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되자 문득문득 최은영 소설집 <쇼코의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작년에 읽고 '언젠가 리뷰할 책' 리스트에 올려놓은 책입니다. 7개의 단편 소설을 담고 있는데 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눈물을 짰던 기억입니다. 예쁘고 순한 7개의 소설들은 마치 예쁘고 순한 사람이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듯 따뜻했습니다.
제게 이 소설은 멀어지거나 헤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힙니다. 때로는 이유도 모른 채 좋아하는 그 사람과 멀어지게 되고, 때로는 이유는 알지만 헤어지기 싫어 애끓다 역시나 또 헤어지게 되고, 애달프게 사랑하지만 헤어지고, 그리워 미칠 것 같지만 헤어지고, 자책하면서, 후회하면서 또 헤어지고 맙니다.
소설 속에서 헤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건 우리도 그렇게 헤어지며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헤어질 땐, 우리에게 상대가 얼마나 필요한지, 우리가 상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상대가 우리를 얼마나 아끼는지, 상대의 삶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크기가 얼마나 큰지 등은 아무 소용없게 됩니다. 헤어진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는 거니까요.
표제작 <쇼코의 미소>는 자연스레 멀어진 '나'와 쇼코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멀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로 멀어진 것이지요. 자기 삶을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내보일 수 없는 사람은 때로는 이별을 택하기도 하니까요.
<씬짜오, 씬짜오>에서 엄마와 응웬 아줌마는 점점 멀어지다가 영영 서로를 보지 못합니다. 외로웠던 엄마에게 다가와 엄마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 주고 지지해주던 응웬 아줌마. 엄마가 잘못한 일도 아닌 일 때문에 응웬 아줌마와 헤어지고 나서 엄마는 다시 외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엄마는 순애 언니의 구차한 삶이 부담스러워 서서히 연락을 끊습니다. 그렇게나 따뜻이 잘해주던 순애 언니를 매몰차게 져버렸다는 생각에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고요. <한지와 영주>에서도 서로를 좋아하는 두 남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헤어집니다. 영주는 한지가 멀어지는 모습을 속절없이 바라보면서도 왜라고 묻지 못하고, 한지는 영주를 멀리하면서 슬퍼하고 또 때론 울지요.
<먼 곳에서 온 노래>또한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잘못인 줄 알면서도 상대를 미워하고 오해하고 또 증오하곤 하지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결국에는 이런 방식의 보호가 나조차도 보호하지 못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7개의 이야기 중 5개의 이야기는 '삶이 원래 그렇기에 헤어짐도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삶의 모습은 반복된 만남과 헤어짐으로 조금씩 갖춰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마지막 두 이야기는 저에게만은 다른 의미의 헤어짐입니다. 삶이 원래 그렇기에 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이유로도, 그 어떤 이유 없음으로도, 헤어지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헤어진 느낌. 그 헤어짐이 너무 원통해 주위 사람들마저 "애처럼 소리를 내서 울"어버리고 마는 헤어짐. 두 이야기는 세월호 사고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고로 헤어진 사람들<비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 사람밖에 없을 거예요. 소설에는 '세월호'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을 읽는 누구나 말자 할머니가 애타게 기다리는 손녀 지민이가 세월호 사고로 숨진 기간제 선생님이라는 걸 알 수 있지요. 말자 할머니의 딸 영숙과 박서방이 부쩍 수척해진 이유. 생전 울지 않던 사위가 흐느껴 울고, 딸이 느닷없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유. 이 이유들을 독자는 알고 있지요.
맞벌이 하는 딸네를 위해 아기 때부터 업어 키운 손녀 지민. 바깥일 하는 엄마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러웠던 딸 영숙의 모습이 두고두고 아팠던 할머니는 손녀만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손톱, 발톱 다 깎아주고 손녀가 뭐를 하든 오냐오냐하며 그저 사랑만 주었지요.
그런 손녀가 밝고 예쁘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흐뭇한 일도 없었습니다. 지민이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 힘이" 난다면서요. 기간제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이들 사랑도 듬뿍 받아냅니다. 그런데 1년 반 전, 손녀는 할머니한테 인사도 없이 훌쩍 중국으로 떠났다고 해요. 전화도, 편지도 안 되는 중국의 시골로 선생일을 하러 간 손녀를 할머니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그리워합니다.
손녀가 중국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세월호 사고로 떠났다는 걸 아는 독자는 할머니의 모습 때문에 눈물짓게 되지요. 암이 재발한 말자 할머니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안으로 고통을 꾹꾹 눌러 담는 지민이 엄마, 아빠의 모습 때문에 또 눈물이 나고요.
소설가 최은영은 이 소설로 세월호 사고를 바라볼 때 잊지 말아야 할 시선을 제공합니다. 사고로 인해 떠난 모든 이들은 누군가가 가슴 미어지게 사랑했던 이들이라는 걸, 한 명, 한 명 모두 그렇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고요.
<미카엘라>가 제공하는 시선 또한 따뜻하고 의미 있습니다. 사고로 떠난 아이의 세례명도 미카엘라이고, 소설 화자의 세례명도 미카엘라이지요. 사고로 떠난 아이의 엄마 모습은 '나'의 엄마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기도 합니다. 이런 설정은 떠난 모든 이들이 우리 모두의 딸, 아들이라는 걸 말하지요.
소설의 인물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모두 광화문으로 향했다는 것 또한 소설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합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힘일지라도 당신의 아픔에 나 역시 동참하겠다는 작은 선언.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동참해달라는 호소. 대통령의 무정한 말도, 사람들의 지겹다는 말도, 우리가 타인에게 더 많이 공감하면 할수록, 점점 의미를 잃어갈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지 3년. 긴 시간이 흘러서야 육지로 올라온 세월호를 향해 비난의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끝까지 '돈, 돈' 거리는 사람들도 있네요. 리베카 솔닛은 <멀고도 가까운>에서 이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파하고 있는) 그들은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 그 사람 혹은 그런 사람들은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들 때문에, 그런 감정이입이 차단될 수도 있다"고요.
여기서 말하는 '그런 감정이입'이란 고통 받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공감을 해야 할 때, 돈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감정이입을 차단하려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군가 우리의 감정이입을 차단하려 한다면 우리는 더욱 더 감정을 이입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더 많이 공감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을 질책하면서, 타인의 고통에 더 고통스러워 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리베카 솔닛은 또 이렇게도 말했지요.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공감하지 못하겠다면, 공감하기 위해 배우라고요.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읽고,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라고요. 왜 그래야만 하는지, 왜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리베카 솔닛은 (너무나 당연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제가 아는 답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이라서, 라는 것밖에요.
덧붙이는 글 | <쇼코의 미소>(최은영/문학동네/2016년 07월 07일/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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