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스몰웨딩'이 늘어간다고 한다. 대부분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를 업체에 맡기고 최대한 많은 하객들을 초대하고 큰 웨딩홀을 빌려 결혼식을 올리던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혼주보다 혼인의 당사자가 혼인의 주체가 되고 주도를 하는 모양이다. 사람이 바뀐 탓도 있겠으나 세상이 달라진 영향도 클 것이다. 세월 못 이기는 게 어디 혼인 뿐이랴. 성인식은 이름만 남아 있고 제사도 절차가 간소해지고 횟수도 줄어드는 추세다. 그럼 장례는 어떨까?
며칠 전 20년 알고 지낸 형님이 부친상을 당해 장례식장을 찾았다. 몇 시간 장례식장에 앉아 있으면서 이러저런 풍경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요즘의 장례식은 대부분 고인의 집이 아닌 병원에서 치른다. 장례 절차는 집안 어른이 아닌 상조회사에서 주도한다. 때문에 장례 형식은 거의 통일이 되어 주관식이 아닌 객관식이 되었다. 상주는 입관부터 하관까지의 사이에 치러야 하는 절차 중에서 원하는 과정을 선택하거나 생략한다는 의사만 알려주면 된다. 그럼 장례사들이 능숙하게 절차를 진행한다. 가풍을 따져 이건 해야 하고 저건 하지 않아야 하는 설왕설래는 불필요하다. 집안 어른끼리 언성을 높이는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덕분에 상을 당한 가족들은 번거로운 절차에 발목이 잡히지 않고 오로지 조의에 답하고 슬픔을 나누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다. 장례에도 서비스라는 말이 붙어 큰 시장으로 만들어진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나, 며느리 상복을 두고 온 나라에 피바람이 불었던 이 나라의 역사를 되새겨 보면 장례의 상업화화 표준화는 큰 변화다.
예라는 게 어쩔 수 없이 허례가 끼게 마련인데 요즘 그게 사라져가는 추세다. 대표적인 예가 곡을 하지 않는 거다. 아직도 황포를 입고 상장 짚는 집도 있겠으나 그건 한복이 사라지는 것처럼 양복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종일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던 법이 사라졌다. 고인을 잃은 슬픔이 눈물과 울음으로 터져나오는 게 인지상정이나 사흘밤낮으로 곡이 이어지면 몸이 상할 텐데 예전에는 억지로라도 곡을 하게 했다. 부모 돌아가시면 자식은 그저 죄인이어야 했단다. 이게 싹 사라졌다. 울고 싶으면 울고 눈물 흘리고 싶으면 흘리면 됐지 억지로 쥐어짜면서 남에게 슬픔을 과장하지 않는다.
예를 마친 조문객을 대접하는 일도 대부분 가족이 아닌 고용된 이들이 맡는다. 음식을 맞추고 상을 차리고 그릇을 처리하는 일체의 일은 상조회사 직원과 장례식장 직원이 책임진다. 과거처럼 온 가족이 달려들고 상주의 친구들까지 손을 빌려 주던 풍경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딜 가든 거의 똑같은 메뉴가 척척 준비되고 치워진다. 그 신속함과 숙련됨에 장례식장은 훨씬 더 질서 정연한 풍경으로 변해가고 있다.
달라지는 장례식장 풍경
상을 치르는 사람만 변해가는 건 아니다. 조문객들도 변했다.
부고를 듣고 조문을 준비하면서 나는 내내 옷이 마음에 걸렸다. 검은색 양복 저고리는 그나마 좀 얇은 게 있으나 양복 바지는 겨울옷 뿐이다. 늘 준비한다 준비한다 생각만 하다가 일을 닥치고 보면 없다. 일 마치고 집에 가서 양복바지를 꺼내 들고 손가락으로 그 두께를 비벼보는데 숨이 다 막힌다. 양복을 입으면 구두도 신어야 한다. 평소 일상복 차림으로 일을 하는 나로서는 새삼 찜통더위에 양복에 구두까지 갖추자니 걱정이 앞선다. 고민고민하다가 타협을 본 게 바지는 짙은 청색 면바지, 신발은 검은색 운동화, 상의는 짙은 회색 티셔츠에 검은색 양복 저고리였다.
내 기준에 조문객으로서 모자란 차림이라 걱정이 됐다.
'결례가 아닐까?'다행히 요즘 풍속으로는 결례는 아닌 모양이다. 장례식장에 앉아 몇 시간 동안 들고나는 사람의 옷차림을 살펴봤으나 검은색 옷을 입고 온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위아래 검은색 양복이나 정장을 갖춰 입은 사람은 고인의 가족으로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였다. 문상객들은 거의 대부분 일상복 차림이었다. 긴팔, 반팔, 청바지, 면티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아 했다. 아, 반바지를 입거나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괜히 머쓱해져서 많이 변했다 소리를 하니 주위에서 이런 답이 돌아왔다.
"요즘 회사에서도 여름에는 양복 잘 안 입잖아. 다들 평상복 차림이고 회사에서 바로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그럴 거야."그럴 듯도 하다.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직장인들에게 조문을 하러 오는 일 자체가 큰 일이다.
그러고 보니 또 달라진 게 있다. 친척이 아니면 조문객 누구도 밤을 새려 하지 않는다. 옛날 영화가 드라마에 보면 장례식장 풍경 중 흔하게 보이는 게 군용담요를 깔고 화투판을 벌이는 장면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혹시 도박판으로 잘못 알고 찾아온 사람들이 아닐지 의심이 갈 정도로 시끄럽기는 어찌나 시끄러운지 모른다. 조의는 벌써 잊어 버리고 엉덩이로 깔고 앉은 현금이 부족할까봐 걱정이다. 언뜻 보면 건배도 하지 않는 장례식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인가 친척 어른의 한 마디를 듣고 불연 어른의 세계를 엿본 기억이 있다.
"저렇게 놀아주는 게 예의다. 우리한테는 고마운 거다."몇십 년 전이든 지금이든 생업을 접고 와주는 조문객들이긴 마찬가지다. 게다가 밤을 새워서 자리를 지켜주는 일이다. 화투를 치든 뭐를 하든 당사자에게는 얼마나 힘들고 축나는 일이겠나. 그래서 과거에도 아무나 밤을 새워주지는 않았다. 상주와 아주 가까운 친구나 회사 동료만이 그 임무를 맡았다.
그런 모습이 사라진 데에는 인심이 각박해진 탓도 있겠으나 역시 생활이 어려워진 탓이 클 것이다.
과거에는 회사에 지각하면서 전날 동료의 장례식장을 지켰다거나 친구 아버지의 빈소를 살피고 왔다거나 하는 변명이 먹혀들었다. 아무리 회사라지만 그 정도는 눈 감아줄 여유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 그런 변명이 통할까? 만약 누군가 그런 변명을 댄다면 상사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저 친구는 곧 사표를 내겠다는 말을 저리 돌려서 하는군."덕분에 요즘은 장례식장의 술 냉장고는 꽉 차서 줄지 않는 경우가 많다. '차를 몰고 왔다'고 사양하고 '내일 출근해야 한다' 사양하며 술잔조차 채우지 않고 밥만 한 술 급하게 뜨고 일어서는 게 보통이다.
난 늘 이런 염려 아닌 염려가 든다. 평일에 발인이면 이 상주는 어떻게 운구를 도울 사람을 구할까? 하긴 운구는 상주의 친구들이 해 주는 거라는 내 선입견도 구식이 된 지 오래일지 모르겠다.
조의금의 액수도 미세하게 달라졌다. 남의 조의금 봉투를 대신 전해줄 일이 많아 나름대로 데이터를 갖고 있는데 최근에는 거의 5만 원으로 평준화가 되었다. 이번에도 나포함 6명의 조의금을 전해드렸는데 5명이 5만 원, 1명이 3만 원이었다. 다들 상주와 20년 이상 최소 10년 이상 꾸준히 알고 지낸 사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나의 장례식을 그려봤다. 다른 건 다 막연하고 모르겠는데 유독 손님 대접하는 음식만은 내가 정해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솜씨 좋은 요리사를 섭외해 놓든지 맛 좋은 식당과 미리 계약을 해 두고 싶다. 한 공장에서 찍어 나온 듯이 똑같은 맛의 육개장과 편육, 정체모를 가자미무침이 주를 이루는 복제품 같은 음식이 내 마지막 선물이어선 곤란하다. 뭐, 그것말고는 남겨줄 것이 없기도 하다.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힘나게 한다. 나의 죽음으로 힘 빠져 있을 내 아이. 그 녀석을 위로하러 찾아 온 사람들. 모두들 내가 마련한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그런 따뜻함을 남겼으면 좋겠다.
죽음 앞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뭉클해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구나.