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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뒤죽박죽이다. 예전 같으면 6월 중순에 수확했던 완두콩과 마늘 양파의 수확 시기가 올해에는 6월 초순으로 앞당겨졌다.

11년째 농사를 해온 개인의 경험만으로도 급격한 기후 변화는 피부로 느낀다. 이렇듯 기후변화로 인해 수확 시기가 겹쳐지면 농촌에서는 단시간에 해야 될 일들이 집중되는 바람에 농부들이 바빠질 수밖에 없다.

많은 학자들이 이상화가스 배출로 인한 지구 온난화가 심해지면서 이상기후 현상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산화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자동차 철강 석유재벌을 등에 업은 미국은 대통령이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는 사기'라면서 국제적인 기후 협약에서 탈퇴를 선언해버렸다. 농부의 입장에서는 결코 곱게 봐주기 어려운 폭거다.

아무튼 마늘과 양파를 수확하는 일과 완두콩 수확이 겹치고 거기에 매실과 개복숭아가 때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였기에 6월 들어 참 많이 바빴다. 그 중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투자한 일이 완두콩 수확이었다.

 "매실과 개복숭아가 때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였기에 6월 들어 참 많이 바빴다."
"매실과 개복숭아가 때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였기에 6월 들어 참 많이 바빴다." ⓒ pixabay

밭에서 뽑아 옮기는 일, 꼬투리를 따는 일, 다시 꼬투리에서 씨앗을 까는 일은 단순한 듯하지만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1시간만 지속해도 등판이 벌어질 듯 아파온다. 몸살 나는 일인 셈이다. 

완두콩 씨앗 1kg을 만드는데 나의 솜씨로는 보통 1시간 정도 소요되었는데, 가뭄 때문에 완두콩은 많이 말라버렸다고 해도 씨앗의 무게를 합산하니 20kg이 넘는다. 아내와 며칠간 매달렸던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매실은 익어서 절로 떨어지고 재래종 뽕나무에서는 오디 아닌 상심자(桑椹子)가 바람만 불어도 우수수 떨어졌다.

주인이 바쁜 틈을 노린 풀들은 꽃밭과 텃밭에서 세를 넓혔다. 마음은 바쁜데 체력이 예전 같지 않으니 일의 속도는 더디기만 했던 6월 초순이었다.

아내 역시 바빴다. 꽃밭의 풀을 매고 이미 시든 꽃들은 쳐내는 일, 그 빈자리에는 다른 꽃을 옮겨 심고 물을 주면서 다가올 여름과 가을의 꽃밭을 기약하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런 와중에 매실과 개복숭아는 씻어 물기를 빼어 설탕에 재고, 상심자는 모으는 대로 커다란 유리병에 담아 술을 채우거나 가볍게 씻어 비닐에 담아 냉동시키는 일을 했던 것이다.

매실 등 여름 과일을 설탕에 재어 유리병에 담가두면 설탕의 삼투압 현상에 의해 매실의 성분이 빠져나와 액체로 변한다. 그런데 아내는 그 액체에 대한 명칭을 '효소' 혹은 '엑기스'라고 혼용한다.

TV 건강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도 통일된 의견은 보이지 않는 듯하다. 사전을 찾아보면 '효소'란 체내의 대사 작용을 도와 인체 내의 장기가 제 기능을 하도록 돕는 촉매 역할을 하는 물질이라고 한다. 반면 '엑기스'는 영어로 추출액이라는 뜻을 지닌 엑스트랙트(extract)의 일본식 표기임을 알 수 있다. 같은 물질에 '효소'나 일명 '엑기스'라는 표기가 혼용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매실 등의 과일을 설탕에 재는 풍습이 일본에서 전해온 것 아니냐는 의심도 들게 한다.

우리나라에도 김치나 막걸리 된장 간장 등 시간을 두고 발효 숙성시켜 직접 먹거나 음식물 조리에 활용했던 사례가 많다는 사실을 알기에 어쩌면 설탕의 보급이 대중화되고 매실의 공급량이 늘면서 우리가 새롭게 개발한 발효식품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과일이나 약초 잎을 섞어 추출한 액체인 일명 '엑기스'도 채소를 소금과 양념으로 발효시킨 김치 그리고 콩을 삶아 발효시킨 된장과 간장처럼 시간을 두고 발효시켰다는 점에서 발효액 혹은 발효식품으로 통일하는 편이 무난하지 않을까 여긴다.

내가 병나기 전에도 해마다 아내는 매실 개복숭아 오디 보리수 등 우리 집에서 나오는 과일을 설탕에 재어 '발효액'을 만들었고, 마늘 양파 두릅 등 채소는 소금물에 재어 장아찌를 만들었다. 그리고 매실 개복숭아 우슬뿌리 등은 담금 소주를 만들어왔는데 그런 술은 손님 접대용으로 쓰였고, 내 저녁 밥상에 반주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의 양은 많지 않았고 특별히 과일 발효액을 즐겼던 것도 아니었다. 당뇨와 심장병이 있는 나에게 이롭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아내의 생각이 바뀌었다. 사실 항암의 과정에서 대부분 환자들은 입맛을 잃게 되고 심지어 음식을 먹지도 못할 뿐 아니라 구토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암은 못 먹어 굶어죽는 병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지난 날 항암 중에도 그렇지만 수술 후에도 입맛을 잃었다.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맛있는 음식도 없었다. 평소 즐겼던 음식도 냄새가 싫어졌고 어떤 날은 음식을 보는 것으로도 헛구역질을 하며 외면했던 적도 많았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고 "입덧이 심한 임산부 같다"는 말을 했다.

그 때 나를 밥상으로 당긴 것이 식초로 버무린 무침, 새콤달콤한 매실과 개복숭아 효소와 마늘 양파 두릅 등 장아찌였다. 지금도 식초 무침이나 발효액으로 만든 소스는 거의 거르지 않고 먹는 편이다. 그런 과정을 지켜보았던 아내였기에 바쁜 중에도 나를 위해 '발효액' 과 식초와 된장 등 '발효식품' 담그는 양을 늘려 저장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런 아내를 보면서 내가 더 이상 탈 없이 완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읽는다. 

건강에 관심이 많아진 사람들이 늘었기 때문인지 초여름이면 집집에서 발효식품을 만드는 일이 연례행사가 된 것 같다. 덩달아 텔레비전의 건강 프로그램에서도 매실 외에도 다양한 약초, 심지어는 야생초까지 발효식품으로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난치병, 그중에서도 특히 암을 발효식품으로 이겨냈다는 사람까지 등장시키기도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환자와 가족들을 현혹하는 상업적인 의도가 짙은 광고성 프로그램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발효식품이 난치병을 고치는 특효약이라면 모든 환자들에게 무슨 걱정이 있으랴! 그러나 발효식품이 암을 치료하는 특효약이라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차이게 있겠지만 나는 식초와 '엑기스'로 입맛을 찾은 경험이 있기에 발효식품은 꾸준히 먹으면 환자에게 환자의 식욕을 돋우는 데 도움이 되는 기능성 건강보조식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모든 환자에게 통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환자와 가족들은 참고만 했으면 싶다.

6월은 발효식품을 만들기 좋은 계절이다. 가을에 무와 배추로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그는 일이 김장이라면, 겨울에 메주를 띄워 정월에 날을 받아 장 담그는 일은 가족의 1년 밥상을 위한 정결하고 엄숙한 전통예식이다. 그렇다면 6월 과일을 술이나 발효액으로 만드는 일은 건강한 삶을 기원하는 작은 희망축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나란히 늘어선 유리병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블로그, 한겨레필통 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효소 #엑기스#발효식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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