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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목 관아에서 이루어졌던 전별연

충주목 관아
 충주목 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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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는 충청도의 수부(首府)로 조선통신사 전별연이 열렸던 도시다. 전별연의 내용은 제2차 통신사 부사 박재(朴榟)의 <동사일기(東槎日記, 1617)>에 비교적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박재는 1617년 5월 28일 창덕궁 인정전을 출발한다. 그리고 6월 3일 북진(北津)나루를 건너 충주에 도착한다.

4일에는 충주에서 하루를 쉬면서 연회(宴享)에 참석한다. 이날 날씨는 맑고(晴) 연회는 점심이 되기 전 사시(巳時)에 시작한다. 이 행사를 주관한 사람은 공홍도사(公洪都事) 김진(金縉)이다. 당시 충주목이 충원현(忠原縣)으로 격하된 상태여서 충청도의 이름이 공홍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김 도사가 감사를 대신해서 이곳에 온 것이다.

충주관아 복원도
 충주관아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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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 참여한 사신단은 정사, 부사, 종사관 삼사와 이들의 수행원들이다. 역관, 군관, 별파진(別破陣), 기패관(旗牌官)이 보인다. 그리고 공주, 서원(西原: 청주), 충원의 기녀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와 춤을 보여준다.

'상사의 자리가 동쪽 벽에 마련되어 있고, 부사와 종사관 그리고 공홍도사가 서쪽 벽에 마주 앉는다. 역학(譯學) 박대근(朴大根)과 한학(漢學) 정언방(鄭彥邦)이 그 다음으로 동벽 끝에 앉는다. 군관이 삼사의 뒤에 앉고 역관은 도사의 뒤에 앉는다. 별파진과 기패관은 남쪽 기둥 밖에 앉는다.

공주 서원 충원의 기녀들이 악기를 들어 상위에 올려놓고는 여민락(與民樂) 느린곡(慢曲)을 연주한다. 그리고 보허사(步虛辭)를 연주한다. 무동(舞童)이 상발(尙鉢)을 추고 영산회산(靈山會散)과 처용무를 춘다. 그리고 계면조(界面調)를 연주해 연회의 음악을 끝낸다. 일행과 노비는 중문 밖에서 연회를 본다. 초저녁에 상사가 연회를 보러 왔다.' - 박재의 <동사일기>

충주읍성과 관아 이야기

청령헌
 청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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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에서는 옛길 걷기팀을 위한 전별연을 준비하지는 못 했다. 그러나 하루를 쉬면서 충주의 역사와 문화를 탐방하는 행사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아침 8시에 충주관아로 모여 충주관아의 역사를 공부한 다음, 충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탄금대, 중앙탑, 충주고구려비를 살펴보기로 했다. 이 중 관아와 탄금대는 통신사행단의 기록에 자주 언급되고 있다. 

충주 관아에는 세 개의 건물이 남아 있다. 그중 청령헌과 제금당이 동헌과 객사 건물로 역사성이 있다. 1871년 충주목사 조병로가 충주읍성을 쌓으면서 관아 건물로 지었기 때문이다. 이들 건물은 1896년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의 충주성 함락과정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1981년까지 중원군청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었다. 그 후 관아공원으로 정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축성 사적비
 축성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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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공원 안에는 축성 사적비와 순교자 현양비가 있다. 축성사적비에는 충주읍성의 축성 과정, 성벽과 성문에 대한 설명, 축성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충주읍성이 1869년 2월부터 11월 사이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주읍성의 길이는 1303m, 두께는 8.25m, 높이는 6.6m이다.

읍성에는 4대문이 있었다. 동쪽이 조양문(朝陽門), 서쪽이 휘금문(輝金門), 남쪽이 봉아문(鳳阿門), 북쪽이 경천문(敬天門)이다. 북문인 경천문이 4대문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커 15칸이었다. 다른 문은 8~10칸이었다. 성문은 한양 도성 4대문에서 보듯이 홍예문 형태이며, 그 위에 문루가 있었다. 그러나 4대문의 문루는 1896년 의병들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충주읍성 성문
 충주읍성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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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읍성 성문은 다행히 사진으로 남아 있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충주읍성 홍예문 사진은 맥킨지(Frederick Arthur McKenzie)가 쓴 <한국의 비극: The Tragedy of Korea>(1908)에 나온다. 맥킨지는 <Daily Mail>의 기자로 도쿄에 주재했다. 그는 1904년 종군기자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영국 런던으로 돌아가 1908년 <한국의 비극>을 저술했다. 

탄금대를 제목으로 읊은 시문들

탄금대를 살펴보는 옛길 걷기팀
 탄금대를 살펴보는 옛길 걷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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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관아를 살펴본 걷기팀 대원은 버스를 타고 탄금대로 이동한다. 탄금대는 남한강과 달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작은 야산이다. 그런데 이곳에 수많은 역사가 서려 있다. 탄금대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연주하며 살던 곳이다. 우륵은 가야 사람이지만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신라에 귀화한 음악인이었다.

신라에서는 경주에 살던 가야 사람을 충청도 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을 실시했다. 이주한 가야인이 우륵, 강수의 아버지 석체,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 등이다. 우륵은 탄금대에. 석체는 금가면 도촌리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탄금대는 1592년 조선군과 왜군의 전투가 벌어져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크게 패한 곳이다.

탄금대 옛 모습
 탄금대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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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 제11차 통신사행에 정사 조엄(趙曮)의 서기로 따라간 성대중(成大中)이 <해사일기(海槎日記)>를 남긴다. 그곳에 보면 이들 일행은 8월 7일 충주에 도착한다. 그리고 밤에 문장가들이 사관(使館)에 모여 '탄금대를 지나며(過彈琴臺)'라는 시제(詩題)로 오언율시를 짓는다. 시짓기에 참여한 사람은 제술관 남옥(南玉), 서기 성대중, 김인겸(金仁謙), 원중거(元重擧) 그리고 반인(伴人) 홍선보(洪善輔)다. 그중 김인겸의 시를 인용해 보자.

탄금대라 흐르는 물 한을 남기고              遺恨彈琴水
일본국의 깊은 원수 어찌 잊으랴.             深讐野馬臺
산하는 오히려 기세가 웅장하건만            山河猶壯氣
원숭이와 학은 상기도 슬픔이 남았다오.    猿鶴尙餘哀
지나가는 나그네는 슬픔을 더하는데         過客增悲慨
외로운 배는 홀로 물결을 거슬리누나.       孤舟獨泝洄
섶에 눕고 쓸개 씹은 백년의 쓰라림          百年薪膽痛
떨어지는 눈물 감추며 동래로 내려가네.    掩淚下東萊

마지막으로 찾은 중앙탑과 고구려비

중앙탑 옛 모습
 중앙탑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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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탑과 고구려비는 통신사행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들 두 문화재가 충주의 간판이기 때문에, 옛길 걷기팀은 문화유산 답사 차원에서 이곳을 방문한다. 중앙탑의 공식 문화재 명칭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다. 이를 통해 이 탑이 탑평리에 있고, 7층석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충주 사람들은 이 탑을 중앙탑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중앙탑이 통일신라시대 국토의 중앙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중앙탑은 지금까지 8세기 말 신라 원성왕 때 세워졌다고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중앙탑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기념하는 탑이라는 주장이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이곳에서 절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탑의 조성양식이 경주 감은사탑이나 석가탑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중앙탑의 옛길 걷기팀
 중앙탑의 옛길 걷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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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 걷기팀원들은 설명을 듣고 탑을 한 바퀴 돈다. 중앙탑은 땅에서 계단을 통해 올라간 토단 위에 세워져 훨씬 더 웅장한 느낌이 든다. 일본 사람들은 주로 목탑을을 보아왔기 때문에 석탑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준다. 2중 기단, 7층 탑, 상륜부 장식 등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한다. 특히 1917년 일제강점기 수리보수 때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쉬움을 표현한다.

걷기팀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충주 고구려비다. 이곳에 고구려비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장수왕 때문이다. 그는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더 나가 한강 중류에 위치한 충주도 공략했을 가능성이 높다. 충주는 한강에서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남쪽 교통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시대 충주의 이름은 국원성(國原城)이었다.

충주고구려비
 충주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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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고구려비는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立石) 마을에 있다. 이 비석은 장수왕이 충주지역을 공략해 영토를 넓힌 것을 기념해 손자인 문자왕이 세운 척경비이자 송덕비다. 그리고 고구려가 신라와 상하관계에서 동맹을 맺은 회맹비다. 그 후 진흥왕 때인 550년 신라군이 한강유역에 진출할 때까지 충주는 고구려 땅이었다.

그리고 551년 3월 진흥왕은 점령지역을 순수하다 낭성(娘城)에 이르러, 우륵과 그 제자 이문이 음악을 잘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부른다. 왕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물며 그들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각 새 노래를 연주해 보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충주와 한강 유역은 백제, 고구려, 신라의 문화와 문화유산이 공존하는 지역이 되었다.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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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고구려비전시관에는 고구려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전시관, 역사전시관, 고구려비 전시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 사람들은 그중 가장 먼저 만나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큰 관심을 보인다. 그림에서 색채와 구도 같은 미학 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활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전시관의 광개토대왕비 탁본에 대해서는 그 크기와 내용에 감탄을 한다.

이들과 함께 문화유산 답사를 하며 우리가 지나치게 신라 중심으로 역사를 공부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삼국사기>를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역사의 틀을 한정했기 때문이다. 정말 신라가 고구려보다 먼저 개국했을까? 가야사를 그렇게도 무시해도 되는 건가? 사서에만 의지하는 테이블 사학의 문제는 없는가? 답은 늘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신사 옛길 걷기팀의 현장답사는 정말 의미 있는 행사다.


태그:#충주 관아, #전별연, #탄금대, #중앙탑, #충주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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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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