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엔 자꾸 '나라 생각'을 하게 된다. 일년치 생각을 이 달에 다하는 것 같다. 나는 애국자이기는커녕 평소 '애국'이란 말만 들어도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라며 뜨악해 하곤 한다. 이런 내게도 6월은 특별하다. 애잔하고, 가슴이 저리다.
6·25전쟁(1950년~1953년)과 6·10민주항쟁(1987년)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사건들이다. 멀리서 망원경으로 본다면, 전쟁은 나라를 둘로 갈라 분단국가로 만들었고, 민주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민주화의 물꼬를 텄다. 몇몇 정치인들의 이름과 희생자의 이름과 무슨 무슨 협의, 회의 같은 기록도 보인다.
그런데 멀리선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바로 소시민, 우리의 일상이다. 전쟁이 터지고 시위대와 전경이 거리를 가득 메워도,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아이를 돌보고 학교에 가고 돈을 버는 일상이 이어진다. 단지 그 모습이 이전과 같지 않을 뿐이다.
나는 궁금했다. 국가가 거대한 파도를 만나 거칠게 출렁일 때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뒤바뀌는지. 혼란 속에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으며 어떤 삶을, 어떻게 이어갔는지 말이다. 국가가 권력과 통치력을 자칫 잘못 사용하면 국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과 독재와 같은 국가 폭력으로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또 기억하고 싶었다.
아래에 소개하는 책들은 모두 이런 궁금증에 충실히 응답한다. 국가폭력이라는 주제는 무겁지만 모두 만화책이어서 가볍게 책장 넘기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자서전적 내용을 담았거나 객관적 사실과 실화를 중심으로 한 책으로만 골랐다. 좀 더 생생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다.
아무래도 6월이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윤태호의 <인천상륙작전>, 5·18광주민중항쟁 이야기를 다룬 강풀의 <26년>, 일본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문제를 그린 나카자와 케이지의 <맨발의 겐>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려 한다. 역사적 사실이나 통치자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책이든 맨 마지막장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하다. 초등학생 저학년들도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읽어나가기에 무리 없으리라 생각한다. 아마 책을 덮을 때는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에 남을 것이다.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아트 슈피겔만 지음, 아름드리미디어 펴냄)
만일 누군가 "세상에서 '김씨'가 가장 훌륭하다. 장차 김씨들이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데 '이씨'들이 걸림돌이 된다. 그러므로 '이씨'는 모조리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면 어떨까. 아마 제정신이 아닌 이가 지껄인 헛소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와 똑같은 생각을 근거로 무려 11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지나지 않은, 20세기에 벌어진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 독일이 벌인 유태인 대학살이다. 히틀러는 아리아 인종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 믿었다. 아리아 인종의 순수성을 가장 잘 이어받은 독일 게르만족이 세상을 지배해야 하고, 이를 위해 열등한 인종인 유태인은 모두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쥐>는 대학살의 중심인 '아우슈비츠'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 아트 슈피겔만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유태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똑똑하고 유능한 아버지와 백만장자 사업가 집안의 어머니가 결혼한 지 2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아버지는 폴란드 군인으로 징병되어 독일군을 상대로 총을 겨누다 포로가 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만 유태인 분리정책으로 또다시 고초를 겪는다. 지하 벙커를 만들어 숨어 생활하던 작가의 부모는 결국 나치 경찰에 발각돼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쥐>는 작가인 젊은 아들이 만화를 그리기 위해 아버지의 회고담을 듣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책에 나온 이야기는 모두 아버지의 기억에 의존한다. 꼼꼼한 성격과 특출한 기억력 덕분에 이 책의 부제인 '한 사람의 생존기'가 촘촘하고 긴박하고 치열하고 아슬아슬하게 전개된다.
특이하게도 만화엔 사람얼굴이 나오지 않는다. 가족을 포함한 유태인은 쥐로, 나치는 고양이로, 폴란드인은 돼지로, 미국인은 개로 표현했다. 슈피겔만은 쥐와 고양이라는 "억압 구조를 상징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회고담을 듣는 현재와 과거 전쟁 장면을 오가는 구성 때문에 독자들은 아우슈비츠의 극단적인 환경에 과하게 몰입되지 않는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작가와 아버지 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현재 작가가 겪는 정신적인 부담감까지 담고 있어 전쟁의 고통이 어떻게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만화를 완성하기까지 무려 8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만화로는 드물게 1992년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이다.
<페르세폴리스 1, 2>(마르잔 사트라피 글·그림, 새만화책 펴냄)
'이란'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전쟁, 여성 억압 등... 나도 그랬다. 이 책 <페르세폴리스>를 읽기 전까지는. <페르세폴리스>는 이란 출신의 작가 마르잔 사트라피가 2002년 펴낸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1969년생인 작가는 열 살 때인 1979년 이란의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국가가 들어서는 대 격변을 맞이한다. 이듬해부터 이슬람정권은 여성들에게 베일을 쓸 것을 강요하고 여자와 남자와 분리되어 학교에 다니도록 했다. 같은 해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해 작가의 10대는 전쟁으로 점철된다.
국가는 어린 소년들에게 금색으로 칠한 플라스틱 열쇠를 쥐어주며 '전쟁에 나가 운 좋게 죽는다면, 이 열쇠가 천국으로 이끌 것이다'라고 말한다.(105쪽) 작가에게 가장 섬뜩한 상상을 불러온 말은 '전쟁에서 죽는 것은 사회의 동맥에 피를 주입하는 것'(121쪽)이었다.
전쟁과 억압을 피해 작가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유럽으로 건너온다. 이슬람 문화에서 십대의 절반을 보낸 터라 적응은 더디고 힘들다. 유럽에서 그는 이슬람 문화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 예를 들어 마리화나, 연애, 동성애 등을 마주하며 혼란을 겪는다. 4년 후 만신창이가 되어 다시 이란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곳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작가는 미술대학에 들어가 베일을 쓴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며 살아간다.
이후 작가는 프랑스로 이주했고, 친구들의 권유로 만화 <쥐>를 만나게 된다. <쥐>에서 큰 영감을 받은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책에서 외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나는 이란 사람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큰 소리로 외친다. 페르세폴리스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궁전으로 강력했던 제국을 상징한다. 같은 제목의 애니메이션도 만들어졌다.
<100℃>(최규석 글·그림, 창비 펴냄)
아무래도 이 책을 빼놓을 수 없다. <100℃>(100도씨)는 6·10민주항쟁을 전면으로 다룬 책이다. 반공소년이었던 영호라는 인물을 내세워 그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은 작가가 지어낸 것이다. 나머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굵직한 사건들은 6·10민주항쟁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중고등학교 현대사 수업의 보충교재로 활용하기 위해 10년 전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와 함께 기획한 것이다.
최규석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사회의 문제로 고통 받으면서도 제 탓만 하고 사는 사람들 앞에서 20년 전에 이룩한 민주화를 찬양하는 것은 삶의 질과 민주주의가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는다고 선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면서, 이 작품 제작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결국 책을 펴낸 것은, '수많은 사람들-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처럼 터무니없이 약하고 겁 많고 평범한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고 제 삶의 기회를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도 영웅이나 유명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반공을 외치며 정치를 외면하고 살아온 소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민주항쟁에 참여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민주화를 이끈 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태일이 1~5>(박태옥 글/최호철 그림, 돌베개 펴냄)
20대 중반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을 읽고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일 수 있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단순한 궁금함에 펴든 책이었다. 밤을 새워 책 속에 빠져 있다 퉁퉁 부은 눈으로 훤하게 밝아오던 창문을 바라보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전태일을 알기 전의 세상과 알고 난 후의 세상은 너무나 달랐다. 왜 학교에서 전태일을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는지, 화도 났다. 37년 전 그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국가의 방관과 폭력에 고통 받고 착취당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이 과연 한 발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태일이>는 <전태일 평전>과 전태일의 수기 모음집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담은 책이다. 구체적인 사건들로 이야기가 펼쳐져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전태일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혹시 전태일이 노동운동을 하며 끝내 스스로 몸을 산화하는 장면이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나는 기우라고 말하고 싶다. 아이들도 슬픔과 분노를 느낄 권리가 있고 그럴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와 책에 대한 나누며 궁금증과 느낌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