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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현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봄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까 벌써 18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한국언론의 미국관>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자료 수집을 하다가 처음으로 남정현 소설 <분지>를 읽게 됐다. 1965년에 발표된 이 반미소설을 읽고 전율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역사적인 필화사건을 야기한 이런 문제작을 뒤늦게 읽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안타까워했다.

 충남 서산 중앙고 교정에 세워진 남정현 문학비 앞에서. 문학비에 '민족자주를 열망한 분지의 작가'라고 쓰여 있다.
 충남 서산 중앙고 교정에 세워진 남정현 문학비 앞에서. 문학비에 '민족자주를 열망한 분지의 작가'라고 쓰여 있다.
ⓒ 남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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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지>가 없었다면


그 당시 <분지>를 읽은 느낌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분지>가 없었다면 한국의 소설 문학사는 얼마나 궁핍했을까"이다. 어쩌면 궁핍하고도 수치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발표된 소설 <분지>는 미군, 핵무기라는 소재를 등장시켜서 민족자주 의식을 강조하는 놀라운 풍자 소설이었다. 표피가 아닌 심층의 근본모순을 보여주는 희귀한 소설이었는데,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미군 문제를 이보다 더 본질적으로 다루면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이 소설을 읽은 직후 지금은 돌아가신 이기형 시인을 통해 남정현 작가를 대학로의 한 음식점에서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첫 대면에서 받은 인상은 매우 허약한 체질과 부드러운 심성을 지닌 분이라는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림프 결핵에 시달리고, 1974년 소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됐을 때 정신적 충격을 받아 심신이 허약해진 남 작가는 병원 약에 의지해서 지내고 있었다.

그 뒤 15년이 지나 남정현 작가를 다시 만났다. 2014년 초, 나는 평생 통일 운동에 힘써온 지식인을 인터뷰해서 <분단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책을 썼는데, 남정현 선생님도 그중 한 분이었다. 이제 팔순의 나이를 넘어선 남 작가는 예전보다 더욱 기력이 달려 보였다. 머리가 항상 어지러워서 더 이상의 작품 활동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근본모순을 타파하고자 하는 작가 정신은 한 치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분지>를 쓸 때와 변함없는 '결사항전'의 정신이 느껴졌다.

홍길동 10대손 홍만수를 닮은 남정현 작가

그때 열정적으로 북미 정세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 남 작가를 보면서 <분지>의 주인공, 홍길동의 10대손인 홍만수가 떠올랐다. 미국의 엑스 사단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동원해 포위하자 향미산(向美山)에 숨어 홀로 최후결전을 준비하는 홍만수.

미군의 공격 10초를 앞두고, 미군에게 강간당한 뒤 자살해 죽은 어머니를 향해 마지막으로 "자, 보십시오. 저의 이 툭 솟아 나온 눈깔을 말입니다. 글쎄 이 자식이 그렇게 용이하게 죽을 것 같습니까, 하하하"라고 외치는 자신만만한 홍만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남 선생님은 작은 체구에도 강렬한 눈빛으로 문학가의 책임감에 대해 이런 말을 내게 들려주었다.

"사실 <분지>의 주제였던 외세 문제와 <분지>를 유죄로 몰고 간 국보법(반공법)이 그때나 이때나 괴력을 발휘하기는 똑같아. 한마디로 분지는 아직도 똥의 나라야."

"요즘 나의 귀에는 뭔가 거대한 것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굉음 같은 것이 들린단 말이야.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가 곧 무너져 내리는 굉음. 우리가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내고 통일을 이루면, 세계 문명의 축이 바뀌고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축이 된다는 것이 내 믿음이야. 하하하."

"나는 정녕 미국 시대가 아닌 우리 시대를 한번 살아보고 싶은 소망에 항시 우리 시대에 대한 간절한 비원을 안고 무작정 소위 그 글을 쓰는 길에 들어섰어. 국보법 철폐, 미군철수, 북미평화협정, 남북평화통일이 우리의 근본문제야. 작가들은 이런 역사적 과제와 함께하는 초병이 돼야 해."

 2017년 6월 26일 대학로 음식점 들풀에서 열린 남정현 소설집 <편지 한통-미제국주의 전상서> 발간 기념 모임.
 2017년 6월 26일 대학로 음식점 들풀에서 열린 남정현 소설집 <편지 한통-미제국주의 전상서> 발간 기념 모임.
ⓒ 최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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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화두 미국 문제

2017년 나는 박근혜 탄핵 정국과 미국의 사드 배치를 지켜보면서 반미, 반외세 소설 출간을 기획했다. 그런데 여러 작가의 창작품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해서 남정현 소설가의 반미소설집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편지 한 통-미 제국주의 전상서>라는 제목으로 발간한 이 소설집에는 1965년에 발표한 <분지>와 함께 <허허선생7-신사고>(1990), <편지 한 통 –미제국주의 전상서>(2011)를 실었다. 여기 실린 3편의 소설 <분지>, <신사고>, <편지 한  통>은 남 작가가 평생의 화두로 물고 늘어진 미국과 분단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런 남 작가에 대해 한 소설가는 "남정현은 너무너무 한 원칙에만 골똘하고 철(徹)해 있다. 바로 '반(反)미국'이 그것이었다. '반제, 반미'. 하기야 그 점은 나로서도 십분 이해는 된다. 이 땅에 미국군이 주둔해 있는 사실이야말로 원천적인 비리로 인식, 남정현은 지난 수십 년간을 애오라지 일관하게 자신의 삶도 문학도 송두리째 그에 저항하는 데만 쏟아 부어오고 있는 것이다"라 평하기도 했다.

지난 6월 26일 서울 대학로의 음식점 들풀에서 몇몇 작가, 지인과 함께 소설집 <편지 한 통>출간 기념 모임을 했다. 손이 심하게 떨리는 수전증으로 식사를 거의 못하셨지만 선생님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여러 주제에 걸쳐 두세 시간 동안 말씀을 하셨다. 2011년에 발표한 <편지 한 통>은 최근의 북미 관계, 한반도 정세와도 맞아떨어지는 점이 많았다.

"얼마 전 트럼프가 핵 항공모함을 동원한 군사훈련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김정은 만나는 게 영광이다'라고 했잖아. 조만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고, 평화협정이 체결될 거라고 봐. 미국인들에게 본토에 미사일이나 핵이 떨어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야."

 1965년 반미소설 <분지>를 쓸 때나 지금이나 남정현 작가에겐 간절한 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 내 살아생전에 미국 시대가 아닌 우리 시대를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1965년 반미소설 <분지>를 쓸 때나 지금이나 남정현 작가에겐 간절한 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 내 살아생전에 미국 시대가 아닌 우리 시대를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 최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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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쓰고 싶은 작품

현기증이 심해 도저히 작품을 쓸 기력이 없다는 원로 작가에게 마지막으로 꼭 쓰고 싶은 작품이 있다 한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아무것도 못해. 손이 떨려서 글을 쓰지도 못하고. <편지 한 통> 쓸 때도 손자가 도와줬어. 그래도 꼭 하나 쓰고 싶은 게 있는데 도대체 반세기 이상 미국의 봉쇄 속에 살아온 북이 어떻게 자주성을 지키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그 밑바탕에 깔린 우리 민족의 저력이 무엇인지에 관해 쓰고 싶어."

1965년에 남정현 작가는 "누구라도 한마디 해야지 견딜 수가 없어서,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고민하다가 <분지>를 썼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도 북핵 위기와 북미 대결의 한복판에서 남 작가는 또 똑같은 심정으로, "누구라도 한마디 해야지 견딜 수가 없어서, 고민고민하다가" <편지 한 통-미 제국주의 전상서>를 썼고, 여전히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고민하고 있다.

평론가 김병걸은 이런 남 작가의 작품 활동에 대해 "어떤 절대적인 거대한 힘과 홀로 대결하는 자의 용기를 방불케 한다", "아마 한국 소설가 중에서 남정현만큼 끈질기게 상황악의 근원에 도전한 작가는 없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 눈 밝은 젊은 작가가 원로 작가의 고민을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 홍길동의 10대손 홍만수를 닮은, 상황악에 정면 도전하는 또 다른  젊은 작가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남정현#편지 한통#미제국주의 전상서#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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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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