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래는 논문 「손처눌 연구」에서 '조선 시대의 유자(선비)라면 누구나 과거 합격과 사당에 배향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사회적 지위와 인물 됨됨이를 평가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과거 합격은 관직에 종사하는 출사를 뜻한다.
『논어』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天下有道則見)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亂邦不居).'라고 했다. 이는 조선 시대의 출사와 임노동자(賃勞動者)로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공무원 되기가 본질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조선은 신분 사회였으므로 당대의 상류층인 양반은 생계를 걱정할 일이 없다는 점에서 애당초 출발점이 달랐다. 출사는 공무원이 아니라 정치인이 되는 행위였다.
조선 시대의 양반들에게는 '뜻을 이룰 수 없는 세상이면 수양을 하며 스스로 착하게 살고(窮則獨善其身) 출세를 하면 세상을 착하게 만들라(達則兼善天下).'는 공자의 가르침이 출사의 명분이었다. 이신의(李愼儀, 1551∼1627)는 직산 현감, 괴산 군수, 홍주 목사, 해주 목사, 형조 참판(종2품, 법무부 차관) 등을 역임했으니 김건래가 말한 '최고의 영광' 중 한 가지는 누린 인물이라 할 만하다.
사당에 모셔지는 것은 조선 선비의 '최고 영광'또 다른 '최고의 영광'은 사당에 모셔지는 일이다. 사당은 제사를 지내는 집이다. 즉, 사당에 모셔진다는 것은 돌아가신 날 지내는 기제사나 설 등의 차례에 제향되는 수준이 아니라 별도의 집을 지어 그 안에 위패나 초상이 섬겨지는 경지를 가리킨다.
이신의는 고양 문봉서원(1720년, 숙종 46), 충북 괴산 화암서원(1738년, 영조 14), 광주 유애서원(1754년, 영조 30)과 월봉서원(1822년, 순조 22)에 모셔졌다. 이신의는 '최고의 영광' 두 가지를 모두 누린 인물인 것이다.
현대인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만하다. 이는 1956년에 출간된 윌리엄 H. 화이트의 《조직 속의 인간》에 나오는 '현대인은 고향을 등진 조직인'이라는 경구를 변용한 표현이다. 현대인들은 사당을 짓거나, 사당을 포함하는 거대 시설인 서원을 (복원은 해도) 신축하지 않는다. 고향에 관심을 두지 않는 정신세계를 가진 탓이기도 하지만, 사당과 서원의 전통 건축 양식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서원을 세웠다면 현대 사회에는?기념관은 현대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서원이라 할 만하다. 김건래의 어법을 원용하자면 '현대의 인물이라면 누구나 개인 기념관이 지어지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며, 이를 통해 사회적 지위와 인물 됨됨이를 평가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백범 기념관 · 안창호 기념관 · 손기정 기념관, 경기도 광주 만해 기념관, 충남 천안 유관순 기념관, 경북 문경 박열 기념관, 경북 성주 김창숙 기념관, 전남 목포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1002에 이신의 기념관이 있다. 출사와 사당으로 조선 시대 '최고의 영광'을 누린 이신의는 현대 사회에 와서도 기념관에 모셔져 변함없는 기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신의는 임진왜란 의병장이다. 그는 종묘서(왕실의 무덤을 관리하는 관청) 봉사(종8품)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 고양에서 『대학차록』 등을 저술하며 학문에 힘쓰던 중 전쟁 발발 소식을 들었다. 그 길로 향병 300명을 모집한 그는 고양 도래울 마을 건너편 동쪽의 도라산 정상에 단을 쌓고 제를 지냈다. 비록 군대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300명의 '이신의 창의대(당시 이름)' 덕분에 고양 백성들은 왜적의 침탈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일본군을 속인 '이신의 창의대', 기습 공격도 감행이신의 창의대는 창릉천에 쌀뜨물 빛깔의 백토를 흘려보내고, 도라산 주변에 무수한 깃발을 꽂고, 밤이면 횃불을 들고 이러저리 움직임으로써 의병 부대의 규모가 크고 군량미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허위로 과시했다. 고양 서북쪽 4km남짓 거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일본군은 섣불리 도라산을 공격하지 못했고, 오히려 창의대는 야밤을 틈타 기습을 하는 등 유격전으로 적을 괴롭혔다.
그 후 창의대는 남서쪽으로 불과 4km 떨어진 행주산성에서 벌어진 큰 싸움에도 동참했다. 1592년 8월 이래 몇 달 동안 이신의는 창의사 김천일이 임금에게 올린 장계 등에 힘입어 사옹원 직장(종7품), 중부 주부(종6품), 형조좌랑(종6품) 등으로 파격 승진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전쟁 중이었다. 이신의에게 한스러운 소식이 들려온다. 함경도 길주 목사로 있던 동생 이신충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선조실록》 1592년 9월 4일자에 임해군(광해군의 이복 형)과 순화군(동생)이 포로로 잡혔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함경도로 피란 온 그들을 국경인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가등청정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국경인의 반역 때 비장한 죽음을 맞이한 이신충이 와중에 이신충은 비장한 죽음을 맞이했다. 북관대첩비에는 '국경인 등이 반역하여 적에게 내응하였다. 경인은 회령부의 아전으로 본성이 악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적이 부령에 이르자 그 위기를 타고 난을 일으켜 피란해온 두 왕자와 대신들을 잡고, 장수와 관리들을 묶어 적에게 주고 정성을 보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신의는 1593년 12월 직산 현감으로 부임했다. 『선조수정실록』 1594년 1월 1일자에는 '역적 송유진이 처형되었다. 백성들이 굶주림 끝에 뿔뿔이 흩어지고 군사는 도망쳐 숨어 지내면서 서로 호응하여 도적떼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경기와 호서(충청)가 가장 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은 이어 '한수(한강) 이남에서 조령(문경 새재)까지와 호서의 험악한 곳에 적도들이 많이 잠복해 있으면서 마을을 노략질하여 행인이 끊겼다. 관군이 수색하고 토벌하면 잠시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소탕할 수가 없었다.'라고 증언한다. 이 기사는 이신의가 직산에 내려갔을 즈음 송유진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반란군이 창궐했던 곳에 현감으로 부임하는 이신의조금 전까지 반란군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에 수령으로 발령을 받았다는 것은 이신의가 그만큼 조정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는 뜻이다. 진정 그는 행정을 잘 펼쳐 민심을 안정시켰던 듯하다. 조정은 그를 계속 직산 현감(종6품) 임무를 수행하게 하면서 직급은 계속 높여 군자감 부정(종3품)까지 파격으로 올렸다. 직산읍 군동리 327-8 직산 관아(현청)의 문루인 호서계수아문 옆에는 그를 기리는 선정비도 세워져 있다.
1596년(선조 29)에도 이신의는 직산 현감으로 봉직했다. 어느덧 3년째 같은 직책이었다. 그때는 군자감정에 올라 있었다. 그가 무려 정3품인 군자감정까지 승진한 것은 이몽학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결과였다.
그해 7월 6일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은 불과 닷새 뒤인 10일에 수원까지 진격할 만큼 기세를 떨쳤다. 이신의는 홍주(충남 홍성) 목사 홍가신의 지원 요청을 받고 출전했다. 천안 군수 정호인과 더불어 군사 8,000명을 동원하여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몽학의 반란 진압에도 공을 세우는 이신의직산 관아의 정문 이름 호서계수아문(湖西界首衙門)은 이곳이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이신의가 직급은 점점 높아지면서도 줄곧 직산 현감으로 재직한 것도 이곳이 그만큼 지리적 · 군사적 요충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직산에서 4km 북쪽 홍경원 일대에서 1597년 9월 7일중국군 부총병 해상(解生)의 군대와 일본군 흑전장정(黑田長政)의 군대가 대결전을 벌일 때에도 이신의는 명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아 큰 공을 세웠다.
종전 이후 이신의는 괴산 군수, 임천(충남 부여 임천) 군수, 홍주 목사, 해주 목사 등을 역임했다. 해주 목사로 재임할 때에는 왕자들이 일반 백성의 농토를 빼앗는 것을 막아 본래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왕자들이 아버지 선조에게 '해주 목사 때문에 저희들이 논밭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하소연하자 선조는 '너희들이 삼갈 일이다. 해주 목사는 짐이 그런 일을 했다 하더라도 역시 잘못을 추궁할 것'이라고 대답했다(이신의 문집 《석탄집》).
'위리안치'의 유배에 처해지는 이신의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 2등공신에 책록되었던 이신의는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선조의 후비, 영창대군의 친모) 폐비를 반대하다가 2월 15일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된다. 이신의는 동생 이신충이 순국한 길주를 지나 두만강 하류의 유배지까지 간다. 광해군이 위리안치(圍籬安置)의 벌을 내렸기 때문에 그는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사방에 울타리가 쳐진 집에서 꼼짝도 못 하는 채로 6개월을 보냈다. 그 때 이신의는「단가 6수」및 윤선도의「오우가」보다 24년 앞서는「사우가」를 짓기도 했다.
[소나무]
바위에 서 있는 솔 어엿하여 반갑구나풍상을 겪었어도 여윈 흔적 전혀 없네어찌해 봄빛을 쪼여도 그 모습이 같은가[국화] 동쪽 울밑 심은 국화 귀한 줄을 뉘 아는가봄빛을 마다하고 된서리에 홀로 피니오오라 청고한 내 벗은 너 말고는 없구나 [매화] 하 많은 꽃 중에서 매화를 심는 뜻은눈 속에 흰 빛으로 꽃이 피기 때문이라더 더욱 그윽한 향기는 귀하고도 귀하네[대나무] 백설이 잦은 날에 대를 보려 창을 여니온갖 꽃 다 져 버리고 대숲만 푸르구나때 마침 부는 청풍을 반기면서 춤추네 위의 시는 13대손 이한창 선생이 이신의의 원작을 현대문화한 것으로 직산 호서계수아문 앞과 행주나루공원 안에 시비로 제작되어 세워져 있다.
인조반정 뒤 귀양살이에서 풀려나는 이신의이신의는 회령에서 흥양(전남 고흥)으로 옮겨져 모두 5년 1개월에 걸친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다. 1623년의 인조반정 덕분이었다. 그는 형조참판에 임명되고, 이어 광주목사가 된다. 그제야 그는 이곳에서 피란 생활을 하던 가족들과 6년 만에 상봉한다. 이제 늙고 병이 깊어진 이신의는 벼슬을 사직한다.
76세의 충신은 6,000자에 이르는 상소 「재이후(災異後) 응지봉사(應旨封事응지봉사)」를 임금에게 보낸다. 어떻게 하면 나라를 굳건하게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충정어린 건의였다. 그러나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임금은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신의는 77세의 병든 몸을 이끌고 집을 떠나 강화도를 향해 출발했다. 신하된 도리로 마땅히 임금을 호종(모심)해야 한다는 신념의 발로였다. 김포에 닿았을 때 이미 인조는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들어간 뒤였고, 배편도 없는 그는 인천에서 바다만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1627년 7월 16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신의는 수원 마정리의 어느 남루한 여관에서 '우국일념(憂國一念)'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탓에 자식과 친척들이 있었지만 생애의 마지막을 편안한 집에서 보내지도 못했고, 가매장을 거쳐 두 달이 지난 뒤에야 고양 원당리로 모셔져 장례를 치렀다.
1628년 1월 30일, 인조는 예조좌랑 황윤후를 보내어 그를 치제하며 위로했다. 치제는 임금이 제문과 제물을 보내어 공신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청빈하게 산 탓에 장례 치르기도 힘들었던 이신의눈 가운데 핀 매화를 보러 잔을 잡고 창을 여니섞여 있는 꽃 중 여윈 속에 잦은 것이 (오직 매화) 향기뿐이로다아아, 나비가 이 향기 알면 애 끊을까 하노라「단가 6수」 중 마지막 여섯 번째 노래이다. 매화는 겨울을 이겨내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지조와 충절의 상징이다. 물론 이 시는 이신의의 충신다운 면모를 남김없이 보여주는 '이신의 기념관'에도 게시되어 있다.
기념관에는 '선조 어필(임금의 글씨) 병풍' 등 이신의 의병장 관련 유물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임진왜란 전체의 역사와 그가 참전했던 행주대첩 관련 기사가 게시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면, '위패 또는 초상을 모시는 조선 시대 사당보다는 이곳과 같은 기념관이 현대 사회에 더욱 어울리는 현창 시설인 게 확실해!' 하는 생각이 저절로 일어난다.
기념관 옆에는 사당 충의사, 이신의가 공부를 했던 양소당, 신도비, 묘소도 있다. 기념관 1층 전시실과 양소당에 그의 영정과 흉상까지 있으니 임진왜란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참배를 하는 데에는 이곳보다 더 적합한 준비를 갖춘 곳도 없을 것이다. 옷깃을 여미고 기념관을 나서는 기분이 자못 비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