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유독 여성만 나이를 기준으로 '값'을 매깁니다. 한때는 25살 넘기면 '떨이 신세'라며 여성을 크리스마크 케이크에 빗댔죠. 지금은 그 기준이 조금 늦춰진 듯하지만 '서른 넘은 여자'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절대적입니다. 서른 넘으면 인생 끝날 것 같나요? '서른 넘은 여자'들이 서른 이후의 삶을 이야기 합니다. [편집자말] |
20대 후반이었을 때의 일이다. 30대 여성 작가를 인터뷰하는 자리에 나는 조금 지각을 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서 작가와 어느 대학교 앞 카페에 앉아서 떡볶이를 먹다가 문득 힘들다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전혀 정제되지 않은 언어였다. 매번 삶이 휘청거리는 느낌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아침에 깨고 밤에 잠드는 삶의 무게감을 견디지 못해서 버스 안에서 환한 햇살을 보다 울고 마는 순간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건넬 수는 없었다. 나 자신에게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기에 정제된 언어로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밑도 끝도 없는 '힘들다'는 내 얘기를 듣고 나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어조가 빠르고 단호한 편이었다.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 나는 도무지 그 작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19세에서 20세가 되면 투표권이 주어지듯이, 그런 식으로 무 자르듯 이런 감정들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내가 힘든 이유를 30대 작가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쌓아놨는지에 따라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쌓아놓은 게 많지 않아도 서른 되면 훨씬 나아질 거예요. 걱정하지 마요."여하간 나는 30대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말은 이유도 없이 크게 위안이 되었다. 그 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른을 맞을 당시에는 서른이 두렵지 않았다. 서른을 목전에 두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내게 여러 방식으로 서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농담처럼 하는 '신체 나이가 달라진다'는 말부터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 '서른 넘은 여자는 남자들이 만나기 무서워한다'는 이야기들이 주변을 빠르게 돌아다녔다.
아직은 초보 30대지만 1년 조금 넘게 30대로 살아본 경험을 돌이켜 보면 그 30대 여성 작가가 해준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잘 울고 쉽게 지치고 감정에 휘말리는 사람이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다. 모든 세상과 정서는 예전과 같았지만 견딜 수 없게 나를 후려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나는 더 많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겁을 먹지 않았다.
"순진함이 무기" 20대 여성에게 채워진 족쇄
게일 루빈은 1975년 논문 <여성거래>에서 여성의 경제적 '자산'으로서의 위치에 대해 분석했다. 많은 문명적 사회에서 여성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우호를 확인하기 위한 교환의 '파트너'보다는 증여의 대상, 관계의 연결 통로로서만 기능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신부를 '건네주는' 사회적 관습은 원시적 산물이 아니라 문명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여성이 교환되고 거래되는 문명은 결혼이라는 제도로 구성된 여성의 '성적 가치', 또한 '재생산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준에서 가장 '교환 가치가 높은' 여성은 성적 가치가 높고, 재생산 가치가 높은 여성이다. 충분히 문명화 된 사회에서 성적 가치는 단순히 젊음과 외모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성적 가치는 젊음과 외모에 더해서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치부하는 데에 저항하지 못하는 낮은 지위를 포괄하기 쉽다.
10대들이 '보호'라는 명목으로 억압당하기 때문에 성적 대상으로서 바라보는 데에 일정한 제한이 가해진다면 20대 여성에게는 더 이상 그런 보호가 적용되지 않는다. 세상은 무척 정교하게 20대 여성을 가장 적절한 교환 대상으로 점찍는다.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존재하더라도 20대 여성은 반드시 교환 대상으로서의 속성을 가진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술자리에 있을 때, 관계와 관계 속에서 농담을 주고받을 때.
물론 30대나 40대가 되더라도 큰 틀에서 이 속성은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대 여성의 '낮은 지위' 조차도 성적 가치로 환원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20대 여성의 미숙함이나 순진함은 곧잘 가장 높은 성적 가치로 포장된다. 덕분에 온갖 연애 관련 자기계발서에는 모르는 척하면서 '순진함'을 어필해서 남성들의 마음을 뺏으라는 조언이 수두룩하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미숙함을 가장하거나 성적 가치를 부각시켜서 좀 더 편안하게 사회의 여러 고리들을 통과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어떤 남성들은 이런 20대 여성의 특징을 '권력'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권력'에 대한 질시에는 곧잘 남성 자신의 성적 가치에 대한 열망이 투영된다.
물론 이런 종류의 인정이나 가치들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실제로는 자존감을 좀먹기 쉽다.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부여된 권력은 노력해서 얻은 권력도 아닐 뿐더러, 그 자체로 주체적 가치가 부여되는 것도 아니고 교환 대상으로서만 부여되고 있다. 돈을 가진 누군가가 좋은 물건을 거래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확하게 권력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성적 가치가 교환 대상으로서의 가치라고 하더라도 일단은 그것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여성 자신에게도 그 가치는 소중하다. 이 가치는 마치 타인의 욕망이 있는 한 여성에게 통제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자기 자신의 통제권을 넘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정확한 의미에서 권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치 '권력'인 것 같은 환상이 되기 쉽다. 아무런 노력 없이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부여되는 유일한 가치가 이토록 불안정할 때 여성 자신의 삶은 당연하게 불안정하다.
선망과 질시를 동시에 받는 이 '권력'은 불안정하면서 동시에 비대칭적이다. 교환 가치로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성은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버려야 하는 것들 속에는 아주 중요한 자아의 부분들이 들어있다. 자신의 의지, 지식, 윤리, 신념 같은 것들이다. 성적 가치로 평가받아야 할 20대 여성이 이것들을 강력하게 드러낼 때마다 역시 사회는 교묘하게 여성을 처벌한다. '여자답지 못하다'거나, '그런 여자는 매력이 없다'거나, '나이답지 않다'는 말로 포장되는 수많은 처벌들이다.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그 '권력'조차도 쉽게 빼앗을 수 있다는 위협 앞에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여성들은 나약하다. 그런가하면 때로 그 권력을 자신의 힘으로 휘둘러서 사회적 고통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여성들에게는 '걸레', '된장녀' 같은 처벌이 따라온다. 도망치려고 해도 존재 그 자체가 거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는 도무지 도망칠 수가 없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에서 20대 초반의 여성들에 대해 "그들의 의식으로 무엇을 할지 모르는 의식화 된 집단"이라고 서술한 바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한 '권력'에 대해, 그것이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자유와 구속을 선사하는지에 대해 20대 여성들은 직관적으로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소유자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 있는, 이미 사회의 자산에 속한 것처럼 취급받는 이 '권력'은 막강하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때로는 동료 여성들도 '성적 가치가 있는' 20대 여성이 사회적으로 착취당하는 데에서 동지가 되어주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망에 속해있는 한 여성들에게도 20대 여성은 훌륭한 증여 대상이다. 가장 매력적인 교환 대상, 젊고 미숙(할 것으로 기대되는)한 여성은 대부분의 인간에게 증여해서 일정한 이득을 얻거나 혹은 증여받고 싶은 대상으로 존재한다.
물론 경제적 상황과 지위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20대 여성에게 자신이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증여할 수 있는 권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이 자신의 성적 가치일 때조차도.
20대 여성들은 이 '권력'의 어긋남을 예민하게 감각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거래 대상으로 바라보지만 그 자신은 명확하게 자아를 가진 인간으로 존재한다.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에게 속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자아는 끊임없이 부정 당한다. '권력'은 여성 자신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이기 때문에 사회는 계속해서 여성들에게 규율을 부과한다. 이것은 극도로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부당하다. 온갖 부당함의 교차점 위에 20대 여성의 성적 가치가 위태롭게 서 있다. 그리고 그 위태로움에 기반해서 사회는 문명을 조직한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30대의 삶'
30대가 될 무렵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았다. 여성의 가치가 오직 '성적 가치'에 있다고 판단하는 논리가 모두에게 팽배한 탓이다. 더 이상 사회가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호출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까지 쥐고 있던 유일한 '권력'을 내려놓게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쉽다. 그것조차 없다면 이제 가진 게 무엇인지, 무엇으로 자기 삶의 통제력을 호출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이제 30대가 되었다.
30대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깨닫게 된 것은 '거래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20대와는 다르게 책정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서른 살이 된다고 해서 갑자기 여성이 거래되는 사회에서 혼자 툭 튀어나와서 다른 길을 걷게 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거래 대상으로서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선으로 여성을 바라본다. 그러나 20대의 여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섹슈얼리티에 압도적으로 기울어진 가치가 부여되지는 않는다. 또한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성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통제할 수 있는지를 좀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30대의 여성에게 사람들은 미숙함과 순진함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떨어질 것이고, 무서워서 남자들이 대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사회가 협박하는 지점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상당히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29살에서 30살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나이가 확연하게 든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이제 어느 정도의 예의를 갖춰서 여성으로서의 나를 대하려고 시도한다. 서툰 대상이 아닐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에 내가 살아온 역사를 두려워한다. 그렇기에 나는 내 가치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풍성한 삶을 기껏해야 '성적 교환 가치'로 대하는 사회와 얼마만큼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당한 기대는 줄어들었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자신의 삶에서 어느 정도 차단하거나 통제할 수 있으며, 이제는 어느 정도 이뤄놓은 것들도 있다. 많은 오류와 상처들을 거쳐서 삶은 더욱 안온해졌다. 사회는 "30대가 되면 더 이상 성적 기대를 받지 못해서 불행할 것"이라고 협박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여성으로서는 좀 더 숨통이 트이는 일이다.
열아홉 살 때 음악을 듣다가 스물아홉이 되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3호선 버터플라이의 <스물아홉, 문득>이라는 노래를 듣고 있었다. "예전엔 뛰었었지, 아주 빠르게/ 지금은 난 더 빠르게 걸을 수 있어"라는 가사 때문이었다. 달아나기 위해서 뛰는 것 말고는 어떻게 속도조절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 삶에서 그때가 되면 다른 방식으로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전 아이유의 신곡인 <팔레트>를 듣다가 그때를 생각했다. 사회가 어떻게 나를 대하는지와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아주 열심히 생각하면서 자아를 지켜나가야 했던 순간들. 나를 거래하면서 유지되는 세상 속에서 비단 성적으로 거래되지 않을 자신의 유일함을 생각했던 기억들.
서른 되면 괜찮아진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성들은 성적 가치로만 책정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 때문에 울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고통받지 않고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의식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의식화된 집단"에게 진심으로 응원을 보낸다. 우리는 함께 이 부당한 교차점을 박살낼 수 있을 것이다. 20대가 고통스럽지 않도록, 30대가 협박당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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