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날이 다가오니 까마득히 잊고 지낸 아버지가 그리워집니다.
1984년 겨울 어느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통에 겨워 일어나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하는 젊은 내 아버지(44살)작은 방 구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렴풋하게 알지만 죽음이 뭔지 모르는 나와(그때 나는 갓13살이 되었다.)두 살 많은 작은오빠 네 살 많은 큰오빠는 두려움에 찬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를 일으켰다 눕히는 큰고모는 큰일이라는 듯 애타게 동생이름을 부르는데 어느 순간 일어났다가 머리와 고개를 떨구며 멈춰버린 아버지 고모의 울부짖음은 커졌고 울음을 머금고 있던 나와 오빠들은 "아빠"를 부르며 비로소 울음을 터트리며 채 감지 못한 아버지의 두 눈을 꼭 눌러 감기는 고모를 어른거리는 눈으로 보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추운 한겨울의 모퉁이에서 숨을 거뒀다.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알기 전까지 마지막 순간 아버지가 감지 못한 그 눈 속에 담고 싶은 사람이 엄마일거라고 굳게 믿으며 두 분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작은 오빠에게 듣게 된 이야기는 아버지를 내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 찝게라고 불리는 주인 여자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고 그것이 들통나 곤혹을 치르고 얼마 안 있어 그녀의 남편이 보에서 미끄러져 강물에 빠져 죽었다. 그러나 동네에서는 자살이 아닐까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왜냐하면 그 집안은 대대로 씨름에서 우승을 할 정도의 장사집안인데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 집은 그길로 시내로 이사를 가버렸고 아버지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일과 죄책감과 부끄러움 미안함을 못 이겨 스스로를 갉아 먹으며 술독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자주 싸웠고, 강 건너 술집에서 쓰러져있으면 오빠들이 리어카를 끌고 가서 아버지를 짐짝처럼 싣고 와서 마루에 눕혀 놨다. 아니 던져 놨다는게 맞을 수도 있겠다. 리어카를 끌고 왔다갔다하는 오빠들은 아버지가 왜 안 죽을까 어서 죽었으면 하는 원망과 미움의 마음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부모님은 아주 싸웠고 큰 싸움이 있던 어느 날 아버지는 막걸리 주전자를 천장으로 던졌고 악다구니와 눈물범벅이 된 엄마는 강물에 빠져죽자며 내손을 끌었고 나는 버둥거리면서도 엄마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울었다. 정말 나를 데리고 시퍼런 강물로 뛰어 들 것 같았다. 막걸리에 얼룩진 천장은 그날의 싸움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아버지가 숨지는 그 순간 엄마는 걸어서 사십분쯤 가야하는 곳으로 겨우 내내 앓고 있는 아버지 약을 지으러 가셨다.아버지 돌아가시고 한참 뒤 돌아오셔서 그 절망스러운 소식을 듣고 주저앉아 슬픔에 겨워 통곡하다가 온몸이 굳어가고 오빠와 나는 엄마의 손발을 주무르며 울었다.
어린 나는 아버지의 죽음보다 슬퍼하는 엄마의 통곡 소리가 더 슬펐고 두려웠다. 장례를 집에서 치를 때었으니 아버지의 시신은 아랫목에 이불로 꽁꽁 덮어 두었고, 모여든 동네사람들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사잣밥을 지었고 아버지의 외삼촌-그분을 우린 '저 아래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때그분의 연세도 70을 바라봤을 것이다.-이 아버지의 흰옷을 지붕으로 던지며 '모월모일생 ㅇㅇㅇ'을 외쳤다.
동네사람들에게 초상이 났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고 죽은 사람의 혼령을 받아 들여 달라고 저승사자가 잘 볼 수 있도록 지붕위에 표시해 놓는 것이라고 한다.
무겁고 슬픈 안타까움이 또는 분주함이 있는 작은 집에서 나와 오빠는 제사상에 올라간 알록달록한 과자를 탐냈고 몰래 몰래 하나씩 집어 먹는 사탕과 과자의 달콤함에 행복하기까지 했다. 슬프게 빨간 그 사탕을 빨다가도 엄마의 울음소리만 들리면 엄마 울지 말라며 청상과부가 된 젊은 엄마를 더 슬퍼했다. 그때 엄마는 39살이었다.
그날 밤 '저 아래 할아버지'는 막걸리를 여러 잔 드시고 얼근하게 취해서 아버지의 염습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아버지 얼굴 볼 수 없다며 엄마와 언니, 오빠들과 나까지 불러서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라고 했다. 젊은 아내와 어린자식들의 통곡 속에 염습은 진행되었다. 아버지가 입었던 옷을 벗겨 몸을 닦고, 저승 가는 길이 머니 굶지 말라고 가는 길 노잣돈 하라고 쌀과 돈을 입 안 가득 넣었다. 그리고 수의를 입히고 천으로 아버지를 덮어 끈으로 꽁꽁 묶어 관으로 넣었다.
그 관속에는 젊은 아버지뿐 아니라 내 어린 시절의 추억도 같이 들어갔다. 군불을 때는 아궁이 앞에서 다정스럽게 어린 나를 보듬으며 된장찌개 맛을 보던 아버지. 아버지 무릎에 기대어 밥을 먹던 무서울 것 없던 어린 나도 . 나를 '생쥐'라고 불러주던 내 아버지. 그 뒤로는 아무도 나를 애칭인 '생쥐'로 부르지 않았다.
장례식 날 동네 젊은이들이 상여를 메고 '저 아래 할아버지'가 상두꾼이 되어 요령을 흔들며 저승길 가는 조카를 달래는 상두가를 불렀고, 아버지 생전 사둔 건넛마을 산으로 천천히 가기 시작했다.
저승 가는 아버지의 발길이 저 상여의 발걸음만큼 무겁고 힘들 것이다. 울다울다 지친엄마는 무명상복과 굴건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상여를 남편을 따라갔다. 상여를 멨던 동네 젊은이들도 상두가를 부르던 '저 아래 할아버지'도 모두 아버지처럼 저승으로 떠났고 슬픈 뒷모습으로 허망하게 남편을 따라가던 내 어머니는 그때의 뒷모습처럼 쓸쓸하게 아버지를 보냈던 그 집에서 혼자 살아가고 계신다.
아버지가 몹시 그리운 어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