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불평등, 억압에 분노하기보다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실리를 추구했던 그의 태도 가운데서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는 현대인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 <이완용 평전> p.299이완용 그리고 그를 포함한 을사오적이 '매국노'라는 평가는 평가를 넘어서 하나의 손 댈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간주된다. 좌우, 세대를 막론하고 역사에 대해 논할 때 조선 망국사의 중심에 있었던 이완용에 대한 저주와 비난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한다. 마치 이순신이 모든 국민들에게 언제나 영웅적 존재로 존경받고 추앙되는 인물인 것처럼, 이완용은 그 정반대의 대립물로서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존재부터가 발칙하다. 그런 이완용에게 '합리적 인간'이라는 명칭을 수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완용 평전>의 부제는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이다. 저자 김윤희씨는 서문에서 자신의 이완용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발칙한" 일탈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음을 담담히 고백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반드시 써내려 가고 싶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완용의 모습에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완용이라는 인물을 지금처럼 우리와는 다른 타자로 고정시켜서 공격하기보다는, 또 다른 우리가 바로 이완용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비판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목적 아래에서 이 책은 집필되었다. 과연 저자의 그런 도전은 타당한가?
왜 이완용은 '매국노'가 되었나
여타의 평전들처럼 이 책도 이완용이라는 개인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며 곳곳에 저자의 의견을 덧붙이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한일 병합의 과정에서 이완용의 행적이나 역할은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기술되어 있을 만큼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 전후의 방대한 개인사는 쉽게 접해보지 못한, 그렇기에 흥미로운 내용이다.
약 300여 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펼쳐진 이완용의 삶은 한 마디로 '줄타기의 달인'이었다. 격변의 시대, 수많은 인물들이 정계에 혜성같이 등장하고 낙엽처럼 쓸려나가던 정국이다. 그의 적도 동지도 하루아침에 집권과 실각을 오가는 상황에서 그는 꾸준히 정계의 중심에서 머물렀다. 중간의 부침은 있었으나 완전한 실각은 한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대신 정동파(친미)와 친러, 반일과 친일 그리고 정통관료와 매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보신과 출세를 위한 행보를 이어갔다.
말은 쉽지만 결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쪽에 줄을 대고 있는, 심지어는 특정 세력을 이끄는 수장이 된 상황에서도 다른 외세에 끊임없이 몰래 줄을 대며 제2, 제3의 계획을 마련하는 행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성공한 것은 이완용이 유일했다. 그 결과 그는 조선을 대표하여 나라를 일본에 '넘길 수' 있었고, 대신 죽는 순간에 조선인들 중 재산 보유량 2위, 공직 서열 1위의 위치에 올라가 있었다.
<이완용 평전>의 저자는 이완용의 이 같은 행보를 왕조에 대한 충성심과 그 개인의 합리적 성격에서 비롯된 일이라 파악한다.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유학 교육까지 철저하게 받았던 그에게 왕, 즉 고종의 의중을 읽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심각한 해가 갈 수 있는 길은 철저하게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 그것이 결국 그가 수차례의 변신 끝에 1900년대 들어서서는 '매국'이라는 행위에 앞장서게 된 근원이라는 평가다.
이유 있는 접근, 그러나 이해 없는 평가 얼핏 들으면 이상한 주장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책의 내용에서 드러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의 정국은 혼란의 끝이었고, 그 안에서 고종은 일관적으로 자신의 왕권 강화만을 제1 목표로 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에 개화 세력의 좌초나 민란의 발생 등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오히려 목표에 대한 걸림돌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그런 고종의 의중을 따라 매순간 고종이 지원을 끌어내기를 원하는 외세가 어디인지 파악하고 그쪽으로 세를 만드는 데에 이완용은 천부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향한 왕실의 신임도 대단했던 것이다.
한일 병합 당시에도 고종은 사전에 이완용에게 조약의 내용을 협상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를 대리인으로 삼기까지 했다. 어찌되었던 이완용이 고종, 순종과 이왕(李王)가의 지위는 보존 받아 낼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그는 고종의 희망에 부응하는 결과, 즉 왕실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대접을 보장받았다.
그렇기에 저자 김윤희는 이완용의 행보가 그 개인의 악랄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지 않는다. 당시 조선 왕실과 사회의 역량이 이미 나아가고 있던 길이 있었고, 이완용은 거기에 순응하고 자신을 맞추는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최대한 그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는 그런 모습을 보고 저자는 이완용을 '합리적' 혹은 '현대적' 인간형이라 평가한다.
그 자신도 이러한 평가가 도발적일 수 있음을 감지한 탓인지 강한 어조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책의 서문과 말미에서만 자신의 평가를 강조할 뿐이다. 대신 책 내용 중에는 줄곧 소심하게 느껴지는 어조로 이완용의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고, 그의 개화에 대한 인식과 깨어있음을 알려주며, 개인적 성품의 검소함을 변호하는 논조를 드러낸다.
이러한 평가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했다는 점에서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납득하기에는 매우 불편한 평가다. 공동체를 위하는 행위랑 개인을 위하는 행위가 반대일 때가 있다, 그럴 때 개인을 위한 선택을 내리는 것은 '합리적'인 인간이다 - 라는 평가는 전혀 새롭지 않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저 순응하는 게 더 나은데도 끊임없이 부조리와 맞서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수 년간의 배척을 견뎌낸 윤석열 검사, 리스크를 감수하고 최순실 게이트를 폭로한 내부 고발자들, 그리고 추운 거리에 촛불을 들고 나선 시민들까지. 이런 현대인들의 모습을 놔두고 이완용의 행동을 합리적인 현대인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논리라면 우병우도 현대인의 대변자인가?
<이완용 평전>은 한 인간의 다면성에 지나치게 꽂힌 결과물로 읽힌다. 이완용이라는 인물의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측면에 집중한 나머지 그가 사회적 지탄을 받는 이유를 망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이완용을 변호하려다 합리성의 가치마저 무의미한 것으로 격하시키고 만 저자의 논조는 그렇기에 진정한 '현대인'의 가치, 모습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 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