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변화는 스스로 진행하는 절대적인 힘처럼 보이기 쉽다. 낙엽이 지면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해야 하듯, 기술의 도도한 흐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변화한 기술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일 뿐인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상상키 어려운 두려운 사태가 벌어진다. 경쟁에서 뒤처질지 모르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우리들은 혁신에 뒤짐으로써 경쟁 순위에서 밀리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 돼 버렸다.
게다가 이제는 국경마저 사라진 '글로벌 경쟁시대' 아닌가. 새로 탄생하는 기술을 허겁지겁 집어삼키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구들장도 고치고 이불 빨래까지 한 뒤 일찌감치 마중을 나서듯, 이제는 신기술이 찾아오기도 전에 몸과 마음의 준비는 물론, 법과 제도도 미리 뜯어 고쳐놔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손님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본 적이 없으나, 잘만 모시면 부귀와 행운이 찾아온다는 게 다보스포럼 회장의 예언이다. 그렇다면 이 귀빈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진화하라'는 게 4차산업혁명 선지자 클라우스 슈밥의 외침이다.
슈밥 회장은 특히 정부가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 보자.
"진화하지 못하면 점점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같은 문제가 특히 잘 나타나는 곳이 규제의 영역이다. 현재의 공공정책 및 의사 결정 시스템은 2차 산업혁명과 나란히 진화해 왔다." (<4차산업혁명의 충격> 24쪽) 다시 말해, 정부의 규제 방식이 낡아서 더 이상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빙빙 돌려 말하고 있지만, 결국 기업규제를 완화하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4차산업혁명'을 내세우기 훨씬 전부터 다보스는 세계화의 선봉에 서서 각국 정부에 규제 철폐를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보스는 왜 2016년 포럼 주제로 '4차산업혁명'을 내걸었을까? 당시 '3차산업혁명'을 전파하기에 여념이 없던 제러미 리프킨이 무색하게 말이다.
난데 없이 내건 '4차산업혁명' 간판
물론 그 때에도 기술이 발전하기는 했다. 매년 그래왔듯 말이다. 하지만 2015년이나 2016년 벽두가 혁신에 관해 특별히 의미있는 해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물 인터넷(IoT)'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던 '애플 와치'는 2014년에 공개되었고 이듬해 시장에 나왔으나, 판매실적이 영 신통치 않았다. 야심차게 진행되던 '구글 안경'은 2015년에 공식적으로 판매가 중단되었다. 그렇다고 전 세계가 '사물 인터넷'이나 '빅데이터'의 가능성에 환호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구글 트랜드가 말해주듯, '사물 인터넷'이나 '빅데이터'에 대한 관심은 2014년에 정점을 찍은 뒤 사그라들고 있었다. '클라우드 컴퓨팅'에 대한 관심은 그보다 한참 전인 2011년에 최고조에 달한 후 급속히 추락해서 바닥을 기던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보스가 '4차 산업혁명'을 내세운 것이다.
2016년에 '알파고'가 있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이다. 이세돌과 인공지능의 역사적인 대국을 잊을 리 있겠는가. 한국에서 '4차산업혁명'이 불붙은 데는 알파고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다보스의 주제와 알파고의 충격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보스가 2016년 주제를 발표한 게 2015년 말이었고 (선정 시기는 이보다 훨씬 앞선다) 이세돌-알파고 대국은 2016년 3월에 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작 포럼이 열린 2016년 초에는 '4차산업혁명'이 한국에서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보스는 왜 느닷없이 '4차산업혁명'을 외치기 시작한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기술'보다 '정치'였을 것이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반세계화 운동이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화에 대한 저항은 진보세력이 독점해 온 의제였지만,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보수세력으로부터도 십자포화를 맞기 시작했다.
위기에 몰린 '다보스맨', 돌파구를 찾다 새뮤얼 헌팅턴은 다보스 참석자들을 "다보스맨(Davos Man)"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작은 정부, 세금 감면, 탈규제를 주장하며 막대한 부를 쌓은 지배계층을 말하는데, 헌팅턴은 이들의 성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필요 없고, 국경은 장애물이니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그들 눈에 정부란 낡아빠진 과거의 유물로서, 유일하게 쓸모 있는 정부의 역할이란 부자들이 세계를 무대로 사업할 때 돕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다보스는 방임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해왔다. 창립자 슈밥은 독일 태생이고 연례 모임은 스위스에서 열리지만, 토론의 주제나 메시지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노선을 충실히 따른다. 그런 면에서 다보스 참석자 가운데 미국 기업인과 미국 교수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다보스는 각 나라를 향해 '탈규제' 노래를 했고, (꼭 다보스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었으나) 대다수의 나라가 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는 중산층 붕괴와 부의 양극였다. 그로 인해 극단적 국가주의가 전세계를 휩쓸게 되었고, 트럼프의 집권은 이를 극적인 형태로 보여주었다.
실직한 노동자 계층을 등에 업은 트럼프의 당선은 여러모로 아이러니한 사건이었다. 미국이 전파해 온 미국식 방임 자본주의가 되돌아가 제 나라를 거덜냈기 때문이다. 주인이 풀어놓은 사나운 개가 뒤돌아 주인을 문 격이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의 승리가 '다보스의 뺨을 후려쳤다'고 평가했다. 다보스가 난데 없이 '4차산업혁명'을 내세운 데에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모두에게 비난 받게 된 '세계화'는 더 이상 약발이 먹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보스가 택한 전략은 '세계화'를 '기술 혁신'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물론 결론은 동일하다. '기술적 진보'를 핑계로 탈규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20세기 미래학자들이 빗나간 예언들
일관되다고 해야 할지,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다보스의 새 논리는 전혀 새롭지 않다. 기술 발전을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묘사하며 규제탈피를 요구하는 수법은 이미 지난 세기의 '미래학자'들이 지겹게 써먹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95년에 출간된 <디지털이다(Being Digital)>라는 책을 보자. 매사추세츠 공대(MIT)의 미디어랩 설립자이자, 저명한 미래학자인 니콜라스 네그로폰테가 쓴 책이다. 당시 전세계를 휩쓴 이 책의 인기와 영향력은 슈밥의 <4차산업혁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네그로폰테는 이 책에서 '아톰(원자)'과 '비트'의 융합을 이야기한다. 현실세계에서 물질과 디지털 신호는 더 이상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기술 혁명'을 신나게 이야기 한 뒤, (언론 독과점을 막기 위해 마련된) '신문-방송 겸영 금지'라는 정부 규제가 얼마나 한심한 짓인지를 토로하기 시작한다.
'신문'과 '방송'이 디지털 신호 '비트(bit)'로 통합되고 있기 때문에, '신문'과 '방송'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매체의 경계가 사라지는 융합의 시대에 '신문-방송 겸영 금지'라는 낡은 제도는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 책이 나온 지 20년도 넘었지만, 신문과 방송은 여전히 별개의 매체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책이 나온 뒤 얼마 후에 미국의 신문방송 겸영 금지법은 대폭 완화되었고 안 그래도 위축되어 있던 언론의 다양성은 더욱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그 사이 언론재벌이 소유한 보수 뉴스채널 '폭스뉴스'는 시앤앤(CNN)'을 제치고 가장 영향력 있는 뉴스매체가 되었다. 이 방송은 미국을 이라크 전쟁과 트럼프 시대로 끌어들이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공교롭게도 <디지털이다>에 뜨거운 찬사를 담은 추천사를 써 준 이는 폭스뉴스의 소유주 루퍼트 머독이었다.
네그로폰테가 <디지털이다>를 쓴 배경에는 인터넷이라는 신기술이 있었다. 1994년 겨울에 그래픽 기반 웹브라우저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가 무료로 공개됨으로써 인터넷 대중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넷의 가능성에 대해 많은 수많은 예언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민족주의의 종말'이었다.
"앞으로 20년 후, 아이들은 '민족주의'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그는 1997년에 이렇게 선언했다.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클릭 한 번으로 다른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팔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20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이코노미스트>지는 "사이버 민족주의: 인터넷 혐오의 신세계"라는 기사에서 인터넷이 극단적 민족주의의 온상이 되었다고 한탄했기 때문이다.
2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미래학자들의 왜곡된 예언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없다. 사람들은 쉽게 잊고, 이미 벌어진 일은 쉽게 체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4차산업혁명' 예언을 순순히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술적 변화는 스스로 진행하는 절대적 힘도, 가치 중립적인 진화의 과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글을 통해 '기술 혁신'이 어떻게 재계의 탐욕이나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결탁되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