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환호
"10, 9, 8, 7........3, 2, 1, 땡!"지난 5월 9일 저녁 8시. 많은 가정이 마찬가지였겠지만 우리 집 역시 매우 소란스러웠다. 김치 겉절이에 막걸리를 마시던 아빠와, 안주도 없이 맥주를 들이키던 엄마와, 뭐가 그리 좋은지 흥분한 삼남매가 함께 TV를 보며 출구조사 카운트다운을 외치고 있었다.
문재인 41.4%! 아내와 나는 환호성을 질렀고, 아이들 역시 그런 엄마, 아빠를 따라 함께 소리를 질렀다. 결국,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구나! 드디어 정권교체가 이뤄졌구나! 벅차오르는 기쁨에 아내와 연신 건배를 해가며 술을 들이켜고 있는데 옆에서 까꿍이가 물었다.
"아빤, 문재인이 대통령 되어서 좋아?""좋지.""왜?""응? 문재인이 대통령 되면 세월호 가족들도 위로해 주고, 4대강도 복원해주고, 박근혜도 혼내주고, 지금까지 잘못되어가던 나라를 바르게 해주겠지. 넌 어때? 너도 좋아?""응. 나도 좋아.""왜?""엄마, 아빠가 문재인 좋아하잖아. 아빠는 문재인 찍은 것 같고, 엄마는 1번인지 5번인지 잘 모르겠고. 우리 반 은미(가명)는 3번이 좋대. 걔네 아빠는 3번 찍을 거라고 했고, 엄마는 2번 찍을 거라고 했대."
아이의 대답을 듣고 있자니 그날 오전에 투표하고 본가에 건너갔을 때 어머니한테 들었던 잔소리가 다시금 생각났다. 어머니는 TV에 문재인 후보가 나오자 환호하는 아이들을 보며 한마디 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한테는 너무 그러지 마라. 조그마한 녀석들이 뭘 안다고 계속 문재인, 문재인 하냐. 주위에 어른들 보면 안 좋아해.""뭐, 일부러 가르치나요. 엄마, 아빠가 뉴스 보면서 하는 이야기,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 들으면서 자기들도 알아서 판단하겠지. 저도 그랬는데요 뭐.""그래도 어쨌든 조심해. 아직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몰라. 너도 글 너무 과격하게 쓰지 말고."매번 듣는 어머니의 노파심 섞인 걱정이셨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지만, TV 선거 결과를 보며 방방 뛰고 있는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은근히 가슴 한편 켕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내 정치적인 견해를 강요하고 있는 걸까? 아이들한테 어려서부터 종교에 대한 편견도 심어주기 싫어서 '인간은 어떻게 생겨났어?'라는 질문 하나에도 조심하는 나인데 정치적 성향은 너무 가감 없이 표현하는 건 아닐까? 문득 1987년 가을이 떠올랐다.
대통령은 역시 '보통사람'이지1987년 당시 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뜨거웠던 6월을 지내고(물론 초등학교 3학년은 잘 모른다), 12월 대통령 투표를 앞둔 가을 어느 날, 친구와 나는 하굣길에 열띤 토론을 벌였다. 친구가 먼저 물었다.
"희동아, 너는 이번에 누가 대통령이 되면 좋겠어?""응? 글쎄. 우리 아빠가 1번이 좋다던데? 1번 노태우.""에이. 무슨 노태우냐. 2번 김영삼이 대통령 해야 된데.""무슨 소리야. 노태우가 키도 크고 잘 생겼잖아.""그래도 노태우는 나쁘다고 하던데.""아냐. 노태우가 '보통사람'이라고 하잖아. 대통령은 '보통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야. 그리고 김대중이나 김영삼은 욕심이 많아서 서로 대통령 하려고 하잖아. 그런 사람들은 대통령이 되면 안 돼."친구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나의 '보통사람' 논리에 그만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나는 자랑스러웠고, 다시금 노태우 대통령을 강조했다.
1987년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당시 경찰관이던 아버지는 틈만 나면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후보가 나와 있던 책들을 집에 가지고 오셨는데, 어린 눈으로 봐도 그들은 집 책장에 꽂혀 있던 <동교동 24시>의 찌질한 김대중 후보의 모습보다 훨씬 멋져 보였다.
거기에 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친구가 2번 김영삼 후보를 지지한 것은 그네 엄마와 아빠가 부산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짐작했고, 전라도는 김대중, 충청도는 김종필 후보를 지지한다고 하니, 서울 사람인 난 노태우를 지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초등학교 3학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TV를 보시던 아버지는 기쁘신 듯 보였고, 어머니는 조금은 실망한 듯 보였다. 그럼 뭐 어떠랴. 내가 지지하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는걸. 이제 '보통사람'의 시대가 열리겠지.
이후 내가 노태우를 한때나마 지지(?)했다는 걸 부끄러워하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다. 책장에 꽂혀 있던 전두환이나 노태우 등에 관련된 책자들은 아버지가 강매당한 것임을 알게 되고, 어렸을 때 화곡동에서 종암동 큰집을 가면서 연세대 앞에만 가면 왠지 매캐했던 것이 최루탄 가스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 이후였다.
그렇게 내게 1987년 대선은 강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었지만 어렸을 때 봤던 노태우는 매력적이었고 그의 귀는 유난히도 컸었다. 그는 내가 지각하는 첫 번째 대통령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성공해야 한다
생각이 나의 1987년 대선까지 미치자 아이들한테 괜한 책임감이 들었다. 나 역시 굳이 강요는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을 정치와 관련하여 거의 모든 정보에 노출시키지 않았던가. 태극기를 보면 노인들을 떠올리고, 박근혜를 말하면 당연히 '퇴진해라'라는 문구를 읊조리고, 광화문이나 청계천을 보면 촛불 집회를 이야기하는 아이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지만 개인적으로 후회는 없다. 민주시민으로서 나는 지난날 최선을 다했고,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이 사는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2016년 촛불과 2017년 대선에 대한 기억은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다. 아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선택할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세상을 나름대로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런 아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겠지.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그런 아이들을 위해 민주주의의 주춧돌을 한 층 더 쌓는 일이다.
아마도 9살 까꿍이에게 첫 대통령은 박근혜일 것이다. 녀석에게 대통령이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는데도 태연히 머리를 올리고, 거짓말을 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좌파라고 칭하며 척결하려던 이였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그 나잇대 아이들이 대통령을 꿈꾸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배출해냈던 우리 세대의 잘못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바란다. 부디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주시라. 그래서 우리 까꿍이의 트라우마를 치유해 주시고 7살 둘째와 5살 막내의 멋있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되어 주시길. 아이들의 첫 번째 대통령으로 당신을 지지했던 아빠가 부끄럽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