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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명을 만나기로 했다.

나는 3년에 걸쳐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만났으며 두 번의 '하루를 쓰다'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자금 0원으로 시작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꼼꼼한 답변보다 한 사람이 하루의 날짜를 써서 완성한 달력으로 노숙인 자활을 돕고 싶은 열정이 그 어떤 것보다 앞선 기획이었다.

공평한 하루를 이야기하고 존재의 평등함을 외치고 싶었다. 하루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하루와 만나기를 소원했다. 몇몇 사람에게 가슴 뛰는 꿈을 이야기했지만 시큰둥했다. 멋진 꿈이라도 현실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으면 실현하기가 어려울 거로 생각한 거 같았다. 무엇보다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살면서 이토록 확신에 찼던 적이 별로 없었다. 과정과 결과의 그림이 한순간에 머릿속에 그려졌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어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지난 2014년 1월 21일, 첫 번째 '하루를 쓰다'를 위해 붓과 먹 한지를 들고 노숙인이 밥을 먹는 추운 밤거리로 향했다. 2015년 7월 9일, 두 번째 '하루를 쓰다'를 위해 터키행 비행기를 탔다. 첫 번째는 노숙인의 자활을 위해서, 두 번째는 '도시 유목민이 쓴 아시아의 하루'라는 부제 아래 도시 빈민과 난민 다문화가정을 위해서 길을 나섰다.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2015년 달력과 2017년 달력을 만들었고, 달력판매 순수익금 전액을 원하는 곳에 기부했다. '하루를 쓰다' 전시로 공공예술의 아름다움도 보여주었다.

 2015 하루를 쓰다 전시
2015 하루를 쓰다 전시 ⓒ 최성문

하루를 쓰는 건 쉬웠지만 하루를 써줄 사람을 만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거리에 서서 이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서명을 받듯이 할 수도 있었다. 만약 이렇게 하루를 썼다면 한 달이면 다 끝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하루를 쓰다'는 하루의 날짜에 한 사람의 이야기와 더불어 그 사람의 하루를 담는 시간의 예술이었다. 타인의 하루를 깊이 들여다보며 나의 하루를 생각해보는 과정의 예술이며, 나의 하루를 내어주면서 타인의 하루를 품는 나눔의 예술이었다. 누군가의 하루를 만나기 위해서는 나의 하루가 필요했다. 열정은 발의 수고가 있어야 했다. 3년이 걸렸다. 

사람들이 '하루를 쓰다'를 물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사는 하루는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아이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 어떤 인종이나 종교도 차별 없이 우리가 사는 하루 24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집니다."

내 대답에 어떤 이들은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우리의 하루가 공평하다고요? 불공평합니다!"

"저도 알아요. 각계각층의 사람이 공평하게 하루를 쓴다고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죠. 세상이 불공평하기에 우리의 하루도 불공평하죠. 우리의 하루는 공평한데 하루를 불공평하게 만드는 건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하루가 공평하다고 우리의 존재가 평등하다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언젠가는 달라지지 않을까요?"

매번 물러서지 않고 대답을 했지만, 자본과 권력 계급으로 계속 팽창하는 세상의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흘린 땀과 피가 끝없이 이어졌는데도 여전히 이 세상은 불공평한 게 더 많지 않은가. 맥이 빠지고 회의감이 들 때마다 나는 아브하람 헤셀이 쓴 책 <안식>의 한 구절을 기억했다.

"시간의 영역에서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가, 움켜쥠이 아니라 내줌이, 지배가 아니라 분배가, 정복이 아니라 조화가 목표다. 공간을 지배하고 공간의 사물을 획득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될 때, 삶은 망가지고 만다."

 2017 하루를 쓰다 전시
2017 하루를 쓰다 전시 ⓒ 최성문

시간이 실존의 핵심이라는 아브라함 헤셀의 성찰은 '하루를 쓰다'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사람이 직접 시간을 그리고 하루를 담는 행위를 통해 사람의 존재가 주목받는 게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사람이 쓴 하루를 모아 만든 달력판매 수익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주는 것은 아브라함 헤셀의 성찰처럼 지배와 획득의 삶이 아닌 나눔과 조화의 삶으로 가는 작은 문 하나를 여는 길이었다.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이 흘러가는, 인간이 늙어가는 것과 자연의 순환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의 영역에 다가가는 일에 나는 경외감을 가졌다. 인간이 시간을 창조해낼 수는 없지만, 시간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길에서 나는 어떤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인가.

시작이라는 필연의 선은 내가 그었지만 과정과 결과의 길은 우연의 선이었다. 필연과 우연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365일이 완성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생각했다. 내가 쓴 책 <오늘을 부탁해>에서 쓴 글처럼 시인이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살다 보면 끝까지 못 갈 때가 많습니다.
미리 계산하고, 포기하고, 돌아섭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안락한 삶에 속지 않고
절망의 끝에 있을지라도 계속 걷다 보면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을 노래하는 시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볼 수 없는 걸 보는 사람,
노래할 수 없는 걸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끝까지 가다 보면 기쁨과 절망을 아는

시인이 된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루를 쓰다 탁상달력
하루를 쓰다 탁상달력 ⓒ 김도태

'하루를 쓰다'를 영어로 해석해보려고 애를 써보았다. 하지만 어려웠다. '쓰다'라는 건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언어다. '쓰다'라는 기록과 '산다'라는 생명과 '내어준다'라는 나눔의 의미가 담겨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가진 것을 나눈다는 의미가 담긴 '쓰다'는 쓴다는 행위 그 자체이기도 하기에 '하루를 쓰다'라는 제목은 참 적절했다. 하지만 영어로 이 모든 의미를 담을 수 없었다. 나는 미국에서 사는 오빠의 도움을 받아 함께 어렵게 영어 이름을 'Living one story a day'로 지었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하루 만큼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괜스레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간의 유한함이 느껴져 뭉클해졌다.

나는 3년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 노숙인 탈북인 장애인 문화예술인 아이 농촌사람 암환우 난민 터키인 네팔인 중국인 몽골인 시리아인 일본인 캄보디아인 필리핀인 베트남인 키르기스스탄인 파키스탄인 태국인…. 차별과 편견을 뛰어넘자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는데 차별과 편견이 많은 건 오히려 나였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를 쓰다'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나였다.

나는 이제부터 부끄러운 고백을 할 수 있게 해준 '하루를 쓰다'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그대의 하루가 있었기에 달라진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그대와 나의 하루를 쓴다.


#하루를쓰다#공공예술#최성문#하루#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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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고 전시하고 공연만듭니다. 예술로 사람을 돕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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