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나는 시카고에서 살고 있는 큰 아이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시애틀에 사는둘째도 방문하여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이게 되었다.
집에 둘만 남게 된 어느 날 아이가 옆에 오더니 할 얘기가 있다고 말을 붙여왔다.
"엄마에게 할 말 있는데..." 결혼? 아니면 안 좋은 일? 스치듯 여러 생각을 하던 와중에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은 "나, 트랜스젠더야" 였다.
이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래?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당황한 나는 이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자신은 여자라고 생각해왔고 현재 상담을 받으면서 여성호르몬 치료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이 커밍아웃을 하면, 최악의 경우 집에서 쫒겨날 수도 있다는 생각했다고 한다. 35살에 독립해서 살고 있는 아이가 쫓겨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 사건 이후 어느새 1년이 흘러갔다. 그간 '어째서 나와 나의 가족, 특히 우리 아이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원인이 무얼까' 마음 아파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가 30년이 넘는 시간을 혼자 고민하고 아파하며 지낸 걸 생각하면 죄책감도 생기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내가 아이를 이해한다고 하고 도와주려는 마음만 있으면 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느날 아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국 거주 한인 성소수자 부모모임을 이끌고 있는 한 어머니가 '한국에서 열리는 포럼에 참석하는데 한번 만나보겠냐'고 물어왔다.
그분이 바로 트랜스젠더 아들을 두고 뉴욕에서 활동하는 '클라라 윤'씨로, PFLAG 아시아계 성소수자들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시는 분이다.
참고로 PFLAG(Parents, Families and Friends ofLesbians and Gays)은 1972년 미국에서 게이아들을 둔 한 어머니가 만든 가족과 지지자(ally)의모임으로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소수자 지지 단체다.
클라라 윤씨는 2016년 중앙대학교에서 열린 '아시아 LGBT 부모모임 초청 포럼'에 참석했고, 나는 어색한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클라라씨에게 다가가 첫 인사를 하는데 입을 떼기도 전에 눈물부터 쏟아졌다. 어떻게 소개를 끝냈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로. 이렇게 클라라씨와 만나며 자연스럽게 한국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일하시는 부모님들까지 만나게 되었다.
한국의 성소수자 부모모임은 오솔(활동가), 게이아들을 둔 두 어머니와 트랜스젠더 딸을 둔 어머니 한 분이 모여서 만든 모임이다. 2016년 5월 당시 전국에서 약 20여 명의 부모님이 모였다.
부모 모임은 매달 부모, 가족들 그리고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모여 본인 이야기도하고 상대방 이야기도 들으며 서로 위로했다. 당사자들의 커밍아웃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모임이다.
부모모임을 알게 되면서 처음으로 서울시청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도 참석하였다. 몇 년 전 시카고에서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구경한 적 있었는데 신나는 축제 분위기가 기억에 남는다. 많은 기업의 후원, 얼굴을 알리기 위해 애쓰는 정치인들의 방문까지. 정말이지 놀라운 광경이었다.
반면 서울에서의 퍼레이드는 또 다른 면에서 나를 놀라게 했다. 방송에서만 보던 기독교단체의 혐오세력들이 피켓을 들고 외치는 구호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들의 신념은 정말로 놀라웠다.
이어 대구 퀴어퍼레이드, 올랜드참사 촛불집회, TDOR(트랜스젠더 추모의날) 등 각종 행사에 참가하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 아이가 겪어야 할 현실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아팠다.
그래도 내가 부모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아이의 목소리는 밝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이야깃거리가 늘어났다. 모임에서 만난 친구나 부모들 이야기, 활동하면서 겪는 어려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 전에는 쉽게할 수 없었던 얘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이의 마음이 많이 편해졌을 것이다.
또 가족들이 지지해주고 대외활동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친구들 사이에서 자랑거리가 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부모모임에서 활동하면서 나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친구들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아직은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어쩔 수없이 나도 그들과 한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그동안은 불편하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로만 치부하고 애써 눈감았던 문제들이 하루 아침에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나의 과제가 된 것이다.
이런 과정들을 우여곡절 거치고 나서, 커밍아웃 후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아이와 둘이서 여행을 다녀왔다. 길을 가다가 호기심에 가득 찬 주위의 시선에 태연한 척 해보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아이도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시하다가도 한 번씩 짜증을 내곤 한다.
아이가 평생토록 주위의 불편한 시선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하다가도 '엄마인 내가 괜찮다는데 무슨 상관이냐. 내 아이는 내가 지킨다'며 속으로 되뇌곤 했다.
아이들의 커밍아웃으로 부모들도 또 다른 벽장 안에 숨게 되고 아이들과 단절까지 경험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 내 아이를 이해하고 부모 또한 벽장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다짐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성소수자에 대해 바로 알고 있어야 떳떳하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고, 성소수자에 대해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다.
물론 내 아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점점 담담하게 느껴지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매달 부모모임에서 '나는트랜스젠더 딸을 둔 엄마입니다'를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서로 웃고 울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이 단단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주위에 커밍아웃을 하고,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성소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무엇보다 성소수자를 편견없이 바라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글을 맺으며,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다. '성소수자가 문제가 아니라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편견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