잘 될 리가 없었다. 이란은 결국 영국과 러시아에 영토를 조금씩 잃어가며 페르시아의 영광과는 반대방향으로 몰락해 가게 되었다.
목욕탕 하맘에도 들어가다
우리는 서쪽 궁전의 현관으로 나와 수로와 정원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완벽한 대칭과 반영이다. 이것이 이란 근대 이후 건축의 특징이다. 우리는 서쪽 궁전에 있는 기념품점에 잠시 들른 후 왕가의 목욕탕 하맘으로 이동한다. 하맘은 동쪽 궁전에 마련되어 있다. 1970년대 말 내부가 훌륭하게 리노베이션되어 물만 공급하고 시설만 가동하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다.
하맘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탈의실 겸 휴게실과 열탕(Heating Room)이다. 우리는 탈의실을 지나 탕으로 들어가면서 내부를 살펴본다. 먼저 계단을 통해 휴게실로 내려가면, 가운데 대리석으로 조성한 8각형 수조를 볼 수 있다. 가운데 분수가 있어 물이 솟아올라올 수 있도록 했다. 현재는 가동되지 않는다. 사방으로 벽감 형태의 탈의공간을 만들어, 이곳에 옷을 벗어놓도록 했다.
이곳에서는 목욕 후 쉬면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벽감 안과 벽에는 동식물 모티브의 그림을 그려넣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구멍을 뚫어 햇빛이 들어오고 내외부 공기가 소통하도록 만들었다. 천장의 구멍, 이것은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건축의 지혜다. 우리는 이러한 천장의 구멍을 여행 내내 볼 수 있었다. 바람의 탑 역시 내부의 더운 공기를 외부로 배출하는 일종의 에어컨이다.
휴게실에서 옷을 벗은 왕족은 이제 열탕으로 들어간다. 계단을 통해 열탕으로 넘어가면 방 형태의 공간이 있다. 이곳은 다시 뜨거운 물, 따뜻한 물, 찬 물을 담을 수 있는 세 개의 공간으로 구분된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세 개가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물은 관을 통해 외부에서 공급된다. 사용된 물은 바닥의 관로를 통해 다시 외부로 빠져나간다.
탕의 입구와 벽에는 기하학적 문양들로 치장을 했다. 그렇지만 탕 내부에는 장식이 없다. 그것은 아마 물로 인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열탕 안은 소리가 울리도록 설계되었다. 그것은 외부에서 내부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맘을 포함한 카림 한 궁전은 1971년 문화유산청으로 소유권이 넘어가 보호를 받고 있다. 그 후 궁전은 수리와 리노베이션을 거쳐 관광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