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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기쁘기보다 착잡하고 참담합니다."

42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마침내 주홍글씨를 지웠지만, 한승헌 변호사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지난달 2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9부(부장판사 이헌숙)는 1975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던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한 변호사는 '유럽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된 김규남 의원을 애도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구속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그가 '북괴'를 이롭게 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015년 12월 대법원이 김 의원의 재심 무죄판결을 확정하면서 한 변호사도 자연스레 무죄가 됐다.

여든넷 인권변호사 "아직 할 일 많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등 시민사회 원로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승헌 변호사(가운데) 무죄 축하연이 열렸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등 시민사회 원로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승헌 변호사(가운데) 무죄 축하연이 열렸다. ⓒ 정대희

7일 오후 서울 논현동의 한 평양냉면집에서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등 시민사회 원로 40여 명이 마련한 한승헌 변호사 무죄 판결 축하연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 변호사는 자신보다 더 참혹한 형을 받았거나, 이미 사형이 집행돼 재심 무죄 판결을 직접 듣지 못한 이들을 떠올렸다. 그는 "그때 그 제도와 법률 또는 권력의 독수가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다"며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이 많이 남았다"고 말했다. 1934년생인 한 변호사는 올해로 여든넷이다.

그는 유신독재 시절 '김지하 오적 필화 사건' 등을 변호하며 '시국사건 1호 변호사'로 불렸다. 권력 앞에 벌거벗은 피고인에게 나라도 우군이 되어주자는 마음이었지만 자신의 삶도 고됐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살이를 할 때는 '각서를 쓰면 내 보내주겠다'는 중앙정보부의 제안을 거절한 대가로 47살에 소년교도소 생활을 했다. 한 변호사가 그 시절을 떠올리며 "교도소 중에 여자교도소 빼고 다 가봤다"고 농담을 건네자 원로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오랜 '의뢰인' 백기완 소장은 "한 변호사와 어려운 고비를 몇 번 넘겼다"고 회상했다. "유신 반대 싸움하다 잡혀가고, 전두환 일당에게 잡혀갔을 때"도 한 변호사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그를 변호했다. 오랜 수배 생활 때문에 처참한 몸으로 수감된 그를 이틀에 한 번씩 접견 와 살핀 것도 한 변호사였다. 백 소장은 "한 변호사의 무죄 선고는 정말로 반갑게 맞이할 사건"이라며 "그를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 넣은 것 자체가 반공법이 무효라는 걸 보여준다"고 소리 높였다. 모든 테이블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약 30년 만에 다시 만난 '유럽간첩단 사건' 피고인 김판수씨(좌)와 한승헌 변호사(우)
약 30년 만에 다시 만난 '유럽간첩단 사건' 피고인 김판수씨(좌)와 한승헌 변호사(우) ⓒ 정대희

이날 축하연에는 '유럽 간첩단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 김판수씨도 참석, 한 변호사와 약 30년 만에 재회했다. 1969년 5월, 27살의 김씨는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한 변호사와 처음 만났다. 간단한 사실관계 확인 후, 한 변호사는 김씨에게 "혹시 여기까지 온 걸 후회합니까?"라고 물었다. 김씨는 "좀 고통스럽긴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며 "'길을 잘못 들어 신세 망쳤다'는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고, 후회한 적도 없는 걸 자랑으로 삼고 있다"고 전했다.

한 변호사도 당시를 떠올리며 "무죄를 확신하면서도 유죄를 확신했다"고 설명했다. 간첩이 만들어지던 시대에, '조작 간첩' 변호하는 시국변호사의 현실이었다. 끝내 김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던 대법원은 지난해 1월 그의 재심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이 사건을 설명하던 한 변호사는 "너무 늦어빠진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한승헌#김판수#김규남#유럽간첩단사건#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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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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