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글리벡 투쟁'에 참여했다.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은 평생 먹어야 하는데, 한 달 약값이 약 3백만 원이었기 때문이다. '글리벡 투쟁'을 하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해, 그리고 에이즈 문제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약은 있는데 먹을 수 없는 기막힌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람들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에이즈는 1980년대 크게 유행하면서 전 세계가 공포에 떨었지만, 1996년부터 일명 '칵테일 요법'이라 불린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법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시작되면서 20년간 특허권을 보장해야 하는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이 발효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에이즈 약은 있었지만 특허권이라는 독점권을 보장받아 당시 1년 치 약값이 1천만 원이 넘었다.
199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의회는 에이즈 약을 싼 값에 공급하기 위해 의약품 특허에 대해 강제 실시를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강제 실시권은 특허권자만 독점 생산할 수 있는 약을 제3자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이다. 이 법을 저지하려고 무려 39개 초국적 제약회사들이 1998년 만델라 대통령, 국회의장, 보건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의회 책임자들 10명을 고소했다.
이에 맞서, 1998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에 설립된 치료행동캠페인(TAC)은 국경없는의사회(MSF)와 함께, 값싼 치료약의 공급을 막으려는 초국적 제약회사들의 횡포를 폭로했다. 치료행동캠페인 설립에 앞장선 재키 아크맛은 그 자신이 에이즈(아래 HIV) 감염인이었고, 이 질병으로 가까운 동료들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들의 캠페인에 130여 개국에서 28만5천여 명이 서명에 동참했고, 이 문제가 전 세계에 알려지자 초국적 제약회사들은 2001년에 소송을 취하했다. 이를 계기로,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이 결과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뺏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우리도 강제 실시권을 인정받아, 인도 제약회사들이 생산한 약을 수입할 계획이었다. 당시 인도는 의약품에 대한 물질특허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글리벡과 똑같은 약(generic)을 생산해 2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에이즈 치료약의 가격 또한 연간 2백 달러가 안 되었다. 2003년 봄 복지부는 글리벡 약값을 인하하지 않았고, 특허청은 강제 실시를 기각했다.
한편, 같은 해 4월 치료행동캠페인은 매일 6백 명씩 에이즈로 죽어 가는 현실을 방기하는 남아공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장례 투쟁을 조직했다. 재키 아크맛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에이즈 치료약이 무상으로 공급되기 전까지는 자신도 약을 먹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각국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에 미국의 활동가들은 6백 켤레의 신발을, 일본에서는 6백 장의 종이를, 네덜란드에서는 6백 송이의 튤립을 보냈다. 우리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는데, 특허청에서 글리벡 강제 실시 청구를 기각한 직후여서 유난히 슬펐던 기억이 난다.
6백 켤레의 신발, 30대에서 멈췄던 당시 아프리카 사람들의 평균수명, 에이즈로 사망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시립 공동묘지가 부족해지자 '다음 가족을 묻을 수 있도록 먼저 묻는 사람을 충분히 깊게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는 짐바브웨의 소식 등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럼 한국의 HIV 감염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생겼고, 이들을 만났으며, '에이즈 운동'을 하게 되었다.
2004년 7월 방콕에서 열린 국제에이즈회의에 참가했을 때 재키 아크맛이 광장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보았다. 살아 있구나, 안도감과 반가움에 울컥했다. 그런 그가 2008년 1월 파트너와 결혼할 때 주례를 섰던 이가 바로 에드윈 캐머런이었다.
현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에서 활동하는 서선영 변호사가 2011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헌법재판소 판결문을 구해 주면서 캐머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판결문은,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승무원 채용을 거부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내용이었고(호프만 대 남아프리카항공), 에드윈 캐머런에 대해서는 "남아공에 자신이 HIV 감염인이라는 것을 밝힌 법관이 있는데 헌재 재판관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판결 내용도, 캐머런 재판관의 이야기도 너무나 획기적이어서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바로 그 에드윈 캐머런이, HIV 감염인이자 게이로서의 삶, 그리고 법조인으로서 입헌 민주주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살아 온 삶을 책으로 냈다. 책 <헌법의 약속>(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나에게 HIV 감염인의 삶과 에이즈 문제를 고민하게 해준 앞선 노력자들의 세세한 기록들이 담겨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에드윈 캐머런은 담담하고 쉽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 법,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동안 주로 '성명서'를 통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상황을 접했던 나는 재키 아크맛이나 치료행동캠페인의 활동가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 전에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모였는지 몹시 궁금했다.
또한 만델라와 음베키 모두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을 위해 싸웠던 아프리카민족회 소속인데 왜 에이즈 정책에 대한 입장이 달랐는지도 의아했는데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캐머런이 긴긴 시간 수치심과 죄책감의 실체를 응시하는 대목에서는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 소수자들과 HIV 감염인들의 얼굴이 교차하면서 눈물이 났다다.
또 내가 접했던 HIV 감염인의 경험과 유사한 소송사건에서는 어떤 판결이 날 것인지 가슴 졸이면서 읽었다. 1997년 병이 깊어져 죽을 고비를 겪다가 항레트로바이러스제를 먹고 살아난 캐머런은 자신의 극적인 경험을 요행으로 여기지 않고, 돈으로 목숨을 사야 하는 비인간적인 시대의 증인으로 나섰다. 이 대목에서 윤가브리엘이 생각났다.
2003년 가을,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대표 윤 가브리엘을 만났을 때 그는 당시에 먹고 있던 약에 이미 내성이 생겨 새로운 에이즈 약이 필요했다. 초국적 제약회사 로슈(Roche)는 높은 가격을 제시하면서 한국에 약을 공급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 지난 뒤 미국의 구호단체로부터 그 약을 구할 수 있었지만 '약을 복용하고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요행이 아니라 권리'라며 정부와 제약회사를 상대로 외롭고 힘든 싸움을 했다.
책에는, 남아공의 배리 맥기어리가 1991년 자신의 HIV 감염 사실을 누설한 의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는데 상고심 판결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 이야기가 나온다. 2년 후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기까지 변호인이었던 에드윈 캐머런의 고뇌가 생생하게 읽힌다.
한국에서는 HIV 양성 반응이 나온 환자에게 편도 수술을 해주지 않고 다른 병원의 의사에게 검사 결과를 알린 사건이 있었다. 1심에서 "의료인에 대한 전파 가능성 차단과 피해자가 감염인인 사실이 알려질 경우 받을 수 있는 사회적 고립 등의 피해 사이에 법익 균형성이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7조(비밀누설금지) 위반이라고 판결했지만, 2013년 대법원은 '혐의 없음'이라고 판결했다.
이 책을 에이즈 활동가,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 의약품 접근권 옹호 활동가들에게 권한다. 그리고 '촛불의 승리'를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군인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처벌당할 수 있는 2017년 지금이 이 책을 읽기 좋은 때가 아닐까 싶다.
1992년 만델라는 "에이즈는 우리가 공개적으로 논하기 아주 어려워하는 삶의 측면을 드러낸다"고 연설했다. 에이즈가 부여하는 낙인은 연인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고, 존재에 대한 끝없는 죄책감을 양산한다.
에이즈 문제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은 이들 덕분에 내 삶은 풍요로워졌다. 국가에서 사회에서 온통 '반대한다'며 존재를 마구 흔들어 대는 한복판에서 자신을 잊지 않고, 잃지 않고 삶을 살아 내는 것, 그것이 낙인과 차별의 구조를 분석하고 해체해 나가는 과정임을 배웠다.
40여 년의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끝내고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다양성'의 풍요로움을 쟁취하고 체감한 증인으로서 에드윈 캐머런의 말은 생생하다.
'다양성은 경청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권미란은 정보공유연대IPLeft 활동가입니다. 정보공유연대IPLeft는 지적재산권 제도와 이를 강화하려는 경향이 초래하는 사회적 모순들을 이슈화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대표적으로 지적재산권을 내세워 고가의 가격을 요구하는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문제를 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