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 4월 15일 동래성, 4월 21일 경주와 대구, 4월 25일 경북 상주, 4월 28일 충주, 5월 2일 한양…. 조선의 땅들이 차례대로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부산진성과 동래읍성은 수령 정발과 송상현이 군 · 관 · 민 모두와 함께 힘껏 대항했지만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는 중과부적이었던 탓에 금세 함락되었다.
이일이 이끄는 조선 중앙군이 처음으로 일본군과 맞붙은 상주 북천 전투도 일방적 참패로 끝났다. 조선군 총사령관 신립이 배수진을 치고 버틴 탄금대 대결전도 처참하게 막을 내렸다. 경주읍성와 대구읍성은 말할 것도 없고 1392년 개국 이래 200년 동안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조차 싸움 한번 없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
경상우도 의병 부대와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 덕분에 일본군의 침탈을 받지 않았던 전라도 군사들이 충청도의 지원까지 받아 약 3만의 대군을 형성, 한양을 향해 북진했다. 그러나 이들은 광교산 일대에서 1600명에 불과한 일본군에게 어이없이 궤멸되었다. 신립이 남한강에 투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을 버렸던 선조는 이광이 이끄는 전라 · 충청 연합군이 풍비박산 나자 다시 평양을 버리고 압록강 아래로 달아났다.
수군은 달랐다. 조선 수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이순신은 5월 4일 전라 좌수영의 판옥선 24척, 작은 협선 15척, 포작선(군량 수송을 위해 동원한 고기잡이배) 46척을 이끌고 여수를 출발했다. 자신의 방어 구역은 아니지만 일본군이 쳐들어 와 쑥대밭을 만들고 있는 경상도 바다를 되찾고 왜선들을 격침하기 위해서였다.
육군은 연전연패, 수군은 연전연승<난중일기>에 따르면 조선 수군은 5월 7일 일본 수군과 처음으로 마주쳤다. 거제도 '옥포대첩 기념관'이 답사자에게 배부하는 소형 홍보물 <옥포 대첩 기념 공원> 중 '옥포대첩의 의의' 일부를 읽어본다.
'5월 7일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 경, 이윽고 이들 91척의 함대가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 장군이 타고 있던 판옥선에 전방의 척후선(정찰선)으로부터 옥포 선창에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신기전(신호를 알리는 화살)이 날아들었다.이순신 장군은 여러 장병들에게 적선의 발견을 알림과 동시에 전열을 가다듬고 준엄한 목소리로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태산같이 침착하게 행동하라!"는 주의와 함께 공격 개시 군령을 내렸다. 맹렬한 공격으로 옥포 선창에 정박해 있던 적선 50여 척 중 26척이 격파되니 한창 강성하던 적의 기세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중략) 5월 7일 옥포 대첩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후 조선군이 얻은 최초의 승리였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아군의 첫 승리인 옥포 해전 참전 장수를 중심으로 당시 조선 수군의 주요 지휘부 인물들을 관직의 높낮이 순서대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동급인 때는 나이 순서로 소개함.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바로 달아나버린 경상 좌수사 박홍과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 남해안 해전에 참전하게 되는 충청 수사 최호는 표에 없음. 경상, 전라, 충청 전체를 관장하는 삼도 수군 통제사는 해전에 효율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1593년 8월부터 신설됨.)
정3품 원 균(1540∼1597) 경남 거제도, 경상 우수사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전남 여수, 전라 좌수사 이억기(1561∼1597) 전남 해남, 전라 우수사 종3품 권 준(1541∼1611) 전남 순천, 순천 부사 김 완(1546∼1607) 전남 여수 화정, 사도 첨사 이순신(李純信, 1554∼1611) 전남 여수 돌산, 방답 첨사 종4품 정 운(1543∼1592) 전남 고흥 녹동, 녹도 만호 한백록(1555∼1592) 거제도 동남부, 지세포 만호 우치적(1560∼1628) 거제도 동북부, 영등포 만호 이운룡(1562∼1610) 거제도 동중부, 옥포 만호 종5품 기효근(1542∼1597) 경남 남해도, 남해 현령 종6품 어영담(1532∼1596) 전남 광양, 광양 현감 배흥립(1546∼1608) 전남 고흥, 흥양 현감 임란 당시 조선 수군의 중추 지휘관이었던 한백록12명 중 원균, 이순신(李舜臣), 권준, 김완, 정운, 기효근, 어영담, 배흥립 등 8명은 한백록에 비해 23세(기효근)∼5세(권준) 나이가 많았고, 이순신(李純信)은 한백록보다 한 살 많은 38세로 동년배였으며, 이억기, 우치적, 이운룡 3명은 나이가 어렸다. 벼슬의 높이로 보면 6명이 한백록보다 높았고, 3명은 같았으며, 3명은 낮았다. 이는 한백록이 조선 수군의 중추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백록(韓百祿, 1555∼1592)은 26세인 1580년(선조 13) 무과에 급제했다. 종6품 진잠(대전 유성구) 현감 등을 역임하던 그는 통신사가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뒤인 1592년 1월 이후 종4품 지세포(거제시 일운면) 만호에 임명되었다.
이경일은 한백록 묘갈명(묘비에 새긴 글)에 '신사(조선 통신사) 황윤길, 김성일이 일본으로부터 적의 정세를 탐지하고 돌아왔다. (전쟁 발발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조정에 동요가 일어났다. 공(한백록)이 용맹하므로 선발되어 지세포 만호에 제수되었다. 공이 급히 임소(임무를 맡은 자리, 즉 지세포)로 달려가 불우(갑작스러운 일, 즉 임진왜란)에 대비하였다.'라고 적었다.
한백록은 옥포 해전 승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종4품 지세포 만호에서 종3품 부산 첨사로 승진했다. 4월 14일 전쟁 시작과 동시에 최초로 벌어진 전투에서 정발이 전사함으로써 부산진은 첨사가 없는 진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백록이 부산진성으로 부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부산은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내내 일본군의 점령지 신세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백록만이 아니라 그 무렵은 모두들 자신의 근무지를 떠나 바다 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전라 좌수영은 여수에 있지만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5월 7일은 옥포 앞바다, 7월 8일은 한산도 앞바다, 7월 10일은 안골포(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안에서 왜적과 싸웠다. 한산도에서는 59척의 적선을 부수었고, 안골포에서는 40척 안팎을 불태워 없앴다.
한산도 승전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평가받는 까닭<선조실록> 1592년 6월 21일자는 '이순신 등이 군관 이충을 파견하여 급보(한산 대첩 소식)와 왜적의 머리를 바쳤다. 행재소(임금의 임시 거처)에서는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이 기뻐서 펄쩍펄쩍 뛰며 서로 축하하였다'라고 전한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것이 어째서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히는지를 잘 성명해주는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어본다.
'왜적이 본래 바다와 뭍을 통해 서쪽(한양)으로 올라오려고 계획했는데 이 해전(한산 대첩) 한 번으로 적의 한쪽 팔이 잘렸다. 그래서 소서행장이 평양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이후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황해와 평산까지 바닷가 일대를 지킬 수 있게 되면서 군량 확보와 군사 명령 전달이 가능해졌다. 우리나라가 중흥을 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발해 일원이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일본군이 서해를 통해 요동으로 쳐들어가지 못함으로써) 중국 군대가 육로를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순신의 공로이다.'
이순신이 1592년 7월 15일 조정에 올린 장계 <견내량 파왜병 장>, 즉 견내량(통영과 거제도 사이)에서 왜적을 격파한 보고서에 한산 대첩의 경과와 성과가 실려 있다. 한산도 싸움은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3대 대첩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6월 5일과 6일 이틀에 걸쳐 용인 광교산 일대에서 단 1600명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군 3만 명을 대파했던 협판안치(와키사카 야스하루)가 왜적 수군의 대장이었다는 점에서 그 결과가 더욱 궁금해지는 전투이다.
7월 6일 이순신이 거느린 40척의 판옥선과 이억기가 거느린 25척의 판옥선은 남해도 북단의 노량에서 경상 우수사 원균이 끌고 온 판옥선 7척과 합세한다. 이윽고 전체 전함이 72척에 이르는 큰 규모의 수군 부대가 되었다. 협판안치도 비슷한 73척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결과를 말하면,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은 적선 73척 중 59척을 한산도 바다에 가라앉혔다. 광교산 육전의 참패를 철저히 되갚은 대승리였다.
육군의 광교산 참패를 설욕한 한산 대첩바다에 가라앉은 일본 전함 59척 중 17척은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 수군이, 42척은 전라 좌수영과 경상 우수영 수군이 격파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자기 휘하의 전라 좌수영 장수들의 공로는 '순천 부사 권준 : 큰 배 1척, 장수 포함 참수 10, 포로 1명 되찾음' 식으로 개인별로 자세히 기록해 두었지만 전라 우수영과 경상 우수영 장수들의 공로에 대해서는 그냥 뭉뚱그려서 '전라 좌수군과 경상 우수군 : 큰 배 20척, 중간 배 17척, 작은 배 5척'이라고만 적어 두었다. 지휘관이 자기 부하들의 공을 세세히 기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선조실록> 1592년 8월 24일자에 따르면, 원균은 '한백록의 공이 가장 크다(前後之功最多)'라고 보고했다. 한백록은 종4품에서 종3품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한백록은 그로부터 불과 열흘 뒤인 7월 17일 미조항(남해군 미조면) 전투에서 전사했다. 실록은 '한백록은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내 죽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었으므로 당상(정3품)에 추증(죽은 후 벼슬을 높여줌)했다'라고 기록했다.
한백록은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 2등공신에 책록되고, 1628년(인조 6) 가선대부(종2품) 병조참판(종2품, 국방부 차관)에 증직되었다. 1751년(영조 21) 정려가 내려졌고, 1807년(순조 7) 자헌대부(정2 품)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재차 증직되었다. 1811년(순조 11)에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타계한 공신에게 임금이 내린 이름)도 내려졌다. '춘천 한백록 묘역 및 정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해도 남쪽 끝 미조항에서 전사한 한백록문화재청 누리집은 '한백록의 묘는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묘의 형태로, 묘 앞에는 최근에 세운 비석과 상석, 망주석 등이 있고 묘의 왼쪽에는 묘갈이 세워져 있다. 효종 8년(1657)에 세운 이 묘갈은 두 동강 난 것을 다시 붙여 세운 것이다. 묘로 진입하는 입구 쪽에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으며, 정문은 묘역에서 서쪽으로 약 1.5㎞ 되는 곳에 사당과 함께 있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한백록 묘역과 정려를 찾는다. 묘역은 강원도 춘천시 서면 금산리 1112의 재실 관남재 뒤편에 있다. 1657년(효종 8)에 세운 특이한 묘갈(위가 둥근 비석)이 있고 임진왜란 순국 장군의 묘소라는 점에서 문화재로 모셔졌다. 정려와 사당은 묘소에서 1.5km가량 떨어진 서면 방동리 406-2에 좌우로 나란히 건립되어 있다. 묘역과 정려 둘 다 도로변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기 때문에 찾기가 쉽다. 강원도에서는 보기 어려운 임진왜란 수군 유적이므로 꼭 찾아가 볼 만한 희귀성을 지닌 답사지이다.
한백록 장군의 묘역과 정려를 찾아 대략 둘러본 뒤 '이곳이 임진왜란 때 옥포 전투 등에서 공을 세운 한백록 장군 유적이야' 하고 돌아간다고 해서 탓할 일은 아니다. 답사를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선열에 대한 예의와 정성을 갖추었다. 다만 이곳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해전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이 글에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의 활약상을 수록했다.
유홍준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했다. 조선 수군의 뛰어난 업적과 충장공의 삶에 대해 알고 나면 한백록의 사당과 정려, 재실과 묘소도 달라 보인다. 진정으로 참배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한백록을 소개하기 위해 쓴 이 글이 그런 사회 풍토를 북돋우는 데 한몫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